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28) : 이집트의 영광(9)

Que sais 2021. 3. 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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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을 대신한 네페르티티>

이집트에서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파라오였다. 그런데 파라오 혼자 전국에 있는 모든 사원에 공헌물을 바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그 일을 제사장들이 위임받아 거행했다.

신관이 막강한 권한을 쥐는 요인이었는데 아케나톤은 여기에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마디로 그의 왕비인 네페르티티에게도 그런 중재자의 역할을 준 것이다. 그때까지 수동적인 역할에 만족했던 여자들과는 달리 네페르티티는 신에게 공헌물을 바치는 중재인 역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라오만이 담당하던 제식을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식의 순서에서 네페르티티가 적을 물리치는 전사의 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강한 힘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은 더 이상 파라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집트인의 보호자이며 가장 위대한 여전사였고 세계의 지배자였다.

네페르티티에 대한 아케나톤의 임무 부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즉 이집트의 신을 아케타톤단 하나의 신으로 통합했으므로 아케타톤즉 태양을 봉헌하는데는 자신과 네페르티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땅에 내려온 신의 현신이라고 불리는 파라오가 신들과 대결을 선언한 것인데 그동안 이집트를 주재하던 사제들이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무려 700여 명이나 존재하는 신의 나라에서 신과의 대결은 일거에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신관에게 부여된 모든 특권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소위 엄청나게 많은 사제들의 밥줄도 완전히 끊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과거에도 파라오와 제사장과의 갈등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만든 갈등은 그동안 일어났던 그 어느 것보다 심각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케나톤이 이집트 전역에 있는 신전에서 아몬 신의 조각을 지우라고 명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그의 아버지 신전에서도 아몬의 이름을 지우도록 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케나톤이 테베의 아몬신전 제사장을 황량한 사막지대에 있는 채석장 대장으로 임명했다. 이 말은 제사장의 정치적 사형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막가파식의 아케나톤 명령은 자동적으로 사제와 아케나톤의 관료들과의 충돌을 의미했다.

아케나톤은 여기에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그동안 이집트의 전통에 의해 관계로 진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발탁하여 사제와 대결토록 했다. 한 관료는 자신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 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창조자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바닥에 키스를 하고 나의 도시는 나를 추앙하였다.’

 

아케나톤에 의해 최단시간 내에 엘리트 관료들의 얼굴이 바뀌었고 이방인들도 고관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이방인에게도 햇빛이 이집트인처럼 비친다는 것이다.

투투라는 시리아 사람은 파라오의 시종에서 출발하여 최고 건축감독관이 되었고 심지어 재무장관까지 승진했다. 그가 아톤 신의 하인으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강한 파라오의 명이지만 모두 그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아란 피에르 찌비 박사1976년 사카라에서 아케나톤 시대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무덤은 평범한 무덤이 아니라 아케나톤 당시 대신을 지낸 무덤이다. 그런데 무덤의 주인과 아들의 석관은 아르마나 식이 아닌 전통양식으로 만들어져 매장된 것이다. 이 말은 아케나톤의 새로운 종교는 그의 새로운 수도 텔엘아르마나에서만 성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아케나톤이 이집트에서 아톤 신을 제외하고 모든 신을 제거하라고 했지만 사카라에는 임신과 출산, 가정의 행운을 관장하는 베스 신 등 여러 신들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하층민이나 이방인들이 출세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아케나톤이 벌였다고 하지만 아케나톤의 믿음은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아케나톤의 몰락>

아케나톤 집권 13년에 네페르티티가 사망했으며 아케나톤이 집권 17년에 사망하자 부모를 알 수 없는 세멘크카레가 파라오가 되었다. 그가 등장하면서 우선 네페르티티의 이름은 공식적인 문서에서 사라졌다.

세멘크카레는 아케나톤의 큰딸과 결혼했고 텔엘아마르나를 떠나 테베로 돌아갔다.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통치하고 사망하여 왕가의 계곡이 있는 작은 무덤에 매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유명한 투탕카문카르낙 신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적었다.

