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5) : 피라미드 건설(6)

Que sais 2021. 3. 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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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티 피라미드

자료에 따르면 테티 파라오는 우나스의 후계자로 제6왕조를 개창했다. 이는 테티가 우나스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티는 자신의 피라미드 묘역으로 사카라를 택했고 테티의 거처는 영원하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조세르 파라오의 묘역 북동쪽이다. 그의 묘역 전체는 제5왕조 후기의 피라미드를 그대로 따랐는데 우나스 피라미드와 크기가 동일하다. 공간구성이나 부조의 내용도 그대로 받아들였고 세부사항에서 변화를 주었다.

한편 신전 마당에 있는 식물 기둥은 지주 형태로, 제4왕조의 양식으로 교체했고 인접 공간과 창고의 수 및 배열 역시 바뀌었다. 묘실 규모는 다소 컸으며 자재는 매우 화려한 것을 사용했다.

여기서는 벽뿐만 아니라 석관에까지 피라미드 텍스트를 기록했다. 이곳의 텍스트는 죽은 파라오들을 그 어머니인 여신 누트의 몸 안에 머무르는 신으로 거론한다.

 

테티 1세 피라미드

그런데 테티의 피라미드 텍스트는 상당히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지하에 새겨진 14개의 벽 중 6개가 파괴되었다여기에는 매장실과 대기실의 북쪽과 남쪽 벽이 포함되어 있는데 현관의 벽 부분은 완전히 사라졌다.

테티의 피라미드 텍스트는 우나스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벽의 면적이 작아 모든 의식 전체를 담을 수 없어 동쪽 벽의 북쪽 끝에도 계속된다. 매장실의 서쪽 벽에는 박공 지점에만 새겨져 있다. 석관의 내벽과 뚜껑에도 주문이 적혀있다.

무덤에서 중요한 희생 의식의 호출은 북쪽 벽에 있으며 박공에는 우나스처럼 사자가 필요한 필수품들에 대한 주문이 적혀있고 매장실의 남쪽벽에 부활주문이 적혀있다. 매장실에서 대기실로 가는 통로에 개인 주문들이 계속 적혀있고 이는 서쪽과 동쪽 벽으로 이어진다. 특히 서쪽 벽에는 사자에게 보내는 새로운 텍스트가 새겨져 있으며 그의 영혼이 무사히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텍스트는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문을 통과하도록 호루스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끝난다.

테티의 피라미드 북동쪽에 두 개의 왕비 피라미드가 서 있다. 그 중 북쪽 피라미드는 후계자인 페피 1세의 어머니 이프트 1세 왕비의 것이며 그녀의 미라가 지하 묘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역은 특별한 건축사를 보여준다. 학자들은 그녀가 우나스의 딸로 추정하는데 이는 그녀가 제5왕조 왕실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피라미드 지하의 형태와 구조를 보면 원래 마스터파였는데 아들 페피1피라미드로 개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정치적인 격변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테티가 사망한 후 우세르카레 파라오의 짧은 재위기간이 뒤따랐는데 학자들은 그가 파라오 찬탈자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이집트가 혼란에 빠졌는데 페피 1가 권력을 잡고 질서를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피 1세는 자신이 적통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모후의 신분에 알맞게 대우해주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페피1세가 어머니의 무덤인 마스터파를 피라미드로 개축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프랑스 학자들이 페피 1 피라미드 남쪽에서 일곱 개의 왕비 피라미드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당과 카 피라미드, 창고와 부속시설이 딸린 작은 묘역들이다.

이중에는 페피 1세의 부인이자 페피 2의 어머니인 안케네스페피 2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녀는 메렌레 파라오의 짧은 통치 후에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녀의 아들은 6살에 즉위하여 6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린 덕분인지 안케네스페피 2세의 묘실은 그야말로 화려한 실내장식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다른 왕비의 묘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

더불어 왕비라는 직함 이외에 게브의 딸’, ‘여신 누트의 딸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비문에는 이 두신이 지평선 또는 천상에 아름다운 자리를 약속한다. 석실의 이런 내부 장식을 볼 때 안케네스페피 2세는 그때까지 파라오에게만 주어졌던 신분으로 승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피 1

페피 1의 피라미드는 심하게 파손되었는데도 이집트에서 가장 잘 재건된 피라미드 중 하나다. 피라미드 신전은 평면에 있어 커다란 변화없이 사후레 파라오 이래로 통용되는 도식을 따랐다. 피라미드는 현재 겨우 12미터 높이인데 이 피라미드를 이집트가 재건한 것은 피라미드 텍스트때문이다.

페피 1세의 피라미드는 고왕국에서 가장 충실한 피라미드 텍스트를 보여주는데 전실의 서쪽 벽에서 하강 통로까지 새겨져 있는데 페피 2세의 피라미드보다 거의 10% 더 많으며 우나스의 피라미드보다 약 3배가 더 많다.

