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5) : 이집트의 영광(6)

Que sais 2021. 3. 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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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트는 팔레스타인 지역>

푼트에서 비가 많이 내리면 이집트에서 나일 강의 수위가 달라진다는 내용을 보면 푼트는 이집트의 남부에 있는 것이 거의 틀림없다. 현대 학자들이 수단 남부나 에티오피아 지역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다.

그런데 푼트로서 적합한 지역은 이집트의 남부가 아닌 솔로몬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정해도 많은 부분에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점이 세 번째 가설의 핵심이다.

성서는 솔로몬이 이국적인 동식물에 흥미를 지니고 있었던 점에 대하여 거듭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셉수트 여왕의 부조에 묘사된 푼트인은 끝이 뾰족한 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매부리코에 피부색은 이집트인보다 밝은 데 그것은 솔로몬 시대의 전형적인 유태인의 모습이다.

여왕은 처음엔 해로를 이용했으며 이어 육로로 들어갔다. 여왕이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좁은 해협으로 야영을 한 해변에는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했다고 했다. 이는 바로 아카바 만의 정경 그대로다. 한 고고학자는 하셉수트 여왕의 부조에 묘사된 해양생물은 전형적인 홍해의 동물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땅에는 유황과 미르가 풍부했다는 것 등을 근거로 푼트의 위치를 시나이 반도의 북부라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전설의 시바 여왕과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하셉수트 여왕은 누구인가?

하셉수트 여왕의 아버지는 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로 이집트의 국경을 대폭 확장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남쪽은 현재 수단 지역인 제4폭포 앞까지, 북동은 팔레스타인, 시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투트모세 1세가 죽자 그녀는 이복 동생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였. 그러나 남편인 투트모세 2세가 일찍 사망하고 투트모세 3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자 섭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투트모세 3세의 섭정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공동 파라오에 올랐다. 명색은 공동 파라오라지만 사실 모든 실권은 그녀가 쥐고 있었고 신권까지도 행사하였다.

이집트 역사에서 하셉수트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여왕은 없었다. 그녀는 여자임에도 상하 이집트의 주권을 상징하는 이중의 관을 썼다. 그녀는 남성용 왕복을 입기도 하였고 의식을 거행하는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는 파라오의 전통인 가발로 된 수염을 달기도 하였다.

하셉수트 여왕이 단지 시나이 반도를 여행한 것뿐이라면 어째서 자신의 치세 중 푼트의 여행을 가장 높은 업적으로 이야기하였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여왕은 성경에 쓰인 바와 같이 솔로몬을 만나러 갔으며 그 만남을 통해서 솔로몬에게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이 방문은 아라비아에 있었던 작은 나라 시바의 여왕으로서가 아니라 대국 이집트의 왕으로서 행한 공식적인 행차였다. 솔로몬의 경우도 자신을 찾은 방문객 중에서 유일하게 시바 여왕을 기록한 것은 이집트라는 대국의 여왕이 자신을 방문하였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투트모세 1, 투트모세 3세가 이집트 역사상 걸출한 정복자지만 그들의 중간 시기인 하셉수트 여왕의 재위 동안에는 외국으로 원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외국을 정복하기 위한 힘을 내정에다 쏟았는데 솔로몬 왕을 방문한 것은 신흥국이라고 볼 수 있는 예루살렘과 경제적인 목적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대국 이집트의 하셉수트 여왕으로서 솔로몬에게 가져간 물건들이 엄청났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집트의 경우 이집트 정치의 특성상 파라오가 3개월 정도 수도를 비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집트는 거의 전 기간을 통해 두 명이 공동 통치했다. 그것은 두 명의 파라오 중에서 한 명이 사고를 당하더라도 왕위 계승에 문제점이 없도록 하기 위한 이집트 나름대로의 통치기법 중에 하나다. 당시 그녀와 공동통치한 파라오는 투트모세 3세로 그는 추후에 이집트를 제국 중에 제국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고대 에티오피아 승려가 쓴 글에 의하면 시바 왕국은 그 영토가 홍해의 양쪽에 걸쳐 있었는데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갈 때 에티오피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기원후 1세기경에 성서를 번역한 유태인 역사가 요셉스는 시바의 여왕을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여왕이라고 적고 있다.

