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0) : 이집트의 영광(1)

Que sais 2021. 3. 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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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지켜온 파라오>

이집트 역사에서 왕의 숫자는 학자들의 계산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200여 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파라오가 있었음에도 이집트에는 커다란 왕위 계승 다툼이 없었다.

학자들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이집트 특유의 이원체제라는 독특한 통치 제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이집트는 동시대에 두 명의 파라오가 있었다. 대체로 파라오는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를 어느 시기가 되면 자신과 똑같은 권한을 가진 파라오로 책봉하여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아버지 파라오는 외교 등 외부 일을 관장하고 아들 파라오는 내정을 관할했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신의 동생과 결혼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 시스템은 이집트의 정치적 안정에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종종 외국과의 전쟁에 출정한 파라오가 사망하였을 경우에도 권력 승계에 따르는 소요나 암투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여 명의 파라오가 있었던 만큼 이집트 역사에는 파라오와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파라오인 하셉수트 여왕, 아케나톤, 람세스 2세 그리고 클레오파트라7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하셉수트 여왕

 

이집트에서는 남자만 파라오가 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통치권을 가졌던 여왕은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재위 기원전 51~30)를 포함하여 대체로 세 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머지 두 명은 제18왕조의 하셉수트(재위 기원전 1479~1458)여왕과 아케나톤 파라오의 왕비인 네페르티티 왕비.

또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언니 클레오파트라 6(재위 기원전 58~57)베레니케 4(기원전 57~55)도 잠시 파라오에 오른 적이 있으나, 세 명의 여왕들처럼 실권을 가졌던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반면에 엄격한 잣대로 볼 때 진정한 실권을 갖고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로는 가장 고귀한 숙녀로 불리는 하셉수트가 유일하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제전과 그녀가 시바 여왕일지도 모른다는 전설에도 기인한다.

 

하셉수트 파라오

이집트를 방문하여 수많은 신전을 방문하다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거대한 신전의 기둥 하나 하나에 잘 모르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어 처음에는 사진을 연속해 찍다가도 곧바로 싫증을 낸다. 어느 곳을 보더라도 유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르 엘바하리에 건설되어 있는 하셉수트의 장제전을 보면 이런 생각을 금방 취소할 것이다. 그녀의 장제전은 어느 이집트 건축물보다 대형으로 람세스2의 장제전인 라메세움조차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장제전을 여자 파라오가 만들었다는 점이다.

하셉수트의 가계는 다소 복잡하다.

하셉수트의 외할아버지는 18왕조의 시조 아모세인데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1세가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으므로 아모세스 장군이 파라오 공주와 결혼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투모세스 1(기원전 1400~1390)로 정실부인이자 아모세 파라오의 딸로 추정되는 왕비 사이와 장녀인 하셉수트를 낳았다.

투모세스 1세의 뒤를 이어 하셉수트의 이복동생인 투모세스 2(재위 기원전 1483~1479)가 파라오가 되자 그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아들은 후궁인 이시스가 낳았다. 바로 투모세스 3(재위 기원전 1479~1426). 그런데 하셉수트의 남편 투모세스 2세가 일찍 사망하자 의붓아들인 투모세스 3가 열 살의 나이에 파라오에 오르는데 하셉수트가 섭정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도 관례에 따라 정치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그녀는 다른 왕후와는 달랐다.

