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국인과 네안데르탈인

네안데르탈인(48) : 라스코 동굴 벽화(2)

Que sais 2021. 2. 1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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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인 동굴벽화 발견>

인류학자들은 고대인들이 살았던 동굴을 주목한다. 동굴 안에는 고대인들의 발자취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추적하면 인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69 어느 날,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의 영주인 마르셀리노 데 사나투라(18311888) 후작이 기르는 개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졌다. 개를 뒤쫓아 온 사나투라와 사냥꾼들이 그 틈으로 들어가 보니 그 안은 입구보다 점점 넓어지는 동굴이었다. 이것이 알타미라 동굴이다. 그러나 사나투라는 발 디딜 곳이 험하고 장소에 따라 천장이 낮아 들어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자 동굴 속으로 사람이나 동물들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18689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여왕 이사벨라 2프랑스로 망명했고 스페인에도 혁신적인 분위기가 생겨 일부 지식 계급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나투라 후작도 프랑스에서 선사학이라는 신학문이 유행한다는 정보를 들은데다가 1873 독일의 슐레이만트로이와 미케네의 발굴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발견했던 동굴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1875 자신이 발견한 동굴로 가서 발굴을 시도했으나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하지만 1878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알타미라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령 바스크 지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도 있었다.

동굴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한 그는 두 번이나 포기했던 동굴을 철저하게 발굴해보기로 결정하고, 1879년 열두 살 짜리 딸 마리아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로 어렵게 들어갔다. 그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 동굴 입구에서 화덕 흔적구석기 시대의 주거 흔적을 발견했다. 이 자료들은 추후 동굴에 크로마뇽이 살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만, 그 이상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잠시 동굴을 둘러보는 사이에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찾아보니 마리아동굴 안쪽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밧줄로 램프를 딸에게 내려 보내고 자신도 마리아를 구하려고 내려갔다. 그곳은 구덩이가 아니라 꽤 널찍한 굴이었다. 천장 한 쪽이 무너져 막혀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정확히 보지 못하고 빠졌던 것이다.

딸이 램프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빠, 소가 있어요.”

? 어디?”

이것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크로마뇽인이 그린 벽화가 있는 알타미라 동굴이 발견된 연유다. 동굴의 길이는 270미터. 천장까지 그려진 그림은 거의 전부 들소였고 모두 빨강, 검정, 보라 빛깔로 진하게 칠해져 있었다. 들소 외에 멧돼지와 말도 있었다. 길이 18미터, 9미터나 되는 대형 벽화가 그려진 방도 있었다. 대형 벽화에는 모두 25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림의 수준이었다. 선사 시대의 화가들도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미학적 원리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대인들이 봐도 탄복할 정도로 질감과 음영을 조화시켜 입체감을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바위의 요철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그릴 정도로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화가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알타미라 동굴은 곧바로 유명해져 당시 스페인 국왕알폰소 12세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현장을 방문한 학자들은 석기 시대 사람들이 동굴의 그림들을 그렸다는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학자들이 반발한 가장 큰 요인은 크로마뇽인이 동굴 벽화를 그렸다는 것이 당시에 유행하던 진화론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는데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미개한 원시인이 그와 같이 훌륭한 그림을 그릴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진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더구나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벽화의 그림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역동적이었다.

 

며칠 전에 칠한 것처럼 뚜렷한 빛깔을 갖고 있는 그림들을 두고 석기 시대 사람들이 그렸다니 말도 안 된다.”

 

심지어는 슐레이만트로이 성 발견에 고무된 사나투라가 명예욕에 사로잡혀 당시 그 지방을 돌아다니던 유랑화가에게 몰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거짓말을 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제수이트파 수도사들의 음모에서 나온 그림이라는 말도 있었다. 인류의 여명기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진척되어 성경의 기록과 상치되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선사학자들의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도사들이 꾸며낸 자작극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대의 선사학자 피에트 교수와 같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마들렌 문화에 속한다고 사나투라를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그의 주장은 대세에 밀려 수용되지 않았다. 스페인의 귀족 중에 귀족인 사나투라 후작은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가 학회에 출석하면 알타미라의 미치광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누명을 벗게 된 것은 알타미라 동굴을 발견한 지 20년이나 지나서였다. 프랑스에서 네 개의 동굴벽화가 연달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알타미라 동굴의 황소프랑스의 퐁 드 곰므에 있는 황소와 같은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브뢰이(Henri Breuil, 18771961) 신부는 이들 동굴벽화가 마들렌 문화의 초기라고 인정했고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도 진짜 석기 시대의 그림이라고 확인했다.

