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7) : 상형문자 해득하기(2)

Que sais 2021. 2. 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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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이집트학>

1799년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리아에 출격하여 하이파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풍토병 등에 의해 수많은 장병들을 잃어버리고 카이로로 돌아온다. 카이로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계속 재기의 기회를 엿보지만 국제 정세는 그에게 더욱 불리해질 뿐이었다. 유럽 대 프랑스 동맹 간에 선전 포고가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자 더 이상 이집트 원정은 의미가 없다고 결론짓고 본국의 승낙을 받지 않은 채 추후에 암살당하는 클레베 장군에게 뒷일을 맡긴 후 부하 400명만 데리고 1799822일 알렉산드리아항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등극하였다.

여하튼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하기 전부터 유럽 사람들은 이집트에는 몇 천 년 혹은 몇 만 년 전에 건설됐을지 모르는 거대한 건축물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도미니크 비방 드농 남작이다. 그는 루이 15세의 시종관이었고 루이 16에는 나폴리 프랑스 대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했는데, 프랑스의 공포시대에도 살아남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도 이집트 탐사대에 참여했던 그의 경력은 사라지지 않아 루이 18세는 그를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했을 정도다.

여하튼 그는 유럽에서 이집트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되는데 1802년 파리에서 출판한 그의 이집트 고지대와 저지대의 여행(Voyage dans la Haute et la Basse Egypte)은 전 유럽을 흥분시켰다. 이 책은 나일 강 유역의 경이로운 고대 세계에 대한 최초의 화보집이었다. 그의 책에 그려진 하나하나의 그림들은 유럽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또한 1809년에 발간된 유명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지는 섬세하고 완벽한 고대 문명의 유적들을 사실적으로 그려주어 유럽인들을 동화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어쨌든 드농의 책은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판매부수가 헤아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무려 40판을 찍을 정도였다. 드농의 책과 이집트 지가 보여준 피라미드와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이 어찌나 이국적이었던지, 유럽의 상류층에서는 신혼여행을 이집트로 갔다 오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또한 이집트와 관련된 물건이나 유물이 한 점이라도 없으면 상류사회 인사로 대접받지도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집트 곳곳의 엄청난 건물들에 새겨져있는 글들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집트에 매료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등 특이한 조각을 궁금하게 여겼다. 조각이나 각종 건물의 벽면을 장식하는 것들이 그림 같기도 하고 글씨 같기도 해 더욱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자들은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하는 것이야말로 이집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라며 상형문자 해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해독하려는 노력은 사실 나폴레옹 시대보다 훨씬 앞선다. 1600년대 중반 독일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했다며 번역서 4권을 출간했다. 그러나 추후에 이 책에 기록된 번역은 단 한 줄도 맞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말 스웨덴의 아케르블라드와 덴마크학자 조에가가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아케르블라드는 상형문자의 기호들이 알파벳을 구성하는 철자라고 판단했고, 조에가는 카르투슈타원형 테두리가 왕 이름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카르투슈가 왕의 이름을 표시한다는 것은 옳았지만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로제타석 발견>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한다는 것이야말로 당대 학계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으므로 많은 학자들이 도전하고 있었는데 로제타석이 발견되어 유럽 학계를 강타했다.

사실상 나폴레옹을 이집트학에서 불멸의 인물로 만든 것은 17997월 나폴레옹의 공병 장교 피에르 프랑스와 자비에르 부샤르가 세로 114센티미터, 가로 72센티미터의 현무암으로 된 검은 색 돌을 발견했기 때문으로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샤르 대위는 이집트 북부 지중해변의 한 마을인 로제타 현재의 라시드에서 옛 건물의 담벽을 헐어내는 작업을 하던 중 한쪽 면에 글씨가 새겨진 석비를 발견했다. 로제타석은 원래 삼각주 지방의 중심지였던 사이스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비에는 기원전 196327일 당시 열두 살 난 프톨레마이오스 5의 즉위 1주년을 기념하는 평범한 공적문이 기록되어 있다.

 

로제타석

그러나 로제타석에는 이집트의 신성문자인 상형문자(신관문자), 상형문자를 흘림체로 쓴 민중문자, 그리스어3개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스어로 거룩한 기록을 뜻하는 신성문자는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서기의 신인 토트가 발명하여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 전해진다. 신성문자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후 394년까지 약 3600년 동안 사용되었던 고대 이집트의 공식 문자.

신성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의 세 가지 방법으로 기록된다. 문자에 등장하는 사람, 동물, 새의 머리는 언제나 글이 시작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으므로 문자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작하면 된다. 모아쓰기로도 표현하는데 한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민중문자는 고왕국시대부터 사용되던 파피루스나 나무판에 쉽게 기록할 수 있는 일종의 필기체가 발전한 것으로 제26왕조인 기원전 664년에서 기원전 525년 사이부터 민간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속용 문자(俗用文字)라고도 한다. 민중 문자가 소개된 이후 신관 문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게 되었으며, 민중 문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관 문자와 달리 민중 문자는 주로 돌이나 나무에 새겨졌다.

그리스어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사람들이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다.  4세기에 들어서며 민중 문자 대신 고대 그리스어 자모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451 필라이의 사원 에 새겨진 것이다.

여하튼 로제타석이 발견되자 유럽 학계에 광풍이 불어 17998<이집트 통신>은 이 비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 돌은 상형문자 연구에 상당한 성과를 갖고 올 것이다. 아니 그것을 해독하는 열쇠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

 

<상형문자 해득하기>

로제타석은 프랑스가 발견했지만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영국군에 항복하면서 프랑스가 확보하고 있던 이집트 유물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 학자들이 로제타석 해득에 남다르게 투입한 이유다.

여하튼 로제타석은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영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전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로제타석이 이와 같이 인류문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로제타석으로 그동안 풀지 못했던 상형문자를 해득하여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로제타석이 발견되자 이집트의 비밀을 풀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많은 학자들이 해독에 몰두했지만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5세기에 호라포론상형문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려진 사물이 지닌 성격과 문자의 의미가 같다고 기록한 것이 상형문자 해석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상형문자가 표의문자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학자들은 상형문자를 그림문자로 생각했으므로 모든 기호를 그림으로 해석하려 들었다. 그런데 스웨덴의 아케블라드가 로제타석의 민중문자 속에서 그리스어와 관련되는 고유한 이름을 포함한 단어들을 해독함으로서 이집트어 해독에 대한 중대한 진전을 보였다.

특히 과학계에서 (Young) 계수로 잘 알려진 당대의 천재 영국인 토머스 영 박사타원형 테두리카르투슈 속에 있는 상형문자가 왕이나 왕비들의 이름을 적은 것임을 밝혔다. 또한 토마스 영1815년 아스완 댐 북쪽의 나일 강 가운데 있는 섬인 필레에서 발굴된 2개의 비문에서 베레니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제타석에 있는 글자와 똑같았다.

토머스 영은 일부 기호들이 상징문자라기보다는 음성학적이라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음에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했다. 상형문자란 실질적인 발음에 의거해 적은 글자이며 이들 상형문자는 훗날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됐고, 이후 그리스어의 모음으로 추가되어 라틴어에 의해 알파벳으로 변했다고 논리를 전개시키기에는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