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4) : 신과 신전의 나라 이집트(6)

Que sais 2021. 2. 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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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멜 신전이 현대인들 앞에 나타난 것은 2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18135월 스위스인인 탐험가인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요르단의 페트라를 발견)에 의하여 그 존재가 처음 보고되었다. 그는 일기에 짧은 글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네 좌의 거대한 조각상이 드러난 부분들만 눈에 띄였다. (중략) 조각상들은 언덕 비탈을 깊이 파내어 우묵한 곳에 있었다. 애석하게도 조각상들은 마치 물이 수반에 떨어지는 듯 바람에 실려 온 모래에 거의 묻혀 있다. 한 조각상은 모래 위로 머리와 가슴이 보인다. 그 곁에 있는 조각상은 머리가 없는데다 몸통이 어깨까지 모래에 덮여 있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른 두 조각상은 머리쓰개만 볼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했던 장관은 1837년 이탈리아인 지오바니 베르초니가 신전을 덮고 있던 모래자갈을 제거하자 대신전 정면의 거상이 비로소 위용을 나타낸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요르단의 페트라를 발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전하게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7년의 일인데 그는 신전안으로 들어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

람세스 2가 나일 삼각주 왕궁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 건설한 까닭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내세우려 했다고 짐작한다. 신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자신의 명성이 누비아에도 전해져 이집트의 관습과 사상이 퍼져나가게 하기 위해 건설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의 탄생>

아부심벨 신전이 나타나자 세계인들의 놀라움은 그야말로 극도에 달했다. 이집트가 거대한 건축물로 다른 어느 나라의 유산들을 압도하지만 단일 신전으로 아부심멜과 같은 위용을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부심멜도 이집트의 국토개발과 산업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훼손될 뻔했다.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1952년 국토 최남단에 있던 기존의 아스완 댐을 새로운 아스완 하이댐으로 대체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집트에서 아스완 하이댐이 완성되면 매년 나일 강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수십 개의 새로운 산업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스완 하이댐은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71년에 완공되었고 댐과 함께 나세르 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그런데 이 댐이 생기자 건설계획자들이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일 강의 홍수가 비옥한 충적토를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수천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오면서 처음으로 비료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침니(모래보다 잘지만 진흙보다 굵은 침적토)가 나세르 호의 바닥에 쌓이면서 해가 갈수록 그 깊이와 저수량이 감소되기 시작했고, 나일 강이 막혀 강물이 지중해로 흘러들지 못하자 수상식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욱 큰 문제가 생겼다. 이집트 토양에 함유된 염분이 고대의 유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붕괴할 위험에 처할 정도였다.

아스완댐이 계획되자 예정대로 완성되면 이집트에서 수단에 걸쳐 있는 누비아 지방의 유적이 길이 약 500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인공호수 밑으로 수몰된다는 것이 알려졌다. 아부심멜 두 신전은 댐에서 상류로 약 28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비아 지방에는 아부심벨 신전은 물론 이시스 신전이 있는 피라에 섬, 데보드 (Debod)신전, 덴두르(Dendur) 신전 등 수많은 세계적인 유적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 수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 세계의 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부심벨 신전을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물속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부심벨 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전 국제사회에 동참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에 이집트와 수단은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했고 유네스코19603월 전체 가맹국에게 유적 구제를 호소했다. 50여 국가들이 구난 작업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전된 아부심멜 신전

