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5) : 신과 신전의 나라 이집트(7)

Que sais 2021. 2. 2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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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심각한 문제점은 세계 고대 유적의 절반 가량이 있는 나일 계곡이 20세기의 질병을 앓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는 한때 고대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였다. 건조한 기후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박물관 역할을 했으며 중동 지역에서 비교적 전쟁 피해를 겪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스완 댐의 건설로 엄청나게 습도가 증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일 년 내내 강수량이 거의 없던 룩소르 지역에 두 달간 계속 비가 오는 등 기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 산성 안개가 끼는 바람에 쿠프와 케프렌의 피라미드가 이미 파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다. 특히 불충분한 하수 시설 때문에 땅 위를 흘러 다니는 하수가 스핑크스에까지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되며, 유물들이 차량에 의한 진동으로 흔들리고 공기 오염 때문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다.

아스완 댐의 영향으로 지하 수위가 상승하여 지표 가까이에 잠자고 있던 소금이 결정되어 유적을 침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나일강의 염분은 리터당 0.2그램인데 아스완 댐 저수지의 염분은 1.2그램이 넘는다. 우선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관광객에 의한 오염 문제가 시급히 제기되고 있다. 하루 6000명의 관광객에 의해 한 시간당 150그램의 물과 많은 양의 칼로리가 침투해 벽 표면에 소금 성분이 응축되고 있다.

스핑크스에 대한 보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스핑크스 붕괴의 위험은 동체(胴體)가 침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핑크스의 동체는 원래 현장의 산을 깎은 것인데 거기의 모암(母岩)이 깎여 나가고 있다. 모암을 지탱해주던 로마 시대에 붙여진 석회석 타일이 떨어져 나가, 그 틈새로 수분을 포함한 공기가 들어가 붕괴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는 스핑크스 동체 중에서 어깨 부분이 떨어져 내려 세계를 경악시킨 적도 있다. 세계의 학자들이 이집트에 있는 세계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들을 강구하고 있지만 인간에 의해 촉발된 이러한 유산 파괴는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세계학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은 물론이다.

 

<파라오 여권받은 람세스2>

후세 인류에게 감탄을 준 람세스 2는 그 이후 또 한 번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람세스 2세의 미라가 1976년 파리로 옮겨져 전문가들의 치료를 받은 것이다. 다름 아니라 수많은 곰팡이로 손상된 미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재밌는 것은 이 당시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여행하기 위해 미라인 람세스2세의 여권도 만들어졌는데, 그의 직업란에는 파라오라고 기재되었다.

그의 미라를 조사한 결과 람세스 2는 피부가 하얗고 붉은 머리에 매부리코를 갖고 있었으며 키는 약 165센티미터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망 당시에 동맥경화증과 척추관절염을 앓고 있었으며 골격은 남달리 견고해 보였지만, 사망하기 직전에는 보행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여권받은 람세스2세 미라

프랑스 팀들은 람세스 2세가 잇몸 여러 부분에 화농을 앓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그 균이 전신에 퍼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훼손한 곰팡이다에달레아 비엔니스 프리에스라는 버섯 모양의 균류였는데 프랑스인들은 코발트 60을 이용해 감마선 처리로 이들을 성공리에 퇴치했다.

한편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켄트 박사가 우연하게 람세스 2세의 가족묘를 발견하여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어 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큰아들인 허코세프의 이름 등이 적혀있는 것은 물론 이곳에 매장된 사람은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로 숫자만 해도 90나 된다. 이는 람세스 2세의 자식이 아들딸 모두 200여 명이라는 당대의 또 다른 기록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람세스 2세 가족무덤은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큰 무덤으로 일부 도굴되지 않은 부분도 있어 앞으로 많은 화제를 일으킬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적으로 제20왕조 람세스 3 시대에는 왕자들의 묘가 왕비의 계곡에서도 만들어졌다. 이것은 왕비의 계곡의 동쪽 마디나트하브에 위치한 람세스 3세의 기념 신전과의 관계에서 왕비의 계곡이 왕의 가족 매장지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벨리스크>

이집트 문명의 가장 독특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자 또 다른 건축물은 오벨리스크. 프랑스의 파리나 이탈리아의 로마에 건설된 오벨리스크를 보면, 굳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지 않더라도 이집트인들의 능력을 다소나마 유추할 수 있다.

