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공중정원과 바벨탑(2)

Que sais 2021. 1. 20.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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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 대왕>

막강한 수메르도 변화하는 세월을 넘을 수 없어 기원전 24세기 셈족인 아카드 왕조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아카드인은 수메르 문화를 흡수 우르키시니푸르라가시 등 중심도시를 건설했고 미술과 건축사회 기구종교상의 사상과 관행문자의 발명에 따른 교육 등에 괄목한 발전을 이룩한다.

아카드 왕조에서 유명한 사람이 사르곤 대왕(재위 기원전 2334-2279)이다. 그런데 그의 탄생 일화는 현대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다.

 

사르곤의 모친이 갓난아기 사르곤을 역청(癧靑)을 칠한 바구니에 넣어 유프라테스 강에 흘려보내 그의 미래를 운명에 맡겼다. 그런데 운명은 사르곤을 저버리지 않아 농부가 바구니를 발견했고 그를 아들로 양육한다.’

 

성경의 모세의 일생과 유사한데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르곤은 일단 권력을 쥐자 때를 놓치지 않고 정복 활동에 매진한다. 사르곤은 대단히 정략적인 사람으로 평가한다.

 

사르공대왕의 궁전

그가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하고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을 아우를 필요가 생기자 그는 주민들을 현명하게 통치하기 위한 방법은 주민들의 정신 세계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카드 지역 출신임에도 수메르 인의 최고 신 엔릴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의 최고 신으로 봉헌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왕이 된 것은 최고 신으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르곤왕의 이런 주장은 이후 오리엔트에서 매우 중요한 일로 인식된다. 오리엔트의 각 국에서 왕이 정통성을 갖느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르곤은 손자인 4대 왕인 나람신(재위 기원전 2254-2218)이 생존했을 때 이미 신격화되었다. 그가 신이므로 손자가 왕이 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뜻으로 그의 칭호만 보아도 놀랄 정도다.

 

위력이 있는 이, 아카드의 신사방 세계의 왕신인 나람신

 

이 칭호는 이후 메소포타미아 대왕의 전통적인 칭호로 내려온다. 여기에서 사방 세계란 동은 엘람북은 아시리아서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남은 수메르의  가르킬 정도로 광대한 지역을 뜻한다.

사르공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경 셈족인 아모르인이 바빌론을 중심으로 제1왕조를 세우는데 제6대왕이 유명한 함무라비. 그는 기원전 1728년에서 1686년까지의 사람으로 알려지는데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고 달력과 저울 등을 통일시켰으며 영토도 시리아, 팔레스티나까지 확장했다.

 

함무라비 법전

무라비에 의해 바빌론이 비로소 당대 세계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바빌론 지역은 큰 틀에서 함무라비 왕의 근거지였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이 모세의 십계명보다 거의 1,000년이 앞섰다고 생각한다.

이후 메소파타미아에서 수많은 세력들이 세워지고 멸망을 반복한다.

기원전 17세기 중반, 카시트 바빌론에 침입하여 함무라비 왕조를 쓰러트렸으며 이어서 히타이트를 거쳐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세계사를 주름잡기 시작한다. 학자들에 따라 아시리아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아시리아가 고대 세계사에서 매우 높은 악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1가 등장할 때의 이야기를 보면 정말 놀랍다.

 

나는 2만 명의 병사 및 그들의 5명의 왕과 싸워 크게 물리쳤고 그들의 끈적끈적한 피를 골짜기의 산봉우리에 흘리게 했다. 나는 그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도시 주변에 그 목들을 마치 곡물의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나는 그들의 도시를 불사르고 파괴하고 ()로 돌아가게 했다.’

 

한마디로 자랑스러운 피비린내 나는 기록으로 당대에 2만 명을 동원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의 잔혹한 유혈 정책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주는 야만성으로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아시리아의 이리로 불리는 아슈르나시르팔은 아시리아를 최강국으로 올려놓은 공포정치의 대명사인데 그 역시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자신의 업적으로 적었다.

