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3) : 피라미드 건설(4)

Que sais 2021. 3. 5.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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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레

피라미드 역사상 중요한 이정표가 된 것은 제5왕조의 사후레 피라미드. 그의 피라미드가 중왕국 시대의 무덤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사후레는 피라미드 건축단지를 세울 부지로 부친 우세르카프 파라오의 태양신전 남쪽, 오늘날의 아부시르 인근 사막 고원지대를 선택했다. 이후 그의 4대 후손들 모두 이곳에 무덤을 지었다. 피라미드 역사상 처음으로 왕가의 묘역이 등장한 것이다.

사후레는 자신의 묘역 건축에서 3왕조의 건축 형식을 따르지 않고 제4왕조처럼 방향을 동서 방향으로 잡았다. 또한 장제신전과 제물을 바치는 신전을 따로 건설하지 않고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건축물에 합쳐놓았다.

사후레는 사후레 영혼의 새가 나타난다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의 묘역은 다양한 암석 종류를 사용했고 특히 섬세한 부조로 조각했다. 바닥재는 반짝반짝 잘 연마한 석회암과 설화석고를 사용했다. 문틀과 기둥 그리고 들보는 붉은 화강암으로 마감했고 검은 현무암으로 된 받침돌을 두었다. 천장에는 검푸른 배경 위로 떠오르는 별무리를 그려놓았다.

별자리는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입구 홀과 남쪽에 있는 정방형의 대기실을 지나 제물을 바치는 성소의 방에도 별들을 장식했다. 물을 받아두는 수조는 포석 밑에 있는 구리관 시설과 연결되었다.

이는 대지의 식물계 위에 무한한 창공을 펼쳐놓은 것과 다름없다. 이 신전을 이집트인들은 최초의 출발, 즉 창세의 순간에 세상을 축소종합하여 옮겨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신전은 그 내부 그림을 통해 심령적인 소우주의 거처가 되었고 이 소우주에서 만물의 순환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곡 신전 앞에는 탁 트인 현관홀에 열주가 늘어섰고 남쪽에는 나중에 증축한 웅장한 두 번째 입구가 있었다. 천장으로 덮인 부조 장식의 참배로를 지나면 피라미드 신전에 다다른다. 첫 번째 방을 통과하면 마당에 이르는데 제물을 축성하는 제단이 중앙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일반적인 화강암 기둥 대신 야자수 모양의 식물 기둥이 세워졌다. 5왕조 시대말까지 이러한 식물기둥은 피라미드 묘역의 특징적인 요소로 남았다. 이후 기둥의 형태가 이른바 파피루스 두루마리 모양으로 변화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6왕조 초기에는 이런 기둥은 사라지고 과거의 기둥 양식으로 돌아간다.

사후레 파라오의 피라미드는 큰 규모는 아니다. 길이 78.75미터, 높이 47미터에 불과하지만 그의 피라미드는 여러 가지 혁신을 보여준다. 피라미드 본체 하단부에 벽을 쌓을 때 T자 모양의 구멍을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피라미드 내부의 무덤 통로와 묘실을 축조했다. 이것은 통로 건설 작업을 단순화하여 피라미드 공사에 속도를 붙이자는 것이다.

통로 시설의 평면도 역시 고대의 다른 피라미드들에 비해서 단순하다. 그래서 피라미드 내부는 비스듬한 입구 쪽 통로와 방, 낙석 장치와 수평 통로 구간, 대기실, 피라미드의 중심 지점 아래쪽에 위치한 묘실로 이루어졌다.

 

제드카레 이세시

사후레 파라오로부터 약 100년 후에 등장하는 제드카레 이세스(기원전 24052367) 파라오는 장기간 재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려 40여 년 간으로 그는 사카라 남쪽 언덕 위에 인상적인 미라미드 묘역을 축조했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피라미드는 현재 겨우 24미터의 높이의 돌 언덕만 남아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행해진 지나친 채굴 때문이다.

그 와중에 도굴된 지하시설에서 그의 유골로 보이는 50세경의 남자 미라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이는 그가 매우 어린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피라미드가 유명한 것은 후대의 모든 피라미드 내부 공간에 기본적으로 설치하는 세르답이란 공간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방은 피라미드 중심부 아래 위치한 대기실 동쪽에 있는데 세 개의 벽감이 있다.

학자들은 세르답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입상을 보관하기 위한 폐쇄된 공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의 내세를 위한 부장품 중 특정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창고로 설명하기도 한다.

