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수스 도서관>
신에페수스의 압권은 아고라 및 켈수스 도서관이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아고라는 110 x 110미터의 야외 시장을 뜻한다. 3세기 초에 카라칼라 황제에 의해 복구되었지만 4세기에 있었던 지진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도시에서 가장 큰 상업지다. 상점들을 주랑을 따라 배치되었는데 상점들의 뒤쪽에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다.
켈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스의 총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킬라가 아버지 켈수스를 추모하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높이 16미터, 너비가 21미터다. 이 건물은 2세기에 건설되었고 260년에 있었던 화재로 파괴되었으나 정면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9 단 연단에 자리잡은 인상적인 도서관 외관은 부조 조각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각각 3쌍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다. 상부 층의 기둥은 하부 층의 기둥보다 짧고 얇지만 삼각형 페디먼트 즉 중앙 쌍과 반원형 페디멘트 두 개의 외부 쌍을 지지한다.
위층의 각 기둥 쌍 사이에 큰 창이 있는데 외관은 물론 전체 건물이 실제보다 넓게 보이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러한 트릭을 위해 건축가는 연단을 부드럽게 볼록하게 만들고 측면 기둥, 수도 및 서까래를 건물 중앙에 있는 것보다 약간 작게 만들었다.
도서관에는 정교하게 장식 된 프레임이 있는 세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중앙 출입구는 다른 두 개보다 높이가 더 크다. 출입구 각각 위로 창문이 있으며 틈새에 다시 설치된 조각상 8개가 둘씩 짝을 지어 서 있다. 이 4쌍의 조각은 각각 지혜ㆍ지식ㆍ지능ㆍ덕망을 의미하는데 현재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모두 복제품으로 진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에 있다.
도서관 내부의 크기는 16.72m x 10.92m이며 바닥면적은 약180제곱미터인데 장식된 대리석으로 포장되었다. 서쪽 벽의 일부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두루마리를 보관하기 위해 벽에는 벽감이 설치되었다. 학자들은 벽감에 최소한 12,000여권의 두루마리를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서관의 수장품들이 습기에 문제가 있으므로 습도를 낮추고 보다 안정적인 내부 온도를 만들기 위해 벽 내부에 빈 틈새를 만들었다. 내부에는 건물 건설을 직접 의뢰하고 수많은 두루마리를 구입해 보관한 셀수스 또는 그들의 아들 동상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건물은 2세기에 건설되었고 260년에 있었던 화재로 파괴되었으나 정면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1970년부터 복원 작업을 거친 것이다.
에페소스는 사도 바울이 이곳 극장에서 청중에게 연설한 것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초기 기독교에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에 더불어 도서관과 함께 학습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도서관과 기독교는 불가분하게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이는 성직자에게 중요한 두루마리 등 텍스트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서기 262에 화재로 도서관이 소실되었지만 외관은 파괴되지 않았고 4세기 후반 도서관은 다시 수리되었는데 이때 앞 계단 옆에 작은 분수를 추가했다. 에페소스는 431년에 주교 협의회를 주최하여 명성을 높였다. 10세기에 대지진으로 그때까지 굳굳하게 서있던 외관이 무너졌다. 1904년 도서관이 차례로 발굴되기 시작했고 켈수스의 석관도 발견되었다.
외관은 재조립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되었으며 이 당시 발견된 조각상들은 비엔나로 옮겨졌지만 발견된 위치에 사본이 자리잡고 있다.
도서관에서 북쪽으로 대극장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대리석 도로라고 한다.
에페소스 대극장은 무대 바닥에서 갤러리 맨 꼭대기 까지 높이가 60미터로 에게 해에서 가장 큰 극장 중에 하나다. 길이 228미터 폭 38미터의 작지 않은 스타디움은 낮은 산의 경사로에 관중석을 만들고 북쪽의 낮은 부분은 원통형 지붕으로 덮었다. 무대는 높이 2.7미터인 귀빈석 위에 있었으며 좌우에 위치한 경사로를 통해 무대에 올라 갈 수 있다. 총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기원전 3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로마 클라디우디우스 황제 때 시작되어 트라이잔 황제 때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무대의 1층과 2층 건물은 네로 황제 때 건설되었고 3층은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때 만들어졌다.
이 스타디움은 에페수스의 명물로 알려진 낙타 레슬링 대회의 대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기둥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후에 비잔틴 성을 건설할 때 건축 자재로 사용된 후 남은 잔해다.
