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4) : 이집트의 영광(5)

Que sais 2021. 3. 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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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키스도 증거>

시바 여왕의 성지라 불리는 마흐람 빌키스도 시바 여왕의 존재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88년에 캐나다의 빌 그랜즈먼 박사에 의해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사원의 불규칙한 타원형 부지는 긴 쪽이 지름 95.8미터이고 담장 높이는 16미터로 전체넓이는 거의 1,550평이나 되었다. 이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5배나 되는 규모다.

1951년 미국의 웬델 필립스와 자메 신부60마리의 소와 180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마흐람 빌키스 신전을 발굴했는데 그는 남자 청동상, 청동 비문 등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의 발굴은 지역 책임자로 하여금 고고학자들이 아니라 보물을 찾으려는 도굴꾼일지 모른다고 지적하자 결국 발굴을 포기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5일 정도만 더 발굴할 수 있었다면 시바 여왕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 신전은 본래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 1000년대 초에 건축되었으며 두 번째 단계는 마리브의 번영기였던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사바와 그 이웃나라였던 오피르(Ophir)는 근동의 권력자들에게 잘 알려졌다. 아시리아인들은 이때 아라비아의 여왕 이름을 기록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당시의 여왕이 시바의 여왕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시리아의 기록은 북아라비아를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왕들이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근동과 아시리아로 향료와 향신료를 실은 대상을 이끌고 사절을 거느리고 갔다는 것은 성서의 이야기와 잘 들어맞는다.

여하튼 자메 신부가 예멘을 빠져 나왔지만 그들이 발굴한 일부 유물들의 증거물을 미국으로 갖고 올 수 있었다. 그것은 200개 비문 필사본과 사진이다. 그의 필사본을 통해 리버풀 대학의 케네스 키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내려오는 115명의 왕들의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연대표에서 여왕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데 주목했다. 그는 연대기에서 여왕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로 다음을 제시했다.

 

시바 여왕의 이름이 연대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남편과 함께 왕위에 오르거나 아들이나 가까운 친척의 섭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시바의 여왕은 국사를 담당한 여왕으로 중요한 장거리 무역 수행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자일수도 있다. 당시 시바 여왕은 자신의 왕궁을 석 달이나 비웠다가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시바의 여왕의 행동은 과거 전제국가의 통치자로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3달간이나 왕좌를 비워두었는데도 왕위가 무사했다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왕이 정열과 수완을 갖춘 시바와 같은 여왕을 파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키친 박사의 설명은 사망한 남편의 뒤를 이어 시바를 다스렸다기보다는 섭정했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특히 시바의 여왕은 신화에서 17년 간 통치했지만 사망으로 인해 왕권을 물려줬다는 언급이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어린 아들이 성년이 될 대까지 통치하다 자리에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많다는 설명이다.

 

<이집트 연대의 미스터리>

시바 여왕이 이집트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하셉수트 여왕(기원전 1503기원전 1482)이라는 세 번째 가설은 근래 이집트 학을 재검토해 보자는 과정에서 나온 것 중에 하나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자료들은 거의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집트인들은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에 충실하였다. 특히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가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장구한 이집트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들은 만약에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필을 하지 않고 각종 자료에서 지우거나 삭제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이집트 사료를 모두 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은 어디엔가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집트인들은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일을 기록할 경우에만 신의 글씨인 상형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는데 상형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부심멜신전을 건설한 람세스 2, 인류 최대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황금관과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탄카문, 이집트 철학 및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아케나톤, 여자로서 신권과 왕권을 갖고 있었던 하셉수트 여왕, 이집트 사상 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알려진 투트모세 3 등이 모두 18왕조부터 20왕조(기원전 15521072)까지의 ()왕국시대를 풍미했다. 학자들은 이 시대를 이집트 최후의 번영기 제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집트의 역사를 거론할 때 논쟁이 되는 것은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과 통치 연대가 과연 정확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들의 리스트는 기원전 3세기에 살았던 역사학자 마네톤의 기록에 주로 근거하고 있는데, 과연 마네톤의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인가가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에드워드 메이어 박사는 고대 이집트의 역대 왕들이 재위했던 연대를 설정하는 과학적 방식을 고안했다. 그것은 이집트 역사에 있어 몇 가지 중대한 시기에 시리우스 별이 등장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연대표를 작성한 것이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부동의 사실로 인정을 받고 있다.

