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노아의 홍수(2)

Que sais 2021. 1. 2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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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가 우연하게 발견한 것은 니네베의 여름 궁전이었으므로 진짜 니네베 궁전은 다른 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발굴 작업에 도전했는데 실제로 니네베를 발굴한 사람은 영국인 오스틴 헨리 레이아드 경(Austen Henry Layard, 18171894)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영국, 스위스에서 자랐고 각 국의 언어에 능통했다. 또한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으므로 아버지와 함께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원래 법률을 공부하고 런던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6년이나 근무했고 정치에도 손을 댔지만 보헤미아 기질이 있는 그에게 답답한 사무소 일은 맞지 않자 결국 자신의 전공을 바꿨다. 그는 자신에게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밝혀낼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아드

1840년 모술에 도착한 레이아드는 자신이 직접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찾아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1842년 프랑스인 보타가 퀸지크 구릉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밝힐 사명감을 갖고 있던 레이아드는 우선 보타를 만나보기로 했다.

다행하게도 두 사람은 죽이 맞았고 레이아드는 자신도 다른 곳을 발굴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발굴 자금을 구하러 영국으로 가던 레이아드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영국대사 캐닝이 도와달라고 하자 그를 도와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843년 보타가 코르사바드라는 곳에서 아시리아 궁전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자 레이아드는 영국도 발굴에 참여해야 한다고 캐닝을 설득했다.

1845년 캐닝은 레이아드에게 1차 발굴자금으로 60파운드를 지원했고 레이아드는 곧바로 모술을 찾았다. 그는 발굴이 성공하려면 현지인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목민 족장과 사귄 후 님루드 둔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안 되어 석판이 발견됐다. 전례없는 행운을 레이아드에게 안겨준 발굴은 보타의 니네베 여름궁전 발굴보다 더 값진 유물들을 쏟아내었다. 수많은 조상과 부조들이 발견되었고 유명한 라마수도 무려 13쌍이나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유명한 아슈르나시팔 2세의 궁전이었다.

아시리아 발굴의 첫 영예는 보타에게 빼앗겼지만 님루드의 발굴은 레이아드로 하여금 고고학 분야에서 보타의 명성을 앞서게 했다. 레이아드는 다음 발굴지를 보타가 실패한 퀸지크로 정했다. 고고학에 전문가가 아닌 보타는 무작정 언덕을 파내려 갔지만 레이아드는 어디를 파야할지 알고 있었다. 퀸지크 언덕은 고고학자들이 그렇게도 찾기를 원했던 궁전, 아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군주 중에 한 명인 세나케립(기원전 704681)의 왕궁 즉 니네베였다.

 

<아시리아 도서관 발견>

니네베에서 레이아드의 발굴을 값어치 있게 만든 것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세운 도서관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레이아드는 점토판에 쐐기문자 즉 설형문자로 새겨진 책 수천 권을 발견했다. 점토판들은 아슈르바니팔 왕(기원전 668~628)이 서아시아 방방곡곡에서 모은 자료들로 왕의 계보와 역사는 물론 설화들도 있었다.

 

아슈르바니팔의사자사냥

점토판의 쐐기문자가 해득되면서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나온 수많은 서판들은 수수께끼의 아시리아는 물론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사자료가 되었다.

레이아드는 보타보다 여러 면에서 운이 좋았다.

그가 발굴한 유물들은 보타가 선적에 실패한 경험을 토대로 완벽한 수송 작전을 펼쳐 단 하나의 손실도 없었다. 그의 유물 수송 작전 성공은 영국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1851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후 1852년 의원 자격을 얻었고 두 번이나 외무차관을 역임했다.

정치가로 변신한 그는 무임소 대사, 크림 전쟁과 인도의 정치 감독관을 거쳤고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말년을 예술품 수집을 취미로 삼으면서 지내다가 1894년 사망했다. 세계 발굴 역사상 가장 행운을 얻은 사람으로 레이아드를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레이아드가 1849년에 발간한 니네베와 유물1853년에 발간한 니네베와 비빌론의 유적에서의 발견은 당시로서는 초 베스트셀러였는데 그의 책은 150년이 지난 현재도 발간되고 있다.

그의 성공담은 후대의 또 다른 발굴의 기적으로 불리는 트로이의 발굴자 슐레이만과도 연결된다. 슐레이만은 레이아드가 동화 속의 니네베를 찾았는데 나라고 전설 속의 트로이를 찾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보타와 레이아드가 발견한 아시리아의 유물들은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양측에서 마련한 대형특별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특히 대형 라마수 조각들이 문을 장식하고 있는 전시관은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한데 성벽 전체를 가져와 복원했으므로 바닥과 천장을 보지 않으면 프랑스나 영국의 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다.