페피 1세의 피라미드 텍스트를 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문의 표시 및 내용에 새로운 시도를 했고 대부분 그의 후계자들이 이를 준용했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서 26개의 벽에 피라미드 텍스트가 새겨졌는데 11개만 손상되지 않았다.

그런데 프랑스의 연구팀이 파괴된 부분의 거의 모든 파편을 재건했다. 결과적으로 텍스트의 거의 모든 부분의 해득이 가능하다.

매장실의 서쪽 끝은 왕의 영혼을 신에게 추천하는 주문이 적혀있고 동쪽 부분 거의 전부는 희생과 휘장 의식을 담았다. 다른 피라미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기실의 서쪽 벽은 영혼이 제길로 들어가는 것에 관한 내용을 적었으며 아침의식이 통로에 그려져있다.

 

페피 1세 피라미드

대기실의 동쪽 벽은 갓 태어난 영혼을 위해 몸을 추스르고 재생을 보호하는 주문에 전념하며 대기실의 북쪽 벽에는 영혼이 대기하던 곳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적었다.

남쪽 섹션에 영혼에게 보내는 두 가지 주문이 들어있다. 이들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영혼의 천국 여행에 관한 것이며 북쪽 섹션에는 서쪽 벽에 설명된 주문이 재현되고 동쪽 벽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주문들이 들어있다.

현관의 남쪽 벽에는 무덤의 주인의 조각상에서 수행되는 의식에 대한 주문과 영혼이 문을 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주문이 적혀있다. 한편 현관의 서쪽과 동쪽 벽에는 이 공간을 매일 통과하는 영혼을 위한 일련의 주문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서쪽 벽의 북쪽에서 동쪽 벽의 남쪽까지 황혼 무렵 무덤으로 영혼이 다시 들어가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동쪽 벽의 북쪽 끝은 새벽에 영혼의 부활을 다루며 방의 북쪽 끝에 있는 문 경비원에게 안전한 통과를 주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페피1세의 내부

페피의 피라미드가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텍스트의 충실함이다. 한마디로 피라미드의 거의 모든 부분이 피라미드 텍스트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왕국 피라미드>

페피 1세를 이어 페피 2세는 자신의 매장지를 보다 사카라 남쪽인 엘파라운 인근에 잡았다. 이 피라미드는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신전 마당 벽은 아무런 장식 없이 비어 있었지만 기둥에는 신과 교류하는 파라오의 모습을 새겼다. 페피2의 피라미드 주변에는 세 개의 왕비 피라미드가 있다.

그런데 페피 2세가 피라미드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긴 통치기간이 끝나면서 피라미드 시대 또한 막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집트 상하양국의 통일이 와해되자 더 이상 기념비적 무덤이 건축되지 않았다. 물론 3왕조부터 제8왕조의 고왕국 중 8왕조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던 이비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지만 피라미드 텍스트로 장식한 이 작은 피라미드를 제외하면 고왕국 후대에 더 이상 발견된 피라미드는 없다.

여하튼 이집트 역사는 계속되는데 제9왕조와 10왕조는 제1중간기로 불릴 정도로 격변의 시대임으로 변변한 피라미드가 건설되지 않았는데 이집트가 재통합된 중왕국인 제11왕조에서 제12왕조에 피라미드가 다시 등장한다.

중왕국 시대의 11왕조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테프 2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하 이집트의 재통일로 시작된다. 그는 호루스의 새로운 이름으로 두 땅을 통일하는 자'라는 뜻의 스마토위를 자신의 칭호로 택했다.

통일은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주어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멘투호테프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은 멘투호테프 3세는 누비아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를 거쳐 홍해로 이르는 길을 재개척했다.

상 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헴네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메헴네트아문을 수호신으로 하는 테베 출신이었으나 이집트 전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멤피스 남쪽에 새로운 도시로 두 땅을 쥔'이라는 뜻의 이트타위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누비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일의 제2폭포'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아시아인들의 델타 지역 침입을 막기 위해 와디 툼밀라트에 '통치자의 성' 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과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문화와 사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헴네트 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헴네트 4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이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이집트 문화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했다.

그런데 제11왕조와 12왕조는 제1중간기를 겪은터라 파라오의 지위와 숭배는 뚜렷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군주들이 인간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파라오 묘역의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 당시 왕가의 무덤은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고왕국 시대의 다양한 건축구조와 피라미드 시대 건축 양식들의 재발견과 새로운 창조의 병존이다. 이는 고왕국의 건축적 전통을 찾아가면서도 테베의 건축 개념도 접목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중간기의 광폭한 시대를 거친 반동으로 고왕국으로의 회귀는 내세관 특히 무덤 건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피라미드 묘역은 오시리스 숭배와 관련있는 아비도스의 건축모델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