18왕조 시대에는 이집트가 에티오피아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 기술도 합치된다. 그러므로 현재 공인되고 있는 이집트 연대표가 벨리코프스키가 제안하는 것과 같이 정정될 수 있다면 시바 여왕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 중에 하나인 하셉수트 여왕일 가능성이 제일 유력하다는 설명이지만 이것은 이집트 정통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바 여왕의 진상이 밝혀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니컬러스 클랩 박사는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다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경에서 언급된 것과는 달리 솔로몬보다는 시바의 여왕이 더 막강했다는 것이다. 그는 솔로몬이 왕이긴 했지만 거대 강국의 맹주는 아니었다고 단언해서 말했다. 기껏해야 유다 언덕에서 왕으로 추대된 부족들의 연맹장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근래 발견된 솔로몬의 궁전 등을 발굴한 결과 등을 고려한 추정이다.

그는 이런 사실이 별로 놀랄 일이 아니라면서 성서에 나온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 대한 비유는 솔로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작가가 행한 작은 노력의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하셉수트와 투트모세3>

룩소르 북쪽의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장제전에는 제 1왕조를 세운 나르메르에서부터 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까지 76명의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과 재위기간이 기록된 아비도스 왕명표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일신 아텐 신앙을 중심으로 개혁을 했던 아케나톤, 그 후계자인 투탕카문, 그리고 하셉수트의 왕명이 누락되어 있다. 더구나 하트셉수트가 세운 수많은 기념물들이 파괴되었고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행위인 '이름의 삭제'도 가해졌다. 이를 두고 하셉수트가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왕위를 회복한 투트모세 3세가 자신을 바보로 만든 하셉수트에 대한 보복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받아들였다. 사실 현재도 이 설을 흥미롭게 가필하여 심심하면 특집으로 다룬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여러 자료들이 계속 축적되자 적어도 투트모세 3세가 자신의 선대 파라오인 하셉수트를 미워하여 기록을 말살했다는 설은, 현재 이집트 학계에서 퇴출된 상태다. 이에 대한 증거를 <나무위키>의 글에서 참조한다.

 

투트모세 3세는 정당한 후계자였고 하셉수트는 정당한 공동 대행자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이원체제로 국정을 수행했는데 투트모세2세가 사망하자 외아들인 투모세스 3세와 하셉수트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투트모세 3세가 계모인 하셉수트와 이집트를 공동통치하는데 반발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하셉수트가 투트모세 3세를 공동 파라오로 받아드렸다는 것을 고마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투모세스 3세가 10대 중반이 되자 하셉수트가 이렇다 할 방해공작 없이 공통 통치자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투모세스 2세 사망후 한동안 하셉수트의 이름만 나오던 기념비나 기념벽화에 두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공동 통치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공동 통치 22년째에 하셉수트가 죽었는데, 만약 하셉수트와의 사이가 나빴다면 당연히 훼손되었어야 할 그녀의 장제전과 무덤이 존재한다. 학자들은 하셉수트의 무덤이 훼손된 것은 도굴꾼들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의도적 훼손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〇 투트모세 3세가 하셉수트를 미워했다면 당연히 그녀의 직속 신하들에 대한 숙청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셉수트 시대의 중신이 그녀 사후 그대로 투트모세 3세의 정사를 보좌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셉수트 흔적 말살 행위는 적어도 그녀의 사후 20년 후에 시작되었다. 투트모세 3세가 하셉수트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다면 하셉수트가 사망한 후 곧바로 시작하는 것이 정상이다.

 

〇 투트모세 3세의 두 번째 왕비로 그의 후계자인 아멘호테프 2세를 낳은 여인은 '라의 사랑을 받는 하셉수트'이다. 만약 투트모세 3세가 하셉수트를 증오했다면 자신의 왕비 이름하셉수트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리 없다.

 

〇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과 하셉수트의 장제전은 거의 붙어있다 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미워했다면 자신의 장제전을 그녀 옆에 세우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도 수많은 하셉수트의 기념물이 남아있는데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명으로 선대의 유물과 기록을 제거하라고 했다면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파괴되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있는 기념물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셉수트를 겨냥한 파괴 행위가 정말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는 뜻이다.

