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6) : 이집트의 영광(7)

Que sais 2021. 3. 3.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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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반항아 아케나톤

이집트의 200여명에 달하는 많은 파라오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은 아케나톤으로 그는 투탕카문의 전전 파라오다. 그가 이집트 왕들 중에서 특이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과거의 이집트 신들을 자신의 신인 유일신으로 대체하였는데 그것이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역사 이탈의 사례인 동시에 서양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에 의해서 비로소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아케나톤은 아버지 아멘호테프 3(재위 13901353)의 이름을 물려받고 아멘호테프 4(재위 기원전 13531336)가 되어 처음에는 아버지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참고적으로 이에 설명되는 신왕조의 파라오 연대는 투탕카문의 묘을 발견한 하워드 카터의 기록에 의한다. 자료에 따라 연대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케나톤이 이집트 파라오 중에서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그의 근친결혼 사례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신비한 파라오라고 말했다. 그가 특별히 신비하다는 것은 뜻밖에도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그의 어머니티티(Tiey)이고 두 번째는 그의 내외종 사촌 누이동생네페르티티(Neferetiti). 세 번째와 네 번째 아내는 그와 혈연관계가 없으나 다섯 번째는 그와 네페페르티티 사이에 낳은 딸로 투탕카몬 파라오의 왕비인 앙크에스엔아멘이다.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자기의 근친과 결혼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그것은 파라오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파라오는 신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근친과 결혼하여 신의 혈통을 계속 이어 간 것이다.

람세스 2의 경우도 67년간이나 통치하면서 모두 100여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며, 학자들은 람세스의 딸과 결혼하여 난 딸 즉 손녀딸과 다시 결혼했다고 추정한다.

아멘호테프 4는 통치 후 5, 6년이 지날 무렵부터 그야말로 이집트인들로는 상상할 수 없는 과격한 조치를 내린다. 과거의 수많은 신들을 버리고 태양신 ''에 관련되는 '아톤' 만을 경배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이름도 아톤의 광휘를 뜻하는 아케나톤으로 바꾸었다.

이집트가 신의 나라라는 것은 신에 의해 모든 권력과 통치력이 운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나일강의 물과 비옥한 토지 그리고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기 등 모든 것을 하피, 겝 그리고 슈라는 신의 세계에서 취했다.

전갈의 여신 셀켓 또는 악어의 신 소벡은 이집트인들이 현실세계에서 두려워하는 특별한 짐승들을 경외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어머니와 여인의 사랑은 소와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한 하토르 형상으로 대변되며 베스와 토에리스와 같은 집의 신들은 가정의 행복과 임산부를 보호한다. 이는 이집트에서 신봉된 700여 신들의 존재들이야말로 이집트인들을 움직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대변된다.

그런데 아케나톤은 이들 모든 신을 폐지하고 아톤신만 유일하다고 선포했다.

명분은 간단하다. 태양 즉 태양신에 우주의 모든 힘이 깃들여 있기 때문에 태양신은 그 모든 신들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태양이 인간, 짐승, 식물을 번창하게 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과거에도 태양신이 존재했고 자유롭게 숭배했다. 그러나 아케나톤4세의 태양신이 과거와는 다른 것은 태양신이 모든 신을 통합 즉 유일신이라는 점이다. 이 신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하라크테. 수평선에서 슈의 이름을 찬양하는 그대의 이름은 아톤. 그대는 태양신의 명백한 현신이며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광선이다.’

 

당시까지 아몬신은 백성들이 직접 바라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새로운 신은 인간들이 모두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신 즉 태양은 날마다 하늘에서 모든 백성을 위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멘호테프 4아케나톤의 파격적인 조처에 이집트 신관들이 놀란 것은 파라오가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파라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신관들이었다. 그런데 아멘호테프 4세의 말에 의하면 모든 백성이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뜻이므로 그동안 이집트에 건설된 수많은 신전들은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근거지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아케나톤

이 문제를 아멘호테프 4세가 모를리 없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구시대의 유산을 모두 과거로 돌리고 자신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 새로운 공간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그는 기존의 아몬 신들의 근거지인 테베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신들의 근거지인 테베에서 자신의 새로운 믿음을 전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테베에서 500킬로미터 정도 북쪽에 있는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신수도인 텔 엘-아마르나를 건설한다.

새로운 수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로 760미터, 세로 200미터로 태양신 하나만 숭배하는 이 도시는 매일 바쳐지는 희생물을 위해 400개의 계단을 준비했다. 물론 이 도시에 건설된 신전도 큰 틀에서 여타 이집트 예술품처럼 엄격하게 전통적인 규칙에 따라 건축되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은 파격적이다.

