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7) : 피라미드 건설(8)

Que sais 2021. 3. 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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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넴헤트 2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아메넴헤트 2(기원전 1876기원전 1842 재위)아버지인 세소스트리스 1세와 함께 공동 통치를 하였으며, 누비아와 시나이에 원정군을 보내 구리와 금을 찾았다. 특히 푼트 지역과 무역을 활발히 했는데 여기에서의 푼트는 에티오피아.

특히 그의 동상이 시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발견되고 상()이집트의 도시 타우드에 있는 한 신전에서 그 시대 유품이 발견되었는데 크레타와 시리아 양식이 접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크레타에서 내세보다는 현세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이는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설명한다.

멤피스 남쪽의 다슈르에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전설적인 고왕국의 스네푸르 파라오의 두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다. 진흙벽돌로 벽을 세우고 잡석으로 중심부를 만든 뒤 그 위를 질 좋은 석회암으로 덮었다. 이 피라미드는 하얀 피라미드로 불리는데 또 다른 이름은 아메넴헤트는 수심에 차다. 이는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한 암석 채취에 남다른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죽한 사각형 형태인 이 피라미드의 동서방향은 그의 통치기간에 피라미드 묘역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지하 묘역은 고왕국 시대의 전형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 중앙에 있으며 묘실은 위에서 누르는 피라미드 본체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박공지붕을 했다. 그런데 묘실 벽에 네 개의 벽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고왕국의 피라미드에 있던 세르답이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메넴헤트 2세(루브르박물관)

석판으로 만든 석영암 관은 묘실 서쪽에 놓였고 튼튼한 벽이 받치고 있다. 석실 중앙부터 수직으로 내려가 안쪽 깊숙이 위치한 직사각형의 공간에 이르는 갱도 역시 새로운 것이다. 이 공간 바닥에 정사각형의 구덩이를 파놓았는데 아마도 파라오의 캐노픽 함을 매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의 의미는 석관과 캐노픽함을 분리했다는 점이다. 고왕국 시대에 석관과 캐노픽은 항상 같은 방 바로 옆에 나란히 배치했다. 그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딸의 보석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이집트의 예술 수준을 잘 보여준다.

 

세소스트리스 2

12왕조의 4번째 파라오인 세소스트리스 2(기원전 1897기원전 1878)파이윰(Faiyum) 오아시스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엘라훈(El-Lahun)에 제방과 배수로를 건설하여 재배 가능한 토지를 늘렸다.

그는 엘라훈에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의 파라오 묘지를 다슈르에서 엘라훈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후 13왕조에서도 정치적 수도가 된다. 그의 피라미드는 정통 피라미드가 지닌 모든 특성을 보여준다.

이 피라미드는 동쪽과 북쪽에 사당을 갖고 있으며 벽감 장식이 있는 석벽과 외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왕비 피라미드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소형 피라미드가 배장되어 있고 계곡 신전과 피라미드 도시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에 수 천명의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전통에서 몇 가지 새로운 점이 보이는데 이것이 추후 파라오 무덤 건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우선 동쪽과 남쪽에 빽빽하게 42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서쪽도 많은 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오시리스 무덤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더불어 이 피라미드는 최초로 입구를 북쪽에 두지 않았다. 북쪽에는 전통적인 작은 예배당만 설치되어 있다.

입구가 변경된 것은 도굴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되는데 학자들은 이는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입구를 옮겼다고 도굴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입구를 옮긴 것은 상징적인 은폐, 즉 오시리스의 무덤이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장소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피라미드 입구 통로는 왕녀들의 무덤 아래에서 시작한다. 왕녀들의 무덤 입구 갱도는 남쪽 피라미드 마당 안쪽이자 석조 주벽 바깥쪽에 위치한다. 박공지붕에 내장재로 화강암을 사용한 묘실은 고왕국 시대처럼 피라미드 중심부 아래에 자리하지 않고 피라미드 토대의 남동쪽 구역에 있다. 묘실을 감싸고 도는 통로는 묘실을 주변의 암석으로부터 분리하고 묘실이 섬과 같이 고립된 장소임을 강조한다. 이곳에 오시리스가 된 세소스트리스 2가 잠들어 있다.

큰 틀에서 세소스트리스의 피라미드는 단단한 화강암 장례 사원과 건물의 복합체로 건설되었는데 진흙벽돌을 사용했음에도 건설하는데 최소한 15년에서 20년의 건설 기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대체로 10년 정도 통치했다고 추정하므로 그의 피라미드 건설에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후계자가 계속 건설해주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그의 통치가 생각보다 길었을수도 있다. 현재 그의 피라미드는 외벽이 벗겨져 벽돌로 쌓은 중심부만 남아 있다.