한마디로 그녀는 왕후가 아니라 바로 파라오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부조를 보면 하셉수트는 남자만 파라오가 될 수 있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스스로 파라오임을 천명하고 파라오의 예복을 입고 상하 이집트 주권을 상징하는 이중관을 썼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파라오처럼 행세한 것은 아니다. 우선 이집트에서 남자만 파라오가 될 수 있었으므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은 파라오가 되기 위해 치명상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은 하셉수트가 단기간이나마 파라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혈통과 관련 있을것으로 추정한다. 즉 하셉수트는 18왕조를 건설한 파라오 아모세의 직계 혈통인데 반해 그녀의 남편이자 이복동생인 투모세스 2세는 왕실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신과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의 의붓아들이 아닌 그녀만이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의 문제는 남아있었는데 하셉수트는 이 문제를 매우 수완 좋게 처리했다. 남편 투모세스 2세가 사망한 후 하셉수트는 자신의 칭호로 왕의 아내가 아닌 케네메트 이멘' 즉 신성한 빛 의 딸로서 아몬과 한 몸이 된 여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하트 체페수트가장 공경 받을 만한 여인이란 이름도 사용했다. 즉 파라오의 자격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집권한 초기에는 결코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하셉수트의 좌상은 영락없는 여성이다. 또한 파라오들이 전형적으로 쓰는 네메스 두건과 왕권을 상징하는 코브라 우라에우스를 이마에 장식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가 궤도에 올라가자 자신의 성별을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특징을 모두 버린 채 파라오의 두건과 짧은 스커트를 착용하고 의장용 가짜 턱수염을 붙였다. 정통 파라오 즉 과거의 남자 파라오처럼 행세했다. 성을 바꾼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정통 파라오처럼 행세한다고 해도 여자라는 것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셉수트는 여자 파라오를 합리화시키고자 주의 깊게 각 건물의 부조들에 자신의 당위성을 조각했다. 그녀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이 그녀의 영혼이 살게 될 장제전이다. ‘데이르 엘바하리에 건설된 거대한 장제전에는 그녀가 신의 뜻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고 그녀의 아버지 투모세스 1세가 자신을 왕으로 앉히려 했을 뿐 아니라 즉위식에도 참석했다고 적었다. 당대에 파라오의 즉위식에 참석한다는 것은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와 같다. 그 부조에서 위대한 아몬 신은 투모세스 1세로 변장해 하셉수트의 어머니 앞에 나타난 것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가서 그녀를 다른 어떤 신보다도 훌륭하게 창조하라. 나를 위해 내가 낳은 나의 딸을 아름답게 빚어라

 

그녀가 자신이 여자였음에도 파라오가 된 것에 상당한 설명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의 공은 효과를 보아 여하튼 그녀가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에서 실권이 있는 파라오로 자리매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셉수트의 장제전>

이집트의 하나하나가 상상을 초래하는 규모 즉 거대하지만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야말로 이런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장본 건물 중 하나다.

하셉수트의 장례전 자체는 왕가의 계곡 인근으로 사자털 빛깔의 절벽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있는 데이르 엘 바하리에 위치한다.

이집트 영광의 한 시대를 풍미한 18왕조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건축양식이 특이한 것으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된다. 장제전 자체는 하셉수트 재위 7년에서 2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그녀의 정부(情夫)로도 알려진 세넨무트가 건축책임자였는데 학자들은 그가 여왕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 장제전을 건설했다고 믿는다.

세넨무트는 하셉수트를 위해 거대한 문들은 검은 청동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은으로 합금된 호박색의 상들을 조각했다. 특히 기둥의 모양이나 배열에도 신경을 써서 200개가 넘는 조각상은 그녀의 재위 중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양각으로 조각했다.

아몬 장제전이 특별한 것은 과거에는 양각한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세넨무트는 밝은 빛 속에서도 조각들을 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18931898,  190319062회에 걸쳐 스위스의 앙리 에두아르 나빌 박사가 영국 <이집트탐사재단>의 의뢰를 받아 데이르 엘바하리 전체의 발굴작업을 지휘했다. 이때 추후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하여 세계적인 인사가 되는 하워드 카터 등 여러 명의 화가가 발굴단에 소속되어 발굴되는 모든 유적과 유물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나빌 박사는 발굴 결과를 정리하고 해석하여 18941898년 사이에 총 7권의 책자로 출간하였다.

또한 19201931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허버트 유스티스 윈록 박사에게 의뢰하여 계속 발굴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들 작업은 1942에밀 바레즈 박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그리고 1961년부터 <이집트 고고학 최고평의회>가 바르샤바 대학 고고학과와의 협업으로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복구, 복원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