 

그는 거짓을 발설함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자신의 나라를 창조 이전의 혼란으로 몰아갔다. 그는 자신을 가장 존엄한 파라오로 여겼으며 엘레판티네에서부터 델타의 산호초까지를 수호하는 여신과 신의 사원들을 잊혀지도록 하였고 신들의 성스러운 장소를 파괴하여 잡초가 무성한 폐허더미로 만들었다. 온 나라는 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신들은 이 나라를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있다.’

 

투탕카문은 폐쇄한 신전을 다시 건립케하고 테베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으며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에서 아몬 신이 다시 위상을 찾도록 복권시켰다. 그후 파라오의 역사가 이집트에서 사라지는 그 날까지 아케나톤의 아케타톤은 숭배되지 않았다.

 

네페르타리의 외출

투탕카문은 아케나톤의 17년간 벌였던 이집트 신전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총력을 경주했다. 한마디로 텔엘아마르나에 남아있는 아케나톤의 흔적을 말끔히 제거하는 것으로 이 임무를 호렘헤브 장군이 맡았다.

호렘헤브는 아케나톤의 어떤 비문이나 조각들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아케나톤의 무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목관은 산산조각 났으며 모든 조각들도 파괴되었다. 호렘헤브는 추후에 투탕카문이 사망하자 파라오가 된다.

일반적으로 아마르나 시대 이집트 제18왕조의 말기에 해당하며 아케나톤, 세멘크카레투탕카몬 아이(Ay)의 통치기가 이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 당시의 기록은 사람들을 혼동케 만든다.

세멘크카레 또는 세멘카레는 아케나톤의 아들 또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로 여겨지며 아케나톤에 이어 파라오가 되었다. 근래의 유전자 분석에 의해 세멘크카레의 왕비로 알려진 메리타톤아케나톤네페르티티의 딸이며, 투탕카몬의 왕비인 앙크에스엔아멘의 친언니이다.

그런데 이집트 측으로부터 매우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KV55 매장된 한 남성의 미라를 세멘크카레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아케나톤의 미라 즉 투탕카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또한 세멘크카레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 말은 세멘크카레가 네페르티티일지 모른다는 그동안의 가설과도 일치한다.

 

<고대의 모나리자 네페르티티>

이집트사에서 아케나톤만큼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고대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이집트 최고 미인 네페르티티(Nepertiti, 기원전1370기원전 1330). 그녀는 아케나톤의 부인이다.

그녀의 얼굴을 표현한 조각품은 책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 중 하나는 카이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베를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네페르티티미인이 왔다라는 뜻으로 아케나톤의 사촌으로 알려졌지만 외국인 또는 고관의 딸로 궁중에서 길러진 여자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네페르티티는 아케나톤이 사망한 후 투탕카문이 파라오가 될 때까지 잠시 왕권을 쥔 것으로 추정된다. 네페르티티가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활과 화살로 무장한 자신의 전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을 근거로, 그녀 역시 하셉수트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가진 여자 파라오로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그녀의 왕권은 명목뿐이고 실제로는 그녀의 아버지인 아이가 실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녀가 근간 세계의 언론을 장식했다. 우선 독일의 영상과학연구소의 알렉산더 후페츠 박사는 왕비의 흉상 내부를 컴퓨터로 단층 촬영(CT)한 결과,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흉상 위에 여러 겹의 벽토가 덧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마디로 남편인 파라오 아케나톤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왕비의 흉상이 사실은 여러 차례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3500년 전 이집트의 왕실 조각가가 만든 왕비의 흉상이 후대의 미적 기준에 따라 여러 번 고쳐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입가와 뺨의 주름이 사라졌고 코끝의 울퉁불퉁한 부분이 매끈해졌으며, 광대뼈는 더 도톰해졌다. 왕비의 모습을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려는 후대인들이 흉상에 '보톡스'를 놓은 셈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