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노아의 홍수(1)

Que sais 2021. 1. 2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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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산에 이어 노아의 홍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아의 홍수 역시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우바이드 인이 살았고 기원전 3500년경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라크를 경유한 수메르 인들이 이주하여 우바이드 인들을 밀어냈다고 추정한다. 수메르 인들에 의해 우르, 키시, 니푸르, 라가시 등 중심도시가 생겨났고 미술과 건축, 사회 기구, 종교상의 사상과 관행, 문자의 발명에 따른 교육 등에 괄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선주민인 우바이드 인을 대체하면서 3기에 걸친 초기왕조(기원전 28002350)를 탄생시킨다. 초기왕조란 도시국가에 군주가 나타난 시대를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초기왕조의 수메르 도시는 신전도시 즉 신전공동체. 즉 도시는 신전의 소속이며 도시의 성원은 신전 소속민이었다. 초기에 신전은 조그마한 건물로 작은 제단과 공물용 탁자가 있을 뿐이었으나 점점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신전의 규모도 커지고 구조도 훌륭해져서 훗날 지구라트가 되었다. 신전은 초기부터 가족이나 씨족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역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권력 변모를 정확하게 구현할 수는 없으나 수메르 전체의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도시를 현재의 바그다드의 남쪽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키시로 추정한다. 키시는 기원전 3000년경, 에타나라는 이름의 왕 치세 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에타나는 모든 땅을 안정시켰다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에타나 밑에서 키시가 수메르의 여러 도시들을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르크 복원도

에타나 이후 키시의 남동 약 16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우루크가 키시로부터 패권을 빼앗고 제1기 초기왕조를 세웠다. 1왕조의 창시자인 메스키아가시르는 에타나보다 더 큰 영토를 지배한 듯 바다에 들어가고 산에 올랐다.’고 기록했다. 아마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지중해로부터 수메르 동쪽의 자그로스 산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지배 하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근래에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기원전 2500년에 아시리아가 아슈르에서 생겨났으며 기원전 1400년에 시민상비군을 만들 정도로 강성해져 기원전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다. 기원전 960년부터 기원전 612년 갑자기 멸망할 때까지 350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넓고 강한 나라였다.

고대 제국 아시리아의 역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근거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가 아니라 이집트의 텔 엘 아르마나 유적에서 발견된 편지 때문이다.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캇시트 왕 부르나부리아스는 당시 고대 세계의 공용어나 마찬가지인 아카드어로 아케나톤 파라오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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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의 지배자인 아슈르발리트가 파라오에게 사신을 보낸 것은 건방진 태도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즉 캇시트의 속령이므로 아시리아의 사신을 맨손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부르나부리아시가 이집트의 아케나톤에게 쓴 편지에 언급된 기원전 14세기 경의 아시리아는 강대한 위력을 떨치고 있으므로 바빌로니아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시리아의 역사는 심한 부침을 겪었는데 대체로 함무라비 시대 직전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태반을 정복한 강자였지만 계속 쇠퇴를 걷다가 기원전 1400년경부터 국력이 회복된 터였다.

여하튼 아슈르발리트 치세 때에 국력이 급격히 상승하자 캇시트 왕이 아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리아 사신들을 박대하라고 이집트에 요청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캇시트 왕이 현실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양국은 대립으로 치고 박더니 갑자기 화해가 이루어졌고 아슈르발리트의 손자인 쿠리갈주가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적국의 왕자가 왕으로 옹립된 것도 놀랍지만 쿠리갈주는 비빌로니아의 왕이 되자마자 갑자기 돌변하여 자신은 바빌로니아인이고 아시리아와는 적대관계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자신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아시리아를 부정하고 바빌로니아 인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에 다소 의혹이 있지만 여하튼 쿠리갈주는 곧바로 바빌로니아의 방비를 굳히기 위해 바그다드 근처인 두르 쿠리갈주 현재의 아콰르쿠프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고 아시리아와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쿠리갈주의 의도와는 달리 이들의 대치는 아시리아의 승리로 끝난다. 아시리아 왕인 투쿨티 니누르타가 바빌로니아 왕을 포로로 하여 나는 왕의 목을 발판처럼 짓밟았다라고 자랑하였다.