시리우스 별자리가 떠오르는 날을 수정하여 달력을 만들면 자동적으로 1,46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이집트 학자들은 시리우스력()의 새로운 출발이 메노프레스라고 불린 왕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가정하였고 이 왕을 람세스 1라고 보았다. 19왕조의 시작을 기원전 1321년으로 잡고 신왕국의 각 연대를 정해 나갔다.

그러나 이 시리우스 연대 설정법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집트 학자인 윈로크 박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리우스 별을 이용한 역법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무 곳에서도 찾아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저명한 이집트 학자인 알란 가디너 경도 메노프레스는 람세스 1세가 아니라 세티 1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시리우스 별에 의한 연대표로 이집트의 역사를 기술할 때 많은 모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벨리코프스키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여 설정한 대조 역사 연표에 근거하여 새로운 연대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대표를 사용할 경우의 문제점은 이제까지 이집트 역사에서 정설로 굳혀진 역사적인 사실의 연대를 상당히 낮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집트 제18왕조는 현재 공인된 이집트의 연대보다 약 500년 정도 뒤로 내려가게 된다.

정통 이집트 학자들이 펄쩍뛰고 있는 가설이기는 하지만 이럴 경우 에티오피아와 예멘 두 나라가 서로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시바 여왕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두 나라에서 시바 여왕에 대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하셉수트의 푼트 여행

 

<푼트로 여행한 하셉수트>

18왕조의 하셉수트 여왕은 전설의 땅인 푼트로 대여행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바와 마찬가지로 푼트의 위치 역시 오랫동안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어 왔다. 자료에 의하면 푼트 지방은 이집트에서 멀지 않은 동쪽에 있는 땅이다.

푼트는 기원전 2450년경의 사후레 왕에서 람세스 3(기원전 1170년경)까지 적어도 1300년 동안 이집트와 정기적으로 교역했다. 푼트에 관해 현대 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그림 정보인데 자료에 의하면 교역단은 금과 향기나는 수지, 고급 목재, 상아, 야생동물(기린, 원숭이, 비비) 등의 이국적인 산물이 생산된다. 또한 푼트 주민들은 적갈색 피부의 잘 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다. 초기의 그림에서는 사람들의 머리털이 길지만 후대인 18왕조부터는 짧게 깎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하셉수트 여왕은 자신의 치세 중 최대의 업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이 원정이 끝나자 사후의 안식처로 델엘바하리에 장대한 아몬 장제전을 세운다. 아몬 장제전은 주위 경관과 인간 기술이 어우러진 이집트 건축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수많은 스핑크스와 조상, 꽃과 수목이 꽉 차있는 화단 등은 아직도 화려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제전에 그려진 부조에는 평화와 풍요의 상징인 푼트 땅에 있는 수많은 이국적인 동식물을 상세히 그렸다.

이집트 학자들은 식물학자와 동물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녀의 부조에 있는 그림을 단서로 푼트 지방을 찾아 나섰다. 이 그림을 토대로 학자들은 푼트를 두 지방으로 추정한다.

첫째수단 남부나 에티오피아 지역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장제전의 그림에는 아주 독특한 푼트 가옥이 보인다. 갈대로 원뿔형의 오두막을 엮은 집인데, 막대기들이 떠받치고 있으므로 사다리를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림에 나오는 주변의 식생을 보면 종려나무와 몰약이 생산되는 나무들이 있다. 몰약을 추출하기 위해 나무를 갈라놓은 모습도 있다.

푼트의 지배자는 자신의 집에서 나와 이집트 교역단을 맞이했는데 지배자의 이름은 파라후. 파라후는 족장국들의 느슨한 동맹체를 지배했거나 해변 집단의 대표자로서 이집트와 푼트 내륙지대를 중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테베에서 푼트로 가는 교역단은 보통 두 단계로 여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첫째는 동부 사막을 도보로 횡단한 다음 배를 타고 홍해를 내려가는 길이다. 홍해를 항해하는 대신 나일 강과 육로를 병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푼트가 주요 교역 상대가 된 뒤에도 푼트는 이집트인들로서 가까운 지역이 아니었다. 난파선의 선원이라는 중왕국 시대의 이야기에는 어느 영웅이 푼트의 왕이라고 자처하는 마법의 뱀에게서 몰약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신왕국 시대가 끝난 뒤인 기원전 1070년부터는 이집트 기록에서 거의 푼트가 언급되지 않는다. 푼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제26왕조인 기원전 600년경의 비석 조각인데 내용은 푼트의 기후가 바뀌어 이곳에 비가 많이 내리면 나일 강의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