 

나는 산의 모든 봉우리를 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험준한 산중에서나는 그들을 죽이고 피로 산을 붉게 만들었다. 시체가 모든 산의 골짜기와 절벽을 덮었는데 나는 병사들의 목을 자르고그것을 쌓아올려기둥을 만들었다젊은이도 처녀들도 불 속으로 던졌다나는 도시의 문을 향하여 기둥을 세웠다그리고 중요한 사람들 모두의 가죽을 모조리 벗겨, 그 가죽으로 기둥을 감았다또 어떤 자는 기둥 속에 넣어 버렸으며 어떤 자는 말뚝에 꽂아 기둥 위에 세우고어떤 자는 기둥 주위의 말뚝에 결박했다나의 영토내의 수많은 자의 가죽을 벗겨 그것을 벽에 바르기도 했으며 반역한 관리들궁정의 신하들의 수족을 잘랐다. 그들 중에 많은 젊은이와 여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어떤 자는 코와 귀를 베어내고 많은 사람의 눈을 도려냈다.’

 

학자들은 아슈르나시르팔도 필레세르 1세와 같이 엽기적인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었다는 것은 당대의 사고가 현대인과 다름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아시리아의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이 파괴만 한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잘 알려지는 대규모 지구라트 도서관 등도 함께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현재의 모술 남쪽에 님루드 건설했는데 왕궁만 25,000제곱미터이며 의식용 홀왕의 거실창고통풍이 잘 되는 정원 등이 복잡하게 설치되었다. 특히 도서관에 수많은 점토판을 보관하여 현재 지구인들이 알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전수된 것이다.

왕궁의 규모는 발굴에 의해 그가 남긴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삼나무 등 각종 나무로 만든 궁전을 나의 거처로 삼고 내가 언제든지 왕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궁전을 만들었다. 흰 석회석과 설화석고로 산과 바다의 동물을 본뜨게 하여 그것들을 성문 안에 배치했다. 왕인 나에게 어울리도록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세계 패자가 된 이유는 남다른 잔인성 때문은 아니다. 당대에 아시리아와 같은 난행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반사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은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지역적 요충지임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보석목재석재 등을 수출입하는 원거리 무역을 활성화시켰는데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아랍인들의 탁월한 상술의 원천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아시리아의 광대한 영토는 잘 훈련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 완비된 역전제도 등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특히 기병과 전차를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말을 이동형 동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대결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당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석권했지만, 결국 제국 내분에 의해 기원전 612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한다.

 

바빌론의 느브갓네살2세

이후 기원전 6세기 경, 성경에서 느부갓네살 2로 나오는 네부카드네자르2세에 의해 비로소 바빌론에 거대한 왕궁을 세우는 등 전성기에 들어간다. 이때 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유태인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데 소위 바빌론 유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남다르게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정복을 당한 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중심지가 바로 사방 15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바빌론으로 15킬로미터라면 여의도의 약 200배나 되는 규모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5000년 전부터 3,000년 전에 엄청난 도시가 건설되었다는 것인데 현재 보이는 것은 대부분 후기 바빌론 번영기의 유적으로 직사각형의 도심은 해자를 갖추고 점토로 만든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려한 대로는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대로의 앞쪽 구간은 광택이 나는 기와로 만든 사자부조로 장식한 성벽을 쌓아놓았다.

특히 바빌론의 군대가 하늘과 땅의 창조주요 신들의 신인 마르두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행진한 행차의 길을 따라 이슈타르문이 서있었다. 청색 타일로 만든 황소와 환상의 동물 무슈 쿠슈를 얕게 돋을 새김했으며 대지와 전쟁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봉헌되었고, 이슈타르문으로 네브카드네자르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알려지는데 전성기에는 바빌론에 이슈타르 문과 비슷한 성문이 수십 개가 있었다고 한다.

용과 황소 무늬를 얕게 돋을새김하고 푸른색 유약을 바른 타일을 전면에 붙인 이 문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봉헌된 것이다. 원본은 다소 보존상태가 좋아 독일 탐험가들이 원본을 통째로 뜯어 갔는데 현재 독일의 박물관 섬 안에 있는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의 자랑으로 되어 있다.

이슈타르 문 바로 뒤, 유프라테스 강 방향으로 거대한 건물군들이 자리 잡았는데 이곳이 현재 상당부분 복원된 곳이다. 문을 통해 들어가면 큰 안마당이 나오고 이어서 4개의 마당이 붙어 있는데 이는 사담 후세인이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