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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51) : 라스코 동굴 벽화(5)

Que sais 2021. 2. 1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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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도 그렸다>

쇼베 동굴 벽화가 그려지고 나서 약 7천 년이 지난 뒤인 25천 년 경프랑스의 라 그라베트 유적지의 이름을 딴 그라베티안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셌다. 손에 창을 들고 던졌던 덕분에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냥이 가능하여 영양 상태도 좋았다. 그들은 바늘로 옷을 지어 입었을 뿐만 아니라 짐승 가죽옷에 구슬과 동물의 이빨, 조개 껍데기 같은 것들로 장식도 했다.

체코 공화국돌니 베스토니체와 파블로프 부근의 유적지에서 그라베트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상을 엿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돌니 베스토니체에서는 27천 년 전작은 점토 조각상(일명 검은 비너스)이 발견되었다. 여자임이 분명한 이 조각상은 풍요를 상징한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서 짐승 가죽으로 그 안을 댄 뒤 뜨겁게 달군 돌들로 스튜와 죽을 끓였으며 세계 최초로 도기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이들 잔해에서 더욱 놀라운 것이 발견됐다. 파블로프 주거지 바닥에서 수거한 점토 조각을 분석한 결과 진흙 바닥에 놓여 있다가 화재로 타면서 굳어버린 직물과 바구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깔개벽걸이자루담요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직물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리노이주립대학교의 올가 소퍼 교수는 명쾌하게 유물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시대에 비로소 직조 기술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파블로프 유적은 그 연대를 거의 25천 년 전으로 끌어올렸다.”

 

소퍼 교수빙하시대에 사람들이 사냥용 그물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유물로 발견된 그물 흔적5cm 간격으로, 사슴이나 그보다 더 큰 동물을 사냥할 때 쓰기에는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러나 빙하기의 토끼나 여우류를 잡기엔 무난해 보였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물뼈 중 약 46퍼센트여우와 토끼류의 것이었다.

소퍼털 달린 산토끼는 고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산토끼를 잡으면 단백질과 털가죽을 얻을 수 있고 위험스러운 동물을 사냥하지 않아도 되는 잇점이 있다. 그녀는 이 당시 그물의 길이가 90미터, 폭이 1미터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라베티안 시기에는 매장 풍습도 상당히 변모되었다. 1969순기르라는 러시아 유적지에서 소년 소녀의 유골이 동시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오커로 발라 놓은 무덤에는 시체와 함께6,000개의 상아 구슬이 있었고 구슬들은 긴 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부츠, 모자, 짧은 외투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소년의 다리를 따라 구슬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바지를 입고 있었고 무릎 밑의 구슬 고리들은 부츠 위쪽에 붙어 있던 장식으로 추정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짧은 창 11자루, 단검 3자루, 긴 창 2자루, 외투 고정핀, 말 모양의 장식, 원반, 벨트에 달려 있는 수백 점의 구멍 뚫린 북극 여우 이빨 같은 소품들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매머드의 송곳니로 만든 2.5미터 길이의 창 한 자루는 소년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릭 고어는 이 무덤이야말로 빙하시대의 일부 공동체에서 사회 계급이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그런 수준의 부를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아이들이 세력 있는 집안 출신이거나 그들의 죽음에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부족민들이 그처럼 귀한 재물을 기꺼이 매장해주었다는 것이다. 계급사회가 생각보다도 오래 전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예다.