아부심벨 신전을 구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신전 주위에 제방을 구축하자는 안과 신전을 콘크리트 상자로 싸서 수압 잭(jack, 작은 기중기)으로 들어 올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결정된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아부심벨 자체를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는 65미터 상류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람세스 2세의 좌상과 강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사원을 고지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면 되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Less is more)는 설명처럼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지역 또한 원래 유적이 있던 곳과 비슷하게 조성하기로 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963년 아부심벨 신전 이전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팀은 제일 먼저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신전에 모두 17,000개의 구멍을 뚫고, 그 안에 33톤에 달하는 송진덩어리를 밀어 넣어 신전의 바위 돌들을 단단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거대한 쇠줄 톱을 동원해 신전을 모두 1,036개의 블록으로 잘랐다. 커다란 블록은 하나의 무게가 33톤에 달했으며 신전 주변의 바위들도 1,112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이전 공사를 진행하던 중 이집트가 담수 수면을 더 올리기로 결정하여 이미 재건해 놓았던 소신전을 다시 해체하여 약 2미터 더 높이 앉혀야 했다. 이들 대 역사는 아스완댐의 물이 차기 3달 전에 완성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크게 고민한 것은 이전된 곳이 당초에 건설된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간(徑間) 60미터의 돔을 대신전 위에 건설하고 그 위에 다시 바위와 돌부스러기로 인공산을 만들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토막으로 자를 때 생긴 자국을 위장하는 일이지만 이 문제도 무난하게 해결되었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다. 계획대로 모든 돌이 상부로 옮겨지자 재조립 작업이 시작되었고 공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19692월 마침내 3200년 전에 탄생된 신전이 다시 완벽한 제모습을 갖춘 채 안전지대로 옮겨졌고, 19693월 춘분에 정확히 람세스 2세가 설계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났다. 3200여 년 전처럼 햇빛이 성역에 있는 동상들을 비춘 것이다.

이 공사에는 총 4200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고 4년이라는 작업기간이 소요됐는데, 여기에 한국도 50여 만 달러를 지원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인류 문화재를 국제 공동으로 지킬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으며 자연과 환경을 도외시한 개발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수몰 위기에 몰렸던 다른 유적들은 다른 섬으로 이축되어 재건되었다. 이는 이집트가 각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수몰 위험에 있는 작은 신전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페인에 기증한 데보드(Debod) 신전은 지금 마드리드에 있고 덴두르 신전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엘 레시아 신전이탈리아 투린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 칼라브샤 신전의 관문베를린 이집트 박물관, 그리고 타파 신전네덜란드 라이덴에 있는 국립고대유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댐이 생기자 건설계획자들이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집트 토양에 함유된 염분이 고대의 유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붕괴할 위험에 처할 정도였다. 이 문제는 현재 아부심멜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으므로 전세계의 학자들이 근본대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스완댐의 아이러니>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선물이다. 즉 세계 4대문명 중의 하나인 고대 문명은 강변 양쪽의 평원에 기름진 침적토를 옮겨주는 정례적인 홍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로서 시급한 것은 산업에 필수적인 전기 생산이다. 처음에 미국과 영국은 이집트의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아스완댐을 추진하는 나세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그 대금을 이집트 면화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댐 건설 지원을 취소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여기에서 물러나지 않고 강수를 두었다. 영국과 프랑스인이 대부분 주식을 갖고 있는 회사가 운영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것이다. 그 뒤에 진행된 수에즈 위기에서 이집트는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운하 통제권을 장악하려했던 영국과 프랑스도 결국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이집트는 소련아스완댐 건설자금을 요청했고 소련은 곧바로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71년 대공사가 완료된 것이다. 댐이 완공되자 누비아의 아스완 남쪽에 나세르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이집트를 매년 괴롭게 했던 홍수가 사라지자 사탕수수, 설탕, 면화, 옥수수 생산이 증가하고 비료, 강철, 직물을 생산하는 새로운 산업이 일어서는 등 단기 이익이 따랐다. 문제는 이런 경제적 산업적 혁명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아스완댐을 건설할 때 댐이 완공된 후의 과실만 생각했지 그 파급효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아스완 댐에 부연하여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므로 실무적인 문제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국내의 전기 중 50퍼센트 정도를 공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지만 나세르 호의 바닥에 상류에서 흘러오는 흙이 쌓이면서 그 깊이와 저수량이 감소되어 이를 제거하는 일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또한 나일강의 홍수가 갖다 주는 비옥한 충적토를 남겨놓지 않아 이집트의 토양이 과거보다 훨씬 척박해지자 인위적으로 비료를 공급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상치 못한 일도 생겼는데 아스완 댐의 달팽이 증가다. 달팽이는 작은 간흡층의 숙주빌하르츠주혈흡충병을 옮기는데 이 병은 항상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쇠약하게 하고 다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린다. 이 병은 고대부터 이집트의 골칫거리였는데 아스완 댐을 만든 다음부터 나일 강 유역 사람들의 발병률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해 이집트 전체 인구의 1/3 가량이 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