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59) : 피라미드의 보물(1)

Que sais 2021. 3.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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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는 것은 피라미드 안에 부장되었을 보물의 행방이다.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1200여년 후에 도굴되지 않고 발견된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세계인을 놀라게 한 보물이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견준다면 쿠프의 피라미드에는 엄청난 보물이 부장되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실 투탕카문의 무덤은 이집트 파라오 묘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다.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를 볼 때 생전에 자신이 들어갈 피라미드를 완성한 파라오는 거의 없다. 파라오로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더라도 대부분 자신의 피라미드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이다. 이 경우 후임 파라오는 곧바로 선왕의 피라미드를 계획대로 완공하지 않고 매장한 후 자신의 피라미드 건설에 몰두한다.

그런데 쿠프는 20여년 이상 대피라미드를 건설했으므로 여건이 좋았다. 쿠프는 자신의 거대한 피라미드 인근에 계곡의 사원, 하늘 계단, 제물의 사원복합 장례 건물 등 핵심적인 사원도 완성했기 때문이다.

 

계곡의신전과 대피라미드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프의 장례는 그야말로 피라미드 건설의 규범이나 마찬가지다.

파라오인 쿠프가 죽자 매우 꼼꼼한 절차에 의해 영생의 길로 들어간다. 우선 부활의 제1으로 미라로 만들어진다. 미라를 만드는 기간을 대체로 270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수태기간270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270일간에 걸쳐 미라를 만듬으로써 파라오는 신의 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론 미라 자체를 만드는데는 대체로 70 정도로 추정한다.

미라는 태양의 배에 실려 나일 강변 계곡의 사원으로 옮겨진다.

통나무처럼 생긴 석회석 사원의 잔해가 최근 기자 평원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이시스 등 두 여신의 조각상이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배에서 미라가 내려지면 승려들이 주문을 외고 향을 피우는데 이 의식은 여신들이 부활한 아기 쿠프에게 젖을 먹인다는 의미.

그런 다음 장례 행렬을 따르는 무리들이 하늘 계단을 오른다. 하늘 계단은 계곡에서 위쪽 사막까지 820미터나 솟아 있는데 지금은 현무암 계단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큰 쿠프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라는 불멸에 이르는 문턱으로 간주되는 이 사원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미라도 배고픔에 시달린다는 것이 당시 이집트인들의 근본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식사는 집전하는 승려가 사원 생필품 저장 창고에서 향료를 꺼내 사자(死者)에게 권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기운을 얻은 미라는 장례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다. 경사면을 통해 쿠프의 미라는 피라미드 입구로 옮겨지는데 입구는 지상에서 17미터 높이에 있다.

미라석관에 내려놓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대피라미드의 구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재 파라오의 방으로 알려진 곳에 있는 석관은 도굴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나오는 이유다.

일단 석관에 미라가 안치되면 폐쇄용 돌덩이가 분리되면서 파라오의 안식처와 외부가 완전히 차단된다. 혹자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이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쿠프와 함께 매장되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 작업에 투입된 사람들은 사전에 준비된 통로를 통해 외부로 나올 수 있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원래 명칭이 아케트 쿠프(Achet Khufu). ‘쿠프의 서쪽 지평선이란 뜻인데 고원 위에 우뚝 서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일 전부터 아득히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스네프루를 이은 쿠프(기원전 25512528년 재위) 때부터 피라미드의 석조술은 더욱 발전하여 쿠프, 케프렌, 멘카우레3대 피라미드 즉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그런데 세계7대불가사의 중에 피라미드가 포함되지만 이 피라미드가 정확하게 어느 것을 의미 하느냐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집트에는 기자 지역의 3대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대형 피라미드가 수없이 많이 있으며 필론이 똑 집어 피라미드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7대불가사의로 언급되는 피라미드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전체를 의미하거나 3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쿠프와 크기가 거의 비슷한 케프렌의 대피라미드를 뜻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필론이 거론한 문맥을 보면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언급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피라미드가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므로 주인 쿠프는 누구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쿠프를 폭군으로 혹평했다. 쿠프가 신전을 폐쇄하고 이집트인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며 오직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쿠프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기록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대피라미드에 관한 체계적 정보를 수집한 첫 방문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기자를 방문했지만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는 거의 2000년이나 지나서였다. 입구가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와 대화한 이집트인들의 말을 근거로 대피라미드는 폭군인 쿠프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무덤이었다고 적었다.