 

세소스트리스 3

세소스트리스 3(기원전 1878기원전 1841)도 거의 40년이나 통치했는데 12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파라오로 인식한다. 그는 유럽 일부 지역으로 군사 원정대를 이끌어 스키타이인과 트라키아 인을 정복했다. 특히 루마니아 및 불가리아, 콜치스강 인근식민지로 만들고 귀국했다.

이러한 원정과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무역 및 도시를 개발하고 공예품을 활성화시켰고 당대 각 지역에 발호한 토후들의 힘을 감소시켰다. 그의 이러 업적은 이집트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어 집권 내내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소수의 파라오 중 한 명이다.

그의 피라미드는 다슈르의 가장 북쪽에 있으며 스네푸르의 붉은 피라미드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그것은 평평한 땅에 세워졌는데 기초 초석은 흰색 투라 석회암이지만 근본은 진흙벽돌인데 동시대의 모든 피라미드들을 압도한다.

고대 건축을 기본적으로 답습하지만 새로운 건축 도입은 몇 번의 증축을 통해 이루어졌다. 건축사적으로 볼 때 고왕국과 신왕국 사이를 잇는 왕실 건축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인식한다.

처음에는 세소스트리스 3세도 묘역을 간소하게 짓기로 결정했다. 묘역은 석조 주벽과 벽감이 배치된 거대한 벽돌 해자로 둘러싸여 있지만 선조의 피라미드와는 달리 핵심부에 안정적인 석벽 구조물은 설치하지 않았다. 전체를 점토벽돌로 축조했지만 하얀 석회암을 입혔다.

피라미드 입구는 서쪽 벽의 북쪽 구간에 있다. 입구 통로는 건물 지하까지 연장되어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꺾인다. 내부 공간의 배열은 기본적으로 고왕국 후기 지하 묘역의 구조를 따랐다. 압력과 하중을 경감하기 위해 둥근 천장의 화강석 묘실 위에 박공지붕을 씌웠다. 박공지붕은 대체로 30톤 정도의 석회암 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위에 또 하나의 벽돌 궁륭을 설치했으며 묘역의 상층부는 피라미드 구조다.

그런데 이들은 지하시설과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라미드는 매장 시설의 위치만 표시했고 한 사람에 하나의 매장 시설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북쪽 마당에 4개의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그 아래로는 복층으로 된 지하 갤러리 체계를 갖추었다. 그 안에 적어도 12명의 미라가 있는데 왕비도 포함되었다.

고왕국의 피라미드 전통에 맞게 남쪽 마당에 세 개의 위성 피라미드를 세웠다. 이들은 외형적으로 고대 무덤 구조를 재현했지만 실제 지하시설은 고대 시대에 비해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다.

서쪽 피라미드의 입구 갱도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마당 내부에 위치한다. 여기서부터 난 통로가 남쪽으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서쪽 위성 피라미드까지 연결된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에 매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 통로는 바닥 갱도에서부터 지하를 통해 곧장 북쪽에 있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남서쪽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웨레트 왕비의 묘실 앞 대기실에서 끝나는데 이런 왕비들의 묘역의 건축구조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이런 형태는 고왕국의 조세르 파라오의 무덤 건축이후 처음으로 왕비파라오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묘실에 다시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피라미드 중 중간 피라미드 중심부에는 약 11미터 깊이의 갱도가 있는데 이는 석회암 묘실로 이어지고 이 묘실에는 4개의 설화석고 캐노픽을 담은 화강암 함이 놓여있었다. 이는 왕족의 내장을 담아두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3차 건축 계획으로 북쪽과 남쪽에 있는 원래의 피라미드 묘역은 192x299미터의 엄청난 크기로 확장되었다. 전체적으로 고왕국의 조세르 피라미드 묘역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긴 통치기간 세소스트리스 3는 또 다른 무덤을 건설했다. 그동안 가짜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근래 놀랍게도 피라미드가 없는 이곳 묘역에 실제로 세소스트리스 3세가 묻혔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석조 사당을 건설하여 그 주변을 주택과 창고 그리고 성직자와 신전 관리들을 위한 생활시설들을 둘러쌓았다. 이 계곡 건축물에서 곧은길이 서쪽으로 사막까지 나서 거대한 T자형 묘역에 다다른다. 상당히 많은 안전장치와 가짜 통로 및 막힌 통로를 설치했고 석관은 미완성의 통로 끝에 있지 않고 연결공간의 북쪽 벽 뒤에 담으로 보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굴꾼들이 이 숨은 장소를 찾아내 모든 부장품들을 도굴했다.

1894년 프랑스 이집트 학자 자크 드 모르간 박사가 도굴꾼이 만든 터널과 묘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