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6) : 죽어야 산다(1)

Que sais 2021. 2. 2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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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만의 미라>

1999년 제작된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영화 미이라는 람세스2세의 아버지 세티1세의 시대를 그렸다. 줄거리는 이렇다.

 

세티 1세의 후궁인 앙크수나문은 파라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재상 임호텝과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파라오에게 발각되고 앙크수나문은 자결하게 된다. 임호텝은 흑마술로 그녀를 부활시키려 하지만, 파라오의 근위대에 붙잡혀 홈다이라는 형벌을 받는다. 홈다이는 산 채로 석관에 갇혀 영원히 생시체가 되는 끔찍한 극형이다.

앙크수나문과 임호텝의 금지된 사랑은 그렇게 파라오의 저주로 비극적인 끝을 맺고, 왕족들이 잠든 하무납트라는 죽음의 도시가 되어 역사 속에 묻힌다.

한편 황금의 유물을 찾아 여러 탐험가들이 하무납트라를 찾아오지만 하나 같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중 전투 중에 피신했던 외인부대 장교 오커넬만이 유일하게 살아 돌아오는데, 이집트박물관 사서 이비와 그녀의 오빠 조나단이 오커넬을 찾아온다. 하무납트라의 황금유물을 찾자는 것이다. 하지만 파라오의 저주를 푸는 열쇠를 손에 넣은 조나단은 실수로 임호텝을 부활시키고, 마침내 3000년을 기다려온 임호텝의 복수가 이집트를 뒤덮는다.‘

 

영화 미이라의 주제는 죽은 자의 저주이며 이는 파라오의 저주라는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미라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고증을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고를 보여주는데, 가장 공들인 부분이 미라에 대한 개념이다. 영화는 곳곳에서 이집트인들이 육신은 영혼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므로 영원한 삶은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에 대해 다소 과장되게 설명한 점이 있지만, 미라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자료를 제시했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장례를 치루는 방법은 물론 미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비교적 설득력 있게 적었다.

 

이집트에는 미라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시신이 들어오면 고인의 유족들에게 나무로 만들고 채색까지 된 실물처럼 보이는 미라의 여러 가지 모델을 보여준다. 가장 완벽한 모델은 어떤 신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내 생각에는 그 신(오시리스로 추정)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과히 종교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모델은 첫 번째 것보다 하등품이며 비용도 저렴하다. 세 번째 것은 값이 가장 싸다. 장의사가 유족들에게 시신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주기 바라는지 묻고 유족들 원하는 모델을 선택한다. 그것으로 거래 이루어지면 유족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장의사들은 작업에 들어간다.’

 

<미라를 만드는 법>

미라가 전 세계를 통해 이집트에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제일 먼저 이집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3000이란 장구한 시간 동안 부단하게 미라를 제작해왔고 현재 우리 주위에 많이 보이는 미라가 대부분 이집트것이기 때문이다. 남아메리카의 잉카 제국에서도 많은 미라가 만들어졌으나 이집트처럼 전 잉카인들이 미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집트인들은 육신영혼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므로 영원한 삶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몸을 떠난 죽은 자의 영혼이 언제라도 육체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 시신을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었다. 또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태양이 뜨는 동쪽에서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옮겨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피라미드 및 무덤을 나일강 서쪽에 건설하였다.

 

미라 만들기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 가면(늑대 혹은 자칼 머리 모양)을 쓴 신관이 시신을 미라로 처리한다. 이때 내장은 카노픽 항아리에 담아 따로 보관하는데, 앞서 설명한 투탕카문 미라의 경우 4개의 카노픽 항아리에 담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행해진 정통적인 미라 제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두개골을 절개한다.

왼쪽 옆구리를 절개하여 내장을 제거하는데 심장만은 꺼내지 않는다.

내장과 시체 공동(空洞) 부분을 살균 처리한다.

내장 천연 탄산나트륨을 이용하여 탈수 및 건조 과정을 거친 후 기름을 바르고 용해된 수지로 표면을 처리한다.

탄산나트륨 및 수지로 임시 방부 처리를 한다.

시신을 40일 동안 천연 탄산나트륨에 담가둔다.

임시로 투여한 재료를 제거한다.

피하(皮下)에 모래, 점토 등을 주입한다.

향기 나는 수지에 적신 섬유나 몰약, 계피, 톱밥 등이 채워진 가방으로 시체 공동 부분을 방부 조치한다.

향유(고약) 기름을 바른다.

용해된 수지로 시체의 외부를 처리한다.

마지막으로 미라 처리된 시신을 붕대로 싼 후 준비된 관에 안치하고 각종 보석이나 장신구로 장식한다.

 

참고남자 미라의 머리카락은 짧게 잘랐고 여자긴 머리는 그대로 두었다.

 

<미라의 과학적 조사>

영국 브리스톨대학 리차드 에버세드 박사는 기원전 1985년부터 기원후 395년 사이에 만들어진 13구의 미라를 대상으로 화학조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집트인들이 세균을 막고 수분을 차단하기 위해 식물성 수지와 밀랍 등 다양한 물질을 사용했다는 것과 시신에 붕대를 감기 전에 탄산나트륨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혔다.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상당히 많은 재료를 사용했다. 중동에서 수입한 노간주나무, 히말라야삼목의 기름 등 값비싼 재료는 물론 각종 식물에서 얻은 수지, 기름, 향료, 동물성지방, 밀랍 등이 포함됐으며 전반적으로 동물성 지방보다는 식물성 기름을 많이 사용했다. 식물성기름은 자연적으로 굳어 수분 침투를 막는 역할을 하는 데, 에버세드 박사는 이들 식물성 기름방부제 역할을 하는 값비싼 재료를 녹이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흥미로운 점은 송진과 밀랍의 사용량이 후대로 갈수록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들 재료가 미생물과 수분의 침투를 막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재료가 달랐던 것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재료를 선택했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장례를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나면 나일강 동쪽 항구에서 나일강 서쪽 무덤까지 태우고 갈 장례배에 안치하는데 이 의식 전에 가족 중에서 최상급자가 사자에 대한 공개 재판을 주재한다. 만약에 사자의 생전 행적에 대하여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반대 증언을 하거나 죄상을 성토할 경우 장례를 집전하는 가족의 최상급자가 사자의 유해를 준비된 장례배에 태우는 대신 나일강 동쪽에 매장하도록 명령한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사후관에 비추어볼 때 사자의 영원한 삶을 근원적으로 막는 사실상의 죽음을 의미하므로 이집트인들의 생전에 선행을 유도하는 제도로서 크게 인정받았다.

또한 무덤 속에는 죽은 자가 저승에서 환생할 때까지 사자가 사용하였던 모든 것을 함께 묻는데, 특이한 것은 무덤 속에서 환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주인 대신 노역을 담당할 우샵티 혹은 샤웁티라는 인형을 반드시 넣었다.

이와 같은 인형을 매장하게 된 동기는 이집트 역사상 몇 번에 걸쳐 외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 동안에 귀족이 망하여 천한 직급이 되고 노예가 상급자가 되는 등 하극상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볼 때 고귀한 직분의 사람도 사후에 천한 직급으로 신분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저승에서 부릴 사람들을 애초부터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인형의 숫자는 신분 혹은 재산에 따라 달라지는데 유명한 투탕카문의 묘에서는 400여 개 이상이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