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6) : 피라미드 건설(7)

Que sais 2021. 3. 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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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왕조 시대에 네크로폴리스가 부상하는데 이는 제1왕조의 제르 파라오(기원전 29992952)의 무덤오시리스의 무덤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당시 성지 순례지로 대우받았고 이집트인들은 이들 주위에 묻히기를 원했다. 물론 모두 오시리스 신의 인근에 매장될 수는 없으므로 적어도 그 자리에 건축물이나 봉헌물, 입상 또는 비문을 세워 이런 소망을 대신하고자 했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의 무덤을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으로 생각했다. 그 섬 위에 죽음의 신이 관 속에 누워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부활 사상의 약간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태초의 언덕에 대한 사상이다. 이 언덕은 세상을 창조할 때 태초의 대양에서 떠올라 새로운 생명의 토대인 대지를 의미한다. 이집트인들은 범람하던 물이 물러가고 난 뒤 새롭고 기름진 대지가 떠오르는 이런 장관을 해마다 경험했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신의 무덤을 나무로 장식하여 내세관에 대한 기본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오시리스는 식물계의 주인이자 매번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오시리스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 때 기준이 되었다. 실제로 몇몇 파라오의 무덤에 나무와 관목을 심었다. 오시리스가 식물에 대한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하실 구조 즉 피라미드의 통로와 묘실에도 오시리스에 관련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몇몇 묘역은 구불구불한 통로의 흐름을 건축으로 옮겼다. 특히 묘실을 홍수로부터 솟아오른 태초의 언덕으로 보이도록 했다. 묘실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관에 파라오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리고 지붕은 압력분산용 박공지붕 위에 벽돌로 만든 지붕을 추가했다. 이는 건축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태초의 언덕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가짜 건축이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전통적인 피라미드 방식으로 건설하는데 충분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세소스트리스 3다슈르에 자신의 피라미드 묘역을 건설하면서도 아비도스에 피라미드가 없는 묘역도 축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라미드가 없는 아비도스의 묘역에 실제로 세소스트리스 3가 묻혔다.

고왕국과 비교해서 건축적인 면에서도 피라미드의 변화가 일어났다. 아멘호테프 1가 새로운 수도인 이티타이를 세우면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기술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한마디로 제1중간기의 혼돈으로 피라미드 건축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 자체의 규모가 작아지는 것은 물론 고왕국 시대 피라미드보다 경사각이 낮았다. 중심 건축물의 벽 역시 다른 구조다. 피라미드 외벽의 내부에 별 모양의 석조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세웠다. 더불어 굽지 않은 흙벽돌도 사용했다. 흙벽돌은 세소스트리스 3세 때부터 피라미드 본체를 구성하는 유일한 자재가 되었다. 또한 흙벽돌은 참배로, 주벽, 주택, 관리 시설 등에도 사용했다. 그러나 외벽은 계속해서 양질의 석회석으로 만들었고 특히 신전은 내구성이 뛰어난 돌을 사용했다.

 

아메넴헤트 1세

학자들은 큰 틀에서 중왕국의 12왕조를 마지막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기원전 2119년부터 기원전 1794년까지의 약 350년 동안 고대 피라미드가 다시 부활했다는 뜻으로 12왕조에서 건설된 중요 피라미드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아메넴헤트 1(기원전 1991기원전 1962)

아메넴헤트 1(Amenemhat I 또는 Amenemhet I)이집트 왕국의 황금기라고 설명되는 12대 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로 기원전 1991년에서 기원전 1962년까지 거의 30년을 지배했다아메넴헤트는 전임 멘투호테프 4세의 장군으로 추정하는데 학자들은 멘투호테프 4세가 아메넴헤트 1세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여하튼 아메넴헤트 1는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으며 일부 문학 작품 즉 네페르티의 예언아메넴헤트의 지시문은 그의 통치의 정당성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메넴헤트 1세는 수도를 테베에서 이트타이로 옮기고 그의 첫 번째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피라미드 건축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고왕국의 피라미드 전통을 따르지만 테베의 건축양식도 가미했다. 우선 계곡신전으로 이어지는 부조 장식의 참배로에서 지붕은 설치하지 않았다. 피라미드와 서쪽 신전은 서로 분리된 채 다른 높이의 테라스 위에 세워졌는데 일부 학자들은 테베의 건축 양식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피라미드는 고왕국처럼 비스듬한 입구 통로가 피라미드 중심 아래에 위치한 작은 대기실에서 끝난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서쪽 석실로 가는 통로가 없으며 수직 갱도는 밑으로 향하다가 지하수와 만난다. 현재 지하수위가 높아 발굴이 중단된 상태인데 피라미드에 새겨진 부조를 볼 때 그의 원래 신전을 후손인 아메헴네트 2가 개축했다고 본다.