당시 에페소스에는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요한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여신상 판매를 방해했다. 생계에 위협을 느낀 상인들이 바울과 제자들을 공격했는데 이 극장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대극장은 길이 600미터, 폭 11미터에 달하는 아카디언 거리와 이어진다. 아카디우스 황제(395〜408)가 보수한 것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는데 극장과 주변 지역을 항구까지 연결시켜주고 있다. 이 거리는 길 양쪽에 열주랑이 있고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있으며 열주랑은 상점들이 들어가 있어 겨울은 비바람, 여름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이곳은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의 중심지이자 주교의 거주지로 에페소스는 번성한다. 자료에 의하면 이 거리는 규칙적으로 세워진 횃불로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경기장 옆에 베디우스 체육관이 있는데 이 체육관은 150년 아르테미스 여신의 집정관에게 봉헌된 것으로 베디우스 안토니우스가 건설하여 베디우스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 체육관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이 체육관에서 수많은 황제의 동상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성장에 큰 역할을 한 도시로 10세기 터키족이 정복할 때까지 줄곧 대중적인 순례지 중 하나였다. 이후 19세기 중반 우드에 의해 재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명되어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명승지로 부상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유네스코세계유산에서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명소 중 한 곳이라고 말한다.
신에페소스가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에페소스로 향하기 전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는 곳은 인근에 있는 마리아의 집, 성 요한의 교회다.
요한은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100년경에 밧모 섬에서 돌아와 에페소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교회가 그가 죽은 몇 년 후 그의 무덤 위에 세워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교회는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세워졌다고 알려졌으나 1926〜1928년에 무덤을 정밀 조사한 학자들은 이 교회가 4세기경에 건설되었다고 추정했다. 에게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지만 13세기 터키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방치되었다가 140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서 파괴되었다. 건물은 40 x 110미터에 6개의 돔으로 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사제들의 교구로 사용되었던 작은 예배당에 성물들이 보관되어 있던 성물보관소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테오도라가 만든 기둥머리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문입구를 장식하던 트로이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조각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묘지실의 대리석 석관은 성물로 인식되었다. 사도요한이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당 터의 중앙부분에는 제대가 있었던 자리와 세례용 욕조가 있고, 사도 요한의 무덤이 이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동로마시대에 건설되었지만 13세기경 발생한 대지진으로 건물이 거의 다 무너진데다 투르크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모스크 건설에 파손된 자재들을 사용하여 복원되지 못했다고 한다.
에페소스를 방문했으면 마리아의 집도 반드시 보아야 할 장소다.
에페수스의 마그네시안 게이트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하여 교통이 만만치 않지만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세계인이 많이 찾는 장소다.
정말로 마리아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사망했는지는 학자들 간에 뜨거운 논쟁거리이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이 사도 요한이 37〜45년 또는 기원 42〜48년 사이에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로 왔다고 추정한다. 현재 작은 예배당으로 되어 있는데 바티칸은 1961년 이곳 즉 ‘성모마리아의 집’을 순례지로 선포했다.
그런데 이 집을 교황청에서 성지로 인정한 것은 이 건물의 예배당이 6세기에 사용되었지만 벽의 일부는 1세기 때 건설된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 증거가 정확하게 마리아가 거주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에페소스에 있는 이 교회가 마리아에게 바쳐진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반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마리아가 사망하기 직전에 살았다고 주장되는 곳은 중동지역에도 2군데가 거론되어 이곳까지 세 군데로 알려진다.
여하튼 집터 여러 곳이 작은 마리아의 동상이 서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미사를 올리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2000여년에 걸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마당에서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촛불을 밝히는데 마리아를 위한 기도를 올리거나 개인 소원을 빈다. 특히 계단 아래엔 만병을 치료한다는 성수가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성수를 마시거나 병에 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회교도에게도 중요한 장소로 수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며 매년 8월 15일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미사가 열린다. 이와 별도로 매일 아침 7시와 10시 30분 예배를 하는데 여기서 미사를 드릴려면 예약해야 한다.
에페소스에서 꼭 방문해야 할 곳은 고고학박물관이다. 에페소스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아르테미스 여신상이다. 기원 1세기와 2 세기 것이다. 아르테미스가 이런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박물관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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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에페수스」, 함길수, 네이버캐스트, 2011.11.18
「[정보글]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의 역사왜곡 10가지」, https://blog.naver.com/ktm1296/221583442660
[정보글]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6가지」, https://blog.naver.com/ktm1296/221583846135
https://www.ancient.eu/Library_of_Celsus/
https://allthatsinteresting.com/greek-wars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지 않았다』, 게르하르트 프라우제, 한길사, 1994
『세계의 불가사의 대탐험』, YBM si-sa, 2004
『클락시커 50 고고학』, 볼프강 코른, 해냄, 2004
『에페수스』, Mert Basim Yayin Kurule, Mert Basim Yayincilik Dagttm Reklamcilik Tic. Ltd., 2005
『터키의 유혹』, 강용수, 유토피아, 2007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자연·문화유산 100』, 앤 밴투스 외, 서강,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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