가장 놀라운 근래의 연구결과는 선사시대 동굴 벽화나 조각 중 일부는 야생동물 사냥 등을 단순히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본 태양 궤도황도(黃道) 12궁 별자리를 통해 운석 충돌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소 놀라운 주장인데 이는 영국 에든버러 공학대학원의 마틴 스웨트맨 박사가 그동안 터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지의 ·구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동물 상징 벽화와 조각품 등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스웨트맨 박사는 약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인류가 상당한 천문 지식을 통해 시간과 날짜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씩 움직여 나타나는 춘분점 세차(歲差)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시사했는데 춘분점 세차는 지금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스웨트맨 박사는 동굴 벽화가 그려진 시기와 당시 밤 하늘의 별 위치를 비교해, 추상적으로 보였던 벽화와 조각이 당시 밤하늘의 별자리에 기초한 황도 12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기원전 15200년경에 발생한 운석 충돌사건을 묘사한 것일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라스코 동굴 벽화가 원시시대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 것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한 가운데 남성은 죽어가고 있고, 주변의 네 마리 동물 중 부상당한 들소하지의 염소자리, 새는 춘분의 천칭자리, 무엇인지 명확치 않은 다른 두 동물은 동지와 추분사자자리와 황소자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별자리 구조는 기원전 15150년경에 나타났는데 그 무렵 이들에게 충격을 준 운석 충돌 사건을 벽화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물론 빙하 기록에는 15300년경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기후변화가 운석 충돌로 인했다는 증거는 없다.

스웨트맨 박사터키 남동부에 있는 신석기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석조 조각품기원전 11천년 경에 발생한 운석 충돌을 묘사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를 진전시켰다고 설명했다. 당시 운석 충돌은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로 알려진 미니 빙하시대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괴베클리 테페의 돌에 새겨진 시기는 기원전 1950으로 실제 발생 시기와 250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때 춘분과 하지, 추분, 동지 등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동물상징과 춘분점 세차까지 이용해 시기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 홀렌스타인-슈타델 동굴에서 발견된 사자인간 조각황도 12궁 별자리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해석했다. 이 조각은 약 4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 중 하나로 알려진다.

이를 토대로 선사시대 동굴 예술품들이 당시 인류가 밤하늘의 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고인류 발전과정 중에 여러 차례의 운석 충돌이 발생했다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무슨 목적으로 그렸나>

라스코 동굴의 입구에 있는 중앙 홀에는 유명한 말과 황소들이 그려져 있다. 조사 결과 벽화는 모두 800점이 넘었다. 들소, 야생마, 사슴, 염소 따위가 주로 그려져 있고 드문드문 고양이나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중앙 홀에 그려진 검은 소는 가로가 5미터도 넘는다. 빨강, 검정, 노랑, 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지만, 홈을 판 선각(線刻) 그림도 있다. 벽화의 짐승들은 하나 같이 역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다. 뛰어 다니는 들소, 쉬고 있는 사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말 등 그림들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지구상에 서식하던 어느 동물과도 닮은 데가 없는 일각수 그림상상의 동물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우선 동굴 안에 그려진 것은 당시에 그들의 기술로 사냥이 가능했던 사냥의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림의 주제와 사냥감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동굴에서 발견된 동물의 뼈를 보면 순록이 90퍼센트에 이르고 노루와 멧돼지가 5퍼센트 미만으로 나타난다. 소의 뼈는 하나도 없고 말은 겨우 0.7퍼센트에 이른다.

그런데 벽화에서 가장 많이 묘사된 것은 로서 약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소와 사슴은 각각 1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사자나 이리 따위의 맹수는 결코 사냥의 대상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고 당시에 크로마뇽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순록(馴鹿)은 사냥하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그리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풍요로운 수렵설보다는 순수하게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설도 크게 인정받았다. 암벽을 한가로이 긁다가 재주 있는 크로마뇽인이 놀이삼아 그렸다는 것이다.

빙하기 직후인류는 동굴 안에서도 햇빛이 비치는 곳이라든가 바위틈에서 생활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동굴 그림들은 동굴 안에서도 깊숙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벽화 속의 그림들은 흙이나 나무로 만든 받침대를 사용해야만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예술적인 목적으로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예술적인 감각을 고려하여 그림을 그렸다면 들소나 사슴들을 동굴 입구에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들어가기조차 꺼려할 정도로 깊은 구석이나 들어가더라도 나오기가 위험하고 힘든 은밀한 장소에다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동굴 그림에 있어 벽에 그려진 형상 자체보다는 벽화가 그려진 벽면의 위치와 벽화에 실제로 배치된 형상들의 형태를 더 중요시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