과거의 신전 건축은 항상 지붕이 있었는데 이 신전은 개방되었다. 또한 신전 안에 전지전능한 신의 조각상이 설치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태양이 매일 솟아오르므로 태양을 경배하기 위해 조각상은 필요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케나톤은 궁정 안에 자신을 위한 작은 아톤 신전을 건설했다.

그가 이런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에는 당대의 이집트 정황 때문이다.

신왕국은 이집트를 지배했던 힉소스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되찾았으므로 모든 곳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당연히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 사제들의 권위도 더욱 높아져 파라오조차 그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왕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사제들의 과도한 권력이 통치에 부담이 되자 아멘호테프 3세는 나름대로 사제들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를 이은 아멘호테프 4세는 아멘호테프 3세의 유지를 이어 받아 사제들의 권력을 축소하는 강력한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신관들은 파라오를 대신하여 신전에서 벌어지는 의식들을 주재하므로 파라오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의 사제장은 파라오 다음으로 막강한 인물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가 사제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카르나크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 많은 신들을 부정하고 유일신 아톤을 내세운다면 사제들이 할 일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사제들을 지원하는 수많은 신들의 영향력이 모두 아톤 신에게 통합되었으므로 사제들 모두 파라오인 자신에게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수도 테베에서 완전히 다른 텔엘아마르나 인근에 새로운 도읍을 세운 것도 그가 강력한 아몬 신전의 사제들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일환이었다. 그곳은 태양신 아톤의 영역으로 신의 소유도 아니고 파라오의 소유도 아닌 아케타톤이라고 선언했다.

문제는 사제들의 권위를 축소시키려는 그의 발상이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곧바로 경원 당했다는 점이다. 아케나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이집트인들의 정신세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의 믿음에서 볼 때 아톤 신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톤신은 태양을 상징하는데 그는 빛이 있을 때는 전능하지만 죽은 자들이 머무는 밤의 왕국에서는 아무 힘도 없는 신이었다. 특히 낮에만 뜨는 태양만을 강조하다 보니 구름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태양 자체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집트인들로서는 현생보다는 사후의 세계가 더 중요했다. 현생은 100년 미만이지만 사후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낮에만 활동하는 유일 창조자에 대한 신화는 밤의 측면에서 볼 때 이집트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어둠의 신, 죽음의 신과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아케나톤의 태양신은 사후의 영원한 생활을 기본으로 인식하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생각조차하기 어려운 불순한 믿음이었다.

사후 세계가 없는 태양의 신은 이집트인들이 보기에 믿음이 아니었다. 결국 아케나톤은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라오라는 권위로 파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아이디어에 집착한 아케나톤은 유일신의 보급을 위해 이집트 전국에 있는 신전들의 폐쇄까지 명하였다. 신전 내부에서 행해지는 의식에 참석할 수 없는데다가 승려에 의해 운반되는 배 안에 덮인 의식용 조상에 대한 경배, 성스러운 결혼, 다산 및 수확의 신비 등을 축하하는 축제도 금지했다. 이집트인들에게 생 자체를 거부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조치에 사제들을 비롯하여 이집트 국민들의 반응이 냉담하였음은 물론이다.

몇몇 역사가들이 혁명 혹은 개혁으로 기술하기도 하는 아케나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아톤 신앙은 그의 후계자인 투탕카문이 파라오가 되자마자 이미 질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소멸된다. 수도였던 아케타톤도 철저히 파괴되었고 건설에 사용되었던 자재들은 인근에 건물을 짓는 데 재사용되었다. 또한 신을 배반한 아케나톤의 모든 조각과 문서도 파괴했다. 그러나 그의 잔재를 모두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실패한 근원적인 이유는 오래 전부터 왕족과 보수주의자, 아몬 사제, 특히 기존 신전에 축적된 엄청난 재산과 이에 따른 권력 및 힘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이집트사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만큼은 대변혁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의 예술적 조예는 정말 놀랍다. 아케나톤은 이집트 예술가들이 딱딱함과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작가들에게 사물을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할 것을 허락해 아케나톤 자신의 얼굴과 몸도 수정 없이 사실대로 그리도록 했다.

조각이나 벽화에서 아케나톤은 허약한 사나이처럼 보인다. 얼굴이 길고 비틀어진 어깨는 축 늘어졌으며 배가 나오고 궁둥이가 크고, 다리는 길고 굵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집트 역사상 예술적인 면에서 가장 자유분방하였던 아마르나(Amarna)예술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