그 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전투를 계속하였고 때때로 아시리아의 수도까지 위협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아시리아에 주어졌다.

 

니네베 복원도

기원전 11세기, 아시리아에 걸출한 영웅인 티글라트 필레세르 1가 태어났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왕국의 골칫거리인 아나톨리아의 유목민을 정복했고 시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여러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바치게 했다. 그는 수도 아슈르에 대규모 지구라트와 신전을 세웠고 대규모 도서관을 설치하여 많은 문학작품들을 저장했다. 특히 새롭게 건설한 니네베를 푸르게 만들기 위해 티그리스 강의 지류로부터 물을 끌어 들였고 농업 개혁을 이뤄 주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영광도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들의 광대한 영토는 순식간에 와해되더니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612년 연기와 같이 사라졌다. 아슈르바니팔 왕이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불길에 몸을 내던졌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아시리아가 멸망하자 고대 문명 사상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아시리아의 니네베(Nineveh)는 폐허로 바뀌었다. 뜨거운 사막의 모래와 먼지 구름이 폐허를 덮자 왕궁은 큰 둔덕으로 변했고 그 위에 식물들이 자라났다.

19세기까지도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를 맨 처음 제패했던 고대제국 아시리아의 유적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1840년 티그리스강변의 현 이라크의 모술 시의 프랑스 영사관에 의사인 폴 에밀 보타(Botta, 18021870)1842년 영사로 부임했다. 그는 청년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자랑할 정도로 활동적인데 그가 부임한 모술은 페르시아만의 바스라와 터키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강국들이 다투어 진출해 있었다. 모술 시 강 건너편에 니네웨(Nineweh)라는 마을이 있었고 여러 곳에 약간 높은 둔덕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부터 불기 시작한 고대 문명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의 유행병이었다. 보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유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현지 주위에서 자주 발견되는 벽돌의 출처에 관심을 갖고 현지인들에게 어디에서 출토된 것이냐고 질문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답변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폴 에밀 보타

보타는 고고학자는 아니었지만 니네웨에 있는 퀸지크로 불리는 양떼 언덕을 발굴해 보기로 했다. 독일의 아시아학자 몰(Mohl) 박사가 모술 인근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던 곳이므로 언덕들을 주의하여 발굴해보면 엄청난 발견이 될지 모른다고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몰 박사는 가능하면 사라진 아시리아의 니네베를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보타가 퀸지크 언덕을 1년이나 팠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인근 지역인 코르사바드로에 살고 있는 한 아라비아인이 자기 마을에는 고대 벽돌들이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고 알려왔다.

보타가 코르사바드로를 방문하자마자 아시리아의 유명한 턱수염과 날개가 달린 라마수로 불리는 인면수신상이 그의 눈에 나타났다. 이집트의 유물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던 보타는 자신이 이집트와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8435월 그는 아시리아 전성기의 유물들을 찾았다고 프랑스 파리에 알렸다.

그의 발굴 소식은 곧바로 프랑스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보타의 발견을 가장 반긴 사람은 성경학자들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성경에 무려 152번이나 나타나는 아시리아는 전설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는데 보타의 발견이 사실이라면 성경에 적혀있는 기록이 모두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었다.

보타의 성과에 고무된 프랑스는 곧바로 보타가 발견할 유물들을 스케치할 화가를 비롯하여 발굴 자금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행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보타는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큰 행운을 잡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가 발굴한 둔덕은 놀랍게도 기원전 709년에 건설된 니네베의 여름 궁전이었다. 성벽에 이어 궁전의 방과 정원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으며 조상과 부조들이 엄청나게 발굴되었다. 도기는 물론 무기도 나왔다.

물론 보타 역시 초창기 발굴자답게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아시리아의 거대한 조각상들은 설화석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천 년 만에 햇빛에 노출되자 곧바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타는 자신이 발견한 조각상들을 프랑스로 보내기에 급급하여 조각상들을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가 공들여 선적한 첫 번째 유물들이 티그리스 강을 내려가는 도중 급류에 휩쓸려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보타는 다시 선적물들을 모았고 수로 운반의 문제점도 극복한 후 프랑스로 보냈다. 18475, 루브르 박물관에서 공개된 이들 유물들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고대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