피라미드 북쪽 입구를 빠져나오면 그곳에 새로운 시설이 위치한다. 돌로 건축된 제식용 예배당으로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제물을 바치는 공간의 축소판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마무리한 북예배당 입구 맞은편은 예배당 전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그 앞에 제단을 두었다.

예배당 동쪽과 서쪽벽은 영전에 제물을 바치는 장면을 새긴 다채로운 부조로 장식했고 천장에는 노란색 별들이 반짝인다. 북예배당은 제12왕조가 끈나는 기원전 1794년경까지 피라미드 묘역에서 반드시 설치되는 건물로 자리잡았다.

학자들은 제드카레 이세시 피라미드 신전의 균형미가 압권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건축비례는 사후레 파라오 이후 사용된 기본 평면도에서 정해진 것이다. 특히 당대에 값비싼 화강암과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이 피라미드 신전은 당시 신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마당의 기둥들은 사후레 파라오처럼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야자수 기둥이다.

 

우나스 피라미드

우나스

5왕조는 우나스 파라오와 함께 종곡을 고했다. 특히 그는 30여 년 이상을 통치했는데도 고왕국에서 가장 작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토대 길이는 57.75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경사각은 5618분으로 높이는 43미터다.

그런데 우나스 피라미드가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 텍스트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믿음에 대한 문서로 인식한다. 1881년 프랑스의 가스통 마스페로가 제6왕조의 페피 1세 피라미드에서 피라미드 텍스트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는 우나스의 피라미드 텍스트의 사본이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이집트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보다 설명한다.

피라미드 텍스트의 중요성은 우나스 파라오 때부터 파라오 무덤의 표준 시방서로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비의 피라미드에서도 이들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우나스 피라미드4300년 이전에 새겨졌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데 대체적으로는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다. 묘실의 4개 벽면에 피라미드 텍스트가 빼곡히 세로로 새겨져 있으며 천장에는 별이 가득 새겨져 있다.

283개의 문구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묘실과 대기실, 대기실 앞 통로 마지막 구간에 기록되었다. 우나스 피라미드에는 상형문자가 석회암에 부조로 깊게 새겨져 있었으며 식물과 다산 그리고 새로운 생멸들이 청록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 텍스트들에 기록된 이야기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필요한 문구, 친기 그리고 주문 등 여러 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새로운 사상과 옛 사상을 구별하기도 하고 옛 내세관이 새로운 내세관과 동등하게 병존하기도 한다.

또한 매, 솔개, 거위 또는 메뚜기 등의 여러 동물이나 소용돌이 등의 도움으로 북쪽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별들의 세계로 올라가거나 태양신 레와 동행하여 하늘을 날고자하는 파라오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또한 신의 뜻에 복종하거나 신들과 조상의 생명력을 취하고자 그들을 상징적으로 먹는 식인 송가도 들어있다. 이는 죽은 파라오를 사후의 왕국의 주인인 오시리스 및 그의 운명과 동일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런 심령적 방법으로 파라오가 영적 존재로 변화하고 부활에서 천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나스 피라미드 텍스트

파라오의 석관을 둘러싼 묘실 서쪽 벽은 설화석고로 장식했고 묘실과 대기실은 육중한 석회암으로 된 박공지붕을 했다. 궁전 전면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모티브와 장식한 벽은 초기왕국 시대의 사후 궁전을 상징한다.

피라미드 텍스트가 보다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현생과 내세의 생활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눈부신 황금 옥좌에 앉아 있는 위대한 신 오시리스의 신비한 형상을 보았다. 그의 왼쪽에는 위대한 신 토트가 앉아 있었다. 재판관 역할을 맡은 신들이 그의 좌우에 서 있었고 그들 앞 중앙에 저울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악행과 선행의 무게를 단다.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한 자들은 저승의 왕에게 손한 모든 것을 삼키는 괴물 아무트(Ammut)에게 넘겨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몸과 영혼을 파괴되고 다시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이집트인에게 다시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대다수 이집트인들은 부유한 사람이든 아니든 자신들이 틀림없이 토트의 저울에 합격하여 아무트에게 넘겨지지 않는다고 굳게 확신하면서 죽었다. 즉 자신들이 이승에서 그렇게 심한 죄를 짓지 않는 한 죽어서 육신은 파괴될지라도 영혼은 오시리스 신이 거주하는 갈대밭으로 가는 길을 틀림없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집트인들이 고집스럽게 미라를 만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