몇몇 동굴에 그려진 동물들이 서로 유사성을 보이자 선사 시대에도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주술사 집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들은 구석기 시대의 끝 무렵인 마들렌 문화기의 작품으로 11000년 내지 17000년 전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살았던 크로마뇽인들이 그린 것이다.

이들 벽화의 발견은 고인류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10,000이 넘는 시기의 인간 선조가 벽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동굴 탐사에 투입했는데 프랑스 남서부오리냐크에는 크고 작은 30여 개의 선사 시대 동굴에서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수많은 동굴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그림의 연대는 알타미라 동굴보다 다소 앞선 대체로 15000년 내지 17000년 전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그림 역시 크로마뇽인들이 그린 것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

오르냐시안이란 프랑스 오르냐크 지역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인데 크로마뇽인 최초의 석기가 발견된 곳으로 대체로 42천 년에서 25천 년 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오르냐시안 시기의 크로마뇽인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날카롭게 간 돌날과 골각기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오리냐크 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30여 개의 선사 시대 동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동굴은 라스코 동굴이다. 동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대체로 15000년 내지 17000년 전으로 3만 년 전 이상으로 추정되는 쇼베 동굴보다는 다소 늦지만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학계에서 가장 중요시 한다.

오리냐크의 라스코 동굴1940어린이들의 호기심 때문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고장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은 그곳에서부터 다소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성까지 통하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14자크 마르살을 포함한 네 명의 소년은 정말로 통로가 있는지 탐험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 지름이 약 60센티미터 가량 되는 조그마한 구멍에 돌을 떨어뜨려 보았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서 상당히 깊은 구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7마르셀 라비다가 그곳을 파헤쳐, 몸이 들어갈 만하게 만든 다음 한 사람씩 기어서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은 그들이 처음에 상상하던 것과 같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동굴 깊숙한 곳수많은 동물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동굴의 그림 내용을 곧바로 학교 선생님인 레옹 라발에게 보고했고, 곧바로 유명한 고고학자 브뢰이 신부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라스코 동굴을 찾아낸 전말이다.

브뢰이 신부는 라스코 동굴을 탐사한 후 라스코 동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동굴은 인류에게 남겨진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이며, 이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끄새현장을 방문했을 때 안내인이 설명하는 라스코 동굴 발견에 얽힌 에피소드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동굴 입구와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한 성이 너무나도 멀고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 중에 하나가 우연하게 발견되었다는 것이 시사해주는 것은 매우 크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들이 당초에 상상하던 성까지 연결되는 통로는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갖고 있었던 상상력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성까지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구멍을 판 후에 동굴로 들어갔고 결국은 성까지의 통로보다 더 중요한 동굴을 발견했다. 다소 허무 맹랑한 상상력이나 꿈 이야기를 모두 경원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동굴을 발견했던 1940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된 독일 점령 지구와 독일 정권에 의해 세워진 비시 정권이 직접 통치하는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라스코 동굴이 위치한 지역은 비시 정권의 통치 지구여서 독일 점령 지구로부터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전쟁 기간 중에는 연합군의 지원, 무기 은닉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라스코 동굴은 전쟁이 끝난 1948년부터 비로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지 12이 지난 1960부터 푸른곰팡이들이 기생하고 석회암 암벽에도 하얀 얼룩이 생기자 프랑스 정부1963년에 동굴 벽화의 일반 공개를 금지했다. 그 후로는 정부 기관의 추천장이 있는 전문가에 한해서 하루 6명 이내의 인원에게만 동굴 벽화의 관람이 허용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 관람객을 위해서는 동굴이 발견된 바로 옆 장소에 라스코 동굴과 똑같이 모방한 동굴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동굴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크 마르살이라는 소년은 브뢰이 신부의 말을 듣고 동굴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준 사명이다라며 1980년대 말 끄새가 현장을 방문할 때까지 동굴의 관리인으로 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