루브르 박물관의 경우 전시유물이 워낙 많아 대충대충 보아도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이야기할 정도데 박물관 측에서는 바쁜 관람객들을 위해 꼭 보아야 할 중요 유물들이 그려진 안내도를 곳곳에 비치하고 있다. 그 중에는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이집트의 서기상이크나톤의 조각상’, ‘하무라비 법전등이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유물 중 사르곤 왕 궁전의 라마수도 빠지지 않는다.

 

노아의 홍수가 적혀 있는 길가메시 대서사시

보타와 레이아드의 중요성은 점토판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발견한 점토판은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학자들이 점토판 해석에 나섰다. 점토판의 해석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 엄밀하게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도 발견되었다. 신들의 전쟁, 빌린 날개등 유명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중 수메르 속담으로 대표되는 지혜의 글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고개를 끄떡이게 만든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무려 370여 개나 되는데 그 중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치부(致富)는 하면 할수록 눈을 뗄 수 없다. 남이 노리지 않을까 훔치지 않을까 염려되니 가난한 편이 마음 편해 좋다.󰡑

󰡐욕을 하는 사람에게 욕을 되돌려서는 안 된다. 욕을 하나 보내면, 욕이 또 하나 되돌아온다.󰡑

󰡐마음이 증오를 낳은 적은 없다. 증오를 낳은 것은 언제나 말이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아내를 얻어라. 자기 마음에 들 만큼 아이를 가지라.󰡑

󰡐아내를 많이 얻는 것은 사람의 업보이고, 자식을 많이 얻는 것은 신의 업보다.󰡑

󰡐품행이 나쁜 아내가 집에 있는 것은 액신(厄神)이 가득 찬 것과 마찬가지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참말을 해 보라. 모두가 거짓말이 된다.󰡑

󰡐어떤 사람의 즐거움은 어떤 사람의 괴로움, 어떤 사람의 괴로움은 어떤 사람의 즐거움.󰡑

 

그러나 점토판의 해석은 1872년 대영박물관의 이집트아시리아부의 담당자인 스미스(18401876)에 의해 차원을 달리하는 일로 전개된다. 1852년 레이어드가 니네베에서 발견한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 점토판을 읽다가 뜻밖의 문장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점토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길가메시홍수전설점토판

 

배가 니시르 산에 도착한 다음에 날려 보낸 비둘기가 다시 배로 돌아왔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이야기 끝 부분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서 중 창세기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신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612~13)󰡐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方舟:네모난 배)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혔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717~21)󰡐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좋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육백일 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 일에 땅이 말랐더라.󰡑(810~15)

 

구약성서의 내용은 신이 인간들을 멸종시키려고 결심하였으나 정직하고 신앙심이 깊은 노아와 아내, 그의 네 아들 부부만은 구하기로 하고 노아에게 3층의 방주를 만들라고 한다. 방주에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구분하여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한 쌍씩 넣어 생명을 보존하라고 한다. 노아는 신의 말씀대로 방주를 건설하고 동물들을 모아 홍수에 대비하여 목숨을 구하고 홍수가 끝나자 방주에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때 지폐 조판공으로 일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직장을 얻은 조지 스미스는 점토판의 내용에 흥미를 느끼고 또 다른 점토판을 찾아내 읽어보았다. 점토판의 전체 줄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누락된 부분이 더 있다는 점을 깨닫고 발굴지인 니네베를 직접 방문하기 위해 대중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그의 호소에 의해 연구비가 모이자 니네베를 방문하는데 다행히도 그곳에서 누락된 나머지 점토판을 찾을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사건을 고고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기적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사실 니네베에서 발견된 점토판이 대영박물관에 수장될 때까지 점토판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 점토판은 바구니 속에 넣어져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영국으로 옮겨졌을 정도였다. 운송을 담당한 직원들도 점토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송 도중에 훼손된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이 천덕꾸러기 점토판이 한 명의 천재인 스미스에 의해서 빛을 본 것이다.

그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수 천 개의 점토판에서 홍수 이야기가 쓰여 있는 80여 개의 파편을 짜 맞추는데 성공했고 비로소 점토판의 중요성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스미스가 아귀가 맞지 않아 니네베를 방문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연결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정말 믿었던 것은 아니다.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돼있는 나머지 점토판을 니네베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