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3) : 이집트의 영광(4)

Que sais 2021. 3. 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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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 언약의 궤>

시바의 여왕이 통치했다는 에티오피아의 악숨에 시바의 여왕의 유물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에티오피아인들은 줄기차게 주장한다. ‘언약의 궤가 에티오피아로 옮겨진 것은 하늘의 뜻이 시온에서 악숨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증거가 에티오피아 황제들이라는 것이다.

언약의 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우선 시바의 여왕의 아들인 메네리크 1세가 예루살렘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고 왕으로 임명되어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것은 전술한 내용과 같다. 그런데 그가 돌아올 때 동료 아지라와 공모하여 성서에 나오는 언약의 궤를 훔쳤다는 것이다. 케브라 나가스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니컬러스 클랩은 적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자리하고 이끄는 앞에서,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약의 궤를 채어갔다.

 

언약의 궤가 도난당했다는 것을 알자 솔로몬은 이집트까지 추적했다. 그런데 천사가 솔로몬 앞에 나타나 언약의 궤는 그의 아들이 훔쳐갔다고 알려주었다. 솔로몬은 측근들에게 이 사실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경고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언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부터 갖고 온 메네리크 1세가 악숨에 입성하는 날 시바의 여왕은 커다란 잔치를 열었다. 이 일을 기념하는 행사는 오늘날까지 매년 11월 말에 열린다.

 

언약의 궤

현재 악숨에 있는 시온의 성 마리아 성당시온의 집안에 언약의 궤로 알려진 유물이 모셔져 있다. 언약의 궤 안에 들어 있는 언약이란 반질반질한 석판에다 히브리어로 십계를 새겼다고 하는데 석판은 길이 75센티미터 두께는 4센티미터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7.5센티미터 두께나 되는 단단한 금박을 입힌 장식 없는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궤에서 광채가 나거나 불길이 솟아오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대로 에티오피아 왕들이 대관식을 치루었다.

이 건물은 아브라하(Abraha) 왕과 아스베하(Asbeha)의 치세 때인 340년 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본당은 그리스도교 도래 이전에 악숨 왕들의 성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타원형으로 흙은 돋운 경내에 있으며 크기는 90미터에 120미터쯤 된다.

학자들은 시바의 여왕이 에티오피아와 예멘 두 지역 모두를 통치했다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예멘이 본거지이고 에티오피아까지 지배했다고 설명된다. 이 부분은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예멘의 시바>

상당수의 학자들은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곳은 악숨보다는 마리브가 더 유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리브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무려 2,400킬로미터나 된다는 점이다. 현대에도 2,400킬로미터나 되는곳까지 이동한다는 것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시바의 여왕이 무려 2,400킬로미터나 되는 머나먼 여행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은 성경의 글처럼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단지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2,4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기원전 10세기에 의전을 목적으로 이동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래 학자들이 구성하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할 당시 이스라엘의 상선은 히람 왕, 항구는 솔로몬이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해로를 통하지 않고 아라비아 반도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가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예멘과 아라비아북부 즉 예루살렘을 육로로 가기 위해서는 지옥과 같은 사막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운송수단으로 당시에 무거운 짐을 등에 얹은 말과 당나귀를 그런대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이들은 매일 물을 마셔야 하므로 사막을 가로 지르는 데는 적합지 않았다.

그런데 볼품은 없었지만 사막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 발견되었다. 바로 낙타.

기원전 1314기경 낙타를 생포하여 사육하기 시작했는데 본래 목적은 고기와 낙유(酪乳)를 얻기 위해서다. 당초에 낙타는 등에 불룩 솟은 거대한 혹 때문에 낙타를 짐 나르는 일에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용적인 낙타 안장이 발명된 것이다. 새로운 낙타 안장은 무거운 짐을 낙타의 등이 아닌 옆구리에 매달 수 있게 되었다. 이 발명은 낙타로 하여금 당나귀보다 56배의 무거운 짐을 싣고도 시간 당 1213킬로미터의 속력을 유지했다. 인간의 평균 걸음걸이를 45킬로미터로 보면 엄청난 속도다. 더구나 물 없이도 몇 주일까지 견뎌낼 수 있는 것은 물론 10분 동안 물 30갤런 정도만 마시면 원기를 곧바로 회복하고 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낙타를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대상들은 말이나 당나귀를 통해 물 있는 곳을 찾아서 먼 길을 우회하면서 상품들을 운송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브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예루살렘까지의 장거리 운송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결론은 시바의 여왕이 육상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기원전 940년경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설명이다.