일꾼들이 짧은 널판지로 된 기계로 거대한 돌들을 벽에 따라 조금씩 들어 올렸다고 했는데 이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또한 주요 공사가 끝난 후 표면을 덮은 돌들은 상부로부터 하부로 내려오면서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 거의 전부 틀렸다고 단언해서 말한다.

그는 피라미드 건설을 위해 항상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3개월씩 교대로 노역에 동원되었고, 피라미드를 짓는 기간은 총 20년이라고 했다. 헤로도토스가 밝힌 이들 숫자는 오랫동안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 수 산정의 토대가 되어 피라미드가 억압과 고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에 의해 쿠프의 피라미드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줄잡아 약 12,00015,000명이며 병참 등을 고려할 때 그중 4분의 1만 피라미드 공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너무 많은 노동자가 동시에 공사에 참여하면 서로 진로를 방해하여 오히려 건설 공정을 상당히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계산은 페트리 경노동자 숙소 발굴로 더욱 신빙성이 커졌다. 피라미드 인근에서 노동자 약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대피라미드 축조 당시 이집트의 인구를 100만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정하므로, 헤로도토스의 20만 명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과장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특히 3마다 바뀌었다는 것은 피라미드 건설은 범람이 있는 3달 정도만 건설했기 때문으로 나머지 기간은 농사를 지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시기를 실제보다 1300년에서 1500 후대로 기록하여 신빙성을 더욱 저하시켰다. 이는 그가 피라미드 건설 후 무려 20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집트인들이 설명한 연대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적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쿠프를 폭군으로 혹평했지만 여러 자료에 의하면 쿠프는 이집트인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인정이 많은 현명한 군주였음을 발견한다.

이는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자부심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피라미드 내부에 적힌 낙서를 보면 노동자들이 파라오를 위해 일한다는 데 무척 자부심을 가졌으며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노동자가 피라미드 안에 남긴 낙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누구 한 사람 지치는 일도, 목마르는 일도 없었다. 작업이 끝나면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마음껏 먹고 마셨다.’

 

피라미드 안에 적힌 낙서에는 장사 작업대’, ‘끈기 작업대등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도 쿠프가 폭군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쿠프는 왕비인 메리트요테스와의 사이에서 후계자인 제드프라와 케프렌(쿠프와 형제라는 설도 있음)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쿠프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는 쿠프의 유일한 조각상이 있다.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소형 조각상인데 피라미드에서 남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아비도스에서 발견했다.

유명한 이집트 학자 페트리경이 토목공사 중에 목이 떨어진 조그마한 조각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쿠프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조각의 머리가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 페트리는 수십만 톤의 모래를 체로 걸러서 찾아냈다고 한다. 이 조각상의 인물을 보아도 쿠프는 매우 인자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조각상이 정말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인지 논란이 일었다. 쿠프라고 적혀있는 조각만을 근거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로 쿠프를 확정할 수 있느냐이다. 이 문제는 파라오 현실 천장에 남겨 놓은 다음 낙서에 의해 확인되었다.

 

우리는 우리들의 위대한 파라오 크눔 쿠프의 이름으로 이 피라미드를 완성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이를 통해 대피라미드가 쿠프 파라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여하튼 헤로도토스 다음, 시실리의 디오도로스가 대피라미드에 대해 적었다. 그는 헤로도토스보다 더 많은 36만 명의 인부가 20년 동안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적었다.

스트라보는 이집트에 머물면서 이집트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는데 3대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작은 피라미드로 다소 경시되던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에 대해 적었다.

대피라미드라플리니우스도 제외할 수 없다. 그는 쿠프가 자신의 재산을 그의 후계자나 라이벌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그 돌들을 아랍에서 갖고 왔다고 했다. 그가 적은 대피라미드 각 변의 길이는 231.53미터로서 실제와 거의 같지만 높이는 214.38미터로 적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에 정확하게 높이를 잴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역시 36만 명의 노동자가 20년 동안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스트라보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