 

세소스트리스 1(기원전 1971기원전 1926)

세소스트리스 1(Sesostris I)12대 왕조의 2번째 파라오다. 그는 기원전 1971년부터 기원전 1926년까지 통치했는데 그 기간이 무려 45년이나 된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아메넴헤트 1와 왕비 네페르티타넨(Nefertitanen)의 아들로, 누이인 네페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후계자 아메넴헤트 2세를 낳았다. 세소스트리스의 뜻은 우스레트 여신의 남자. 토리노의 파피루스에도 그가 45년을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소스트리스 1세

그는 12왕조의 창시자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로, 아메넴헤트 1세의 재위 20년부터는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사누헤 이야기에 따르면, 세소스트리스가 리비아인과 전투를 벌이던 재위 30, 아메넴헤트는 살해당했다.

이 정보를 들은 그는 곧바로 수도로 돌아가 쿠데타를 진압하고 파라오가 되었다세소스트리스 1세와 아메넴헤트 1세 기간은 이집트 문학과 건축 문화가 최절정에 달한 시기로 평가된다. 국토 전역에서 금광과 채석장이 개발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스완에 이르기까지 수십 곳에 기념물을 건설했다. 재위 30년을 기념하여 헬리오폴리스에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20미터에 달하는 붉은색 오벨리스크를 두 개 세웠는데 그 중 하나는 아직도 남아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세소스트리스를 소재로 한 사누헤 이야기아메넴헤트의 가르침 두 편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그는 이집트 파라오의 관례대로 아들 아메넴헤트 2세와 공동통치했다.

그는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 남쪽인 -리슈트(el-Lisht)세소스트리스는 두 나라를 바라본다라는 이름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그의 피라미드는 어떤 특정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다양한 묘역들의 혼합체 즉 피라미드 묘역의 고전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지붕이 있는 부조 장식의 참배로, 입구 홀, 열주 마당, 입상을 보관하는 방, 장제신전과 남동쪽 모퉁이의 숭배용 피라미드가 그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라미드는 구상 단계부터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참배로 윗부분의 양쪽 벽감에 파라오의 오시리스 입상들을 세워놓아 신전의 내세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상들은 이집트 문화의 후기에 이르기까지 파라오의 신전 건축의 기본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아메넴헤트 1가 자신의 피라미드 핵심 건축물을 암석 덩어리를 사용하여 대충 불규칙하게 사용하면서도 내부에 튼튼한 울타리로 만들어진 별 모양의 골조를 세워 안정적인 구조를 이뤘다. 이 별모양의 구조물 내부에 공간을 가로지르는 몇 겹의 울타리가 더해져 총 3개의 좁은 빈공간이 생겼다. 이 공간을 그는 암석과 돌조각 그리고 모래로 채웠다.

완공시 이 건축물은 길이 105미터로 고왕국의 거대 피라미드에 필적한다. 하지만 경사각은 4924으로 낮은데 이는 고왕국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다. 아쉬운 곳은 이곳도 묘실이 지하수에 잠겨있어 발굴이 보류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소스트리스 1세의 묘역에서 눈에 띄는 것은 9명이나 되는 왕비들을 위한 작은 위성 피라미드. 이들이 파라오의 묘역을 감싸고 있는데 고왕국의 위성 피라미드보다 기본적으로 간소하다. 가장 큰 것이 아메넴헤트 2세의 어머니이자 제1왕비인 네프루의 피라미드인데 토대의 길이는 21미터, 63도의 기울기에 높이는 대략 20미터다.

모든 위성 피라미드는 동쪽의 작은 성소와 예배당을 갖추었고 주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모든 예배당은 내부를 부조로 장식했다. 매장 구역은 흔히 좁은 수평통로로 건설되었으며 석관이 보관되어 있고 작은 옆방에 돌로 만든 캐노픽 함이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