 

<세 명의 시바>

시바여왕의 미스터리가 쉽사리 풀려지지 않자 시바여왕이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왕의 솔로몬 방문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25개 절()밖에 안 되지만 성경의 상당부분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는 평가다. 신화적인 차원에서 모든 민족의 흥망을 이야기할 때는 내용이 불완전하고 모호한 것은 물론 역사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적었으므로 공정성도 별로 없다는 것도 지적사항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거짓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며 특히 기원전 10세기 중엽은 유대인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당대의 사실을 기초로 적었음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당대 솔모몬의 군대는 유프라테스강에서 시나이 사막, 홍해에서 팔미라에 이르는 모든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많은 지배자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 찾았다고 기록돼있다. 그런데 솔로몬을 방문한 사람 중에서 유독 시바 여왕만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시바여왕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시바가 아라비아 북서부나 팔미라에 있던 여왕이며 둘째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멘과 에티오피아 또는 이들 두 나라를 통치했던 여왕이고 셋째는 년대 상에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집트의 여자 파라오로서 유명한 하셉수트 여왕이라는 설이다.

시바의 여왕만 20년 이상 추적하였던 니컬러스 클랩 박사는 시바가 팔미라 여왕이라는 주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시바가 솔로몬의 궁전과 멀지 않은 현재 아라비아 사막의 북부에 있었다는 것으로 당대의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 이해가 간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팔미라 여왕이라는 설명에 신화적인 면이 많다는 것을 단점으로 지적했다. 특히 팔미라의 여왕시바 여왕임은 물론 바빌론의 이슈타르 신과 동일하다는 설명도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한마디로 솔로몬의 권위와 지혜 등을 칭송하기 위한 비유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 설이 상당히 흥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멘과 에티오피아가 시바여왕의 근거지라는 설명인데 결정적인 문제점은 이들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가 기원전 650년을 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바여왕이 설사 존재하더라도 기원전 940년경으로 추정하는 솔로몬보다 300년이 지난 뒤의 사람이므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개연성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존홉킨스대학의 구스반 비크 박사가 예멘 지역에서 동료 고고학자인 돈 드라구 박사와 함께 하자르 빈 후메이드에 있는 유적층을 발굴하여 년대를 측정했다. 그는 수많은 도기 파편들의 모양과 반죽의 정도, 표면 도료, 마무리, 장식들에 따라 년대를 분류했고 특히 당시에 개발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탄화된 지붕 들보들을 조사하였다. 양각으로 새겨진 결합문자도 발견했는데 이들의 년대를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되었다.

더욱이 근래의 이탈리아 고고학팀의 연구에 의하면 루크만에 남아있는 지붕 없는 석벽 건물에서 발견된 유물의 년대가 기원전 980년에서 1395년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기원전 10세기 경 시바 여왕의 생존에 관한 논쟁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해 준 것이다.

학자들은 시바여왕의 도시가 있었다는 마리브에 주목했다.

1930년대 만해도 마리브에는 손상되지 않은 성벽들이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도시가 인근에 세워지자 마리브의 돌들은 새 건축물을 위해 재사용되었지만 고고학자들이 조사할 유물들은 남아 있었다.

학자들은 마리브에서 거대한 댐과 마흐람 빌키스로 알려진 달의 신전, 살한(Salhan)가의 왕궁 등을 조사했다. 마리브의 댐은 과거부터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기원전 8세기에 건설되었음에도 최대의 댐의 폭이 680미터로 미국의 후버 댐 폭의 1.5배나 되기 때문이다. 기초의 두께는 55미터, 중간 깊이는 15미터다.

마리브의 거대한 댐은 진흙 장벽에 석판을 씌우고 회반죽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댐은 계절마다 초당 2,000 톤 이상의 물과 흙을 운반하는 급류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댐의 용도는 용수 저장이 아니라 사나운 물살을 남북 수문 양쪽으로 갈라놓은 다음 천천히 하천 유역으로 내보내기 위한 것이다. 이 물로 경작이 가능한 경작지는 무려 100제곱킬로미터로 35만 명의 도시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크기다. 댐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으나 575년 선지자 마호메트가 태어날 무렵 댐이 터지자 이 지역은 급락했다.

여하튼 마리브에는 천국의 정원이라 불리는 두 개의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이곳이 얼마나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는가는 다음 글로도 알 수 있다.

 

따거나 주울 필요도 없이 하인이 정원에 심어진 나무 밑을 지나가기만 하면 바구니에 과일이 가득 찼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대규모 농업 활동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이 지역을 조사했던 독일의 고고학자 위르겐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마리브 댐의 놀라운 점을 피력했다.

 

바로 여기에 고도의 건축 기술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만든 완벽한 고대의 수로 시설이 있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댐의 유적은 시바여왕 시대보다 300년 정도 후대에 건설된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기 시바여왕보다 후대의 댐을 설명하는 것은 근래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댐을 정밀 조사한 결과 기원전 1500년 경 초기의 댐이 건설되었고 그 댐은 기원전 940년 경 즉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시대에도 건재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