 

하셉수트 미라 검사

 

그동안 걸림돌은 아비도스 왕명표에 그녀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기록에 철저한 이집트에서 왕명표에 그녀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은 적어도 파라오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아비도스 왕명표에 아케나톤, 투탕카몬도 빠져 있다. 그런데 역사학자 마네토가 편찬한 왕명표에는 그녀의 이름이 들어있다. 이 문제는 논제로 삼지 않고 넘어가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하셉수트 여왕 미라 발견>

하셉수트 역시 왕가의 계곡에 묻혔다. 그녀의 장제전 인근의 KV20이 그녀의 무덤이다. 그런데 1903하워드 카터KV60 무덤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 미라 2구를 발굴한다.

그 중 한 구는 하셉수트의 유모로 밝혀졌고, 나머지 한 구는 신원 미상이었다.

1920년에는 하트셉수트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이 안에는 비어있는 두 개의 석관만 있었고 또 다른 무덤에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이름이 새겨진 빈 석관을 발굴했다. 이는 보다 앞선 무덤에서 발견된 두 개의 석관을 포함하여 하셉수트가 생전에 준비했던 세 개의 석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카터가 1903년에 발견된 미라가 하셉수트의 진본으로 밝혀진 것은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학자들은 애초부터 하셉수트 미라가 발견 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자들이 하셉수트의 미라의 발견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그녀를 이은 투모세스 3세가 그녀의 이집트에 관한 기록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 하셉수트 정책을 펼쳤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신전과 기념물, 오벨리스크에서 하셉수트가 파라오로 묘사된 모습을 거의 전부 삭제한데다 미라도 훼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KV60a를 하셉수트의 미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특히 이 미라는 파라오를 뜻하는 장신구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1989년 이집트 학자인 도널드 라이언 박사KV60a에 있는 미라의 왼쪽 팔이 구부러진 채 가슴 위에 얹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자세는 18왕조 여왕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매장 자세였다.

이집트 정부에서 컴퓨터 단층촬영을 실시하고 3차원 영상 분석을 통해 미라와 하셉수트 여왕 가계의 독특한 신체 특성을 비교분석하는 방법을 병용했다.

2007 즉 발견된 지 거의 100여년이 지나 하셉수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항아리에서 발견된 치아미라의 없어진 치아 부분의 어금니 자리와 정확히 일치했고 현대의 첨단 장비라 볼 수 있는 CT 촬영 등을 통해 하셉수트임이 확인된 것이다.

미라는 상당히 보존 상태가 좋았는데 165cm키에 약간 뚱뚱했고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연구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50대에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으로 퍼졌기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관절염, 치주염을 비롯한 충치가 발견되었다.

이 내용은 세계의 언론에 투탕카문이 발견된 이후 왕가의 계곡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사건이라고 평가되었으며 그녀의 미라는 현재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여하튼 현대에 들어와 하셉수트는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가 경합하기 때문이다. 어린 투모세스 3세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못된 계모의 이미지와 위대한 이집트를 만천하에 밝힌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이미지다.

근래에 들어 그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근래 하셉수트가 무자비한 야심가였다고 비난받았던 그녀의 반여성주의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녀가 아름답고 온유한 성품이며 개혁을 시도한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여성 권력자였다고 설명한다. 다소 동 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셉수트가 워낙 높은 유명세를 갖고 있으므로 나일강에서 떠 내려가던 어린 모세를 발견한 이도 바로 하셉수트였다는 가설도 제기될 정도다.

 

참고문헌 :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고정희의 서양정원사백과, 2007.2

미모의 전설적 여자 파라오’..."하트셉수트 미라 찾았다, 이나무, 팝뉴스, 2007.6.27

최초의 여성 파라오하트셉수트 미라 발견, 전수미, 노컷뉴스, 2007.06.28

하트셉수트 여왕 미라 찾았다, 부산일보, 2007.06.28.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발견, YTN, 2007.6.28

이집트의 위대한 여성 파라오, 칩 브라운, 내셔널지오그래픽, 20094

하트셉수트, 나무위키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 동아출판사, 1989

고대세계의 70가지 미스터리, 브라이언 페이건, 오늘의책, 2003

시바의 여왕, 3천년 잠을 깨다, 니컬러스 클랩, 김영사, 2005

신화추적자, 마이클 우드, 웅진지식하우스, 2006

Egypt, Bonechi,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