오벨리스크는 바늘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며 꼭대기에는 소형 피라미드 형상(피라미디온 또는 벤벤스톤이라고 함)으로 되어 있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따온 말이 아니라 꼬챙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오벨리스코스(obeliskos)에서 나왔다.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2500년에서 2100년 사이에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신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며 신왕국 시대까지 화강암이나 규암으로 카르낙과 룩소르 같은 신전 앞에 쌍으로 세웠다.

오벨리스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는 아스완 북쪽의 채석장에 신왕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화강암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은 길이 41.75미터에 무게 1150톤으로 채석 과정에서 중대한 결함이 발견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당초의 계획대로 제작되었으면 사상 최대의 오벨리스크가 되었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오벨리스크를 만들 수 있는 석재를 발견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에 맞게 석재를 떼어냈는데, 그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을 이용한 방법이다. 즉 필요한 곳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나무를 박은 뒤 물을 붓고, 나무가 물을 먹어 부풀어 오르면 돌이 갈라지게 틈을 만든 후 망치로 깎아내려가는 것이다. 레지널드 엥겔바흐 교수에 의하면 한 사람이 현무암 망치로 0.5미터 너비의 돌을 5밀리미터 깎아내는 데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고 설명했다.

학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키가 매우 큰 오벨리스크를 어떻게 세웠느냐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피라미드는 오벨리스크보다 더 거대하지만 작은 돌들을 수없이 쌓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인원과 시간을 투입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축조하는 것이 가능 할지라도 오벨리스크처럼 통으로 이뤄진 거대한 돌기둥을 똑바로 세우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벨리스크야말로 이집트인들의 건축기술의 백미라고 설명되는 이유다.

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오벨리스크를 세웠다고 추정한다. 첫째 다소 작은 오벨리스크의 경우 지레와 더불어 기단 아래에 돌들을 넣어 받쳤다가 조금씩 제거했는데, 맨 마지막에는 오벨리스크의 각도를 수직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밧줄을 이용했다고 본다. 번째 레지널드 엥겔바흐제시한 것으로 대형 규모의 오벨리스크를 세울 때 적합한 방식이다. 오벨리스크를 깔때기 모양의 모래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뜨린 다음 모래를 조심스럽게 제거하면서 조금씩 일으켰다는 것이다. 엥겔바흐는 이 이론을 19왕조의 파피루스적혀있는 다음 문구에서 얻었다고 밝혔다.

 

'붉은 산에서 가져온 건축물 아래의 모래를 채운 창고를 비웁니다. 강둑에서 가져 온 모래를 100개의 방에 채웁니다.'

 

1999년에 두 가지 가설을 토대로 25톤짜리 오벨리스크를 어떻게 세우는가를 실험한 일이 있다. 첫째 오벨리스크를 단번에 세우는 방법은 아스완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방법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오벨리스크가 흔들리면서 제 위치에 설치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매사추세츠 보스턴 인근에서 실험되었는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실험에서는 둑의 전면에 모래를 채운 콘크리트 통을 설치했다. 일단 오벨리스크를 둑의 가장자리까지 기울인 다음 모래를 조금씩 빼내 오벨리스크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서히 수직방향으로 서도록 했는데, 이 경우에는 정확하게 원하는 위치에 세울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모두 돌에 새겼다. 그러나 거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이는 당시 이집트인들로서는 거대한 돌을 옮기는 일이 아주 흔했기 때문에 기록할 필요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해한다.

하셉수트 여왕 시대700톤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를 운반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비교적 작은 오벨리스크의 경우에는 오벨리스크 바로 밑까지 운하를 판 다음 돌을 가득 실은 배 두 척을 오벨리스크 밑에 댔다. 그리고 돌을 하나씩 버리면 배가 점점 솟아올라 마침내 오벨리스크를 떠받칠 수 있었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의 룩소르에 있던 것으로 4000킬로미터를 바다 건너와 세워진 것이다. 총 길이는 22미터로 약간 볼록하게 만들어졌는데 무게는 225톤이며 기원전 1550년에 축조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1600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데, 19세기 초 이 오벨리스크를 설치하는 데만 무려 10대의 기중기가 동원되었다. 각 기중기마다 30명의 군인이 작업하였으므로 총 작업인원은 300명이었다.

참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럽각국이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모두 빼앗아 갔으므로 이집트에는 하나도 없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룩소르에만 22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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