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60) : 피라미드의 보물(2)

Que sais 2021. 3. 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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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나는 시기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후부터 11세기까지의 500년 간 서유럽은 대체로 암흑시대였다.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접촉이 없었던 서유럽과 아랍세계는 12세기에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접촉한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 발명된 제지법, 인쇄술, 나침반과 같은 중요한 기술이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특히 나침반의 전래는 원양 항해에 대한 욕구를 드높였고, 부수적으로 따르는 과학적 연구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해 항해와는 달리 먼바다로의 항해에는 천체 관측과 해도(海圖)가 필요하므로 정밀한 천문학적 지식과 지리학, 배 위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구의 개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면서 활과 칼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던 유럽의 기사계급이 몰락한다. 또한 화약과 대포는 유럽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포에 의해 탄환이 날아가서 폭발하자 이 현상을 실제로 분석할 필요가 생겼다. 화약의 폭발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학과 물리학, 폭발력의 연구에서 증기 기관의 아이디어가, 포신 제작을 위해서 제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탄환의 운동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동력학이 등장했고, 이것은 수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과학 기술이 발달될수록 무게와 길이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지도를 만드는 것도 급선무였다.

수많은 학자들이 척도의 기본 단위가 적혀 있을 고문서들을 뒤졌다. 곧바로 이집트에 건설되어 있는 신비의 피라미드가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피라미드야말로 그들이 찾고 있는 도량형의 척도라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대피라미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대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간 나폴레옹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가 이집트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7987나폴레옹의 군대는 기자의 대피라미드 부근에서 맘루크(아랍의 토착 귀족)들을 정벌한 후 함께 원정에 참가한 프랑스 학자들에게 대피라미드의 비밀을 파악하도록 요청한다. 수학자 몽즈도 이 원정대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세제곱미터나 되며 이것만 갖고도 프랑스의 국경을 3미터의 높이에 0.3미터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집트의 원정에 참가한 프랑스 과학자들이 귀국하여 이집트에 대한 자료를 속속 발간하자 곧바로 이집트에 대한 신드롬이 일기 시작했다. 고고학자들간에 미라, 조각, 오벨리스크에 관한 논쟁이 붙었고, 화가들은 그림의 배경으로 이집트의 각종 풍물을 그렸다. 황실의 재봉사도 이집트 문양을 사용했으며 장인들은 가구에 스핑크스와 악어를 조각했다.

영국의 귀족 해밀톤의 10대 공작 알렉산더는 스스로 미라가 되었다. 미국 역시 그 물결을 타고 테네시 주에 하이집트의 수도와 같은 이름인 멤피스라는 도시가 생겼고 1880년에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장식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오벨리스크를 수입했다.

 

대피라미드의 구조

'석기시대를 막 거친 원시시대에 지나지 않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기념물을 건설하였을까는 그동안 많은 학자들을 괴롭혔다. 바퀴도 발명되지 않았고 말이나 노새 등 하역 동물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에서 수레가 알려진 것은 대피라미드를 건설한지 약 300여 년이 지나서부터로 인식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의 밑변0.1퍼센트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피라미드가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면, 어떤 이유로 고대 이집트의 건축가들은 다른 문명에 비해 그처럼 앞선 지식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는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

대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모든 수치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에 최종적으로 내 놓은 보고서를 따른다. 대피라미드의 바닥면 길이는 남쪽 면 230.45미터, 동쪽 230.39미터, 서쪽 230.36미터, 북쪽 230.24미터다.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146.60미터로 확인됐고 기울기는 515035초다.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되었으며 무게가 거의 700만 톤에 달한다.

대피라미드의 내부는 건설 중에 최소한 두 번 계획이 변경되었다.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왕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두 개의 묘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면 상향 경사로와 하향 경사로로 나뉘는데 각도는 똑같이 26. 하향 경사로 끝까지 가면 첫번째로 계획된 장례방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지표면에서 약 30미터 하부에 있다.

이 장례방을 완성시키지 않고 제2의 장례방을 건설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른바 왕비의 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하로부터 21미터 높이에 있으며 5.76미터에 5.23미터의 직사각형에 천장은 궁륭으로 되여 있으며 높이는 6.26미터다. 이곳에서 수평 갤러리와 대회랑이 연결되는데 이 갤러리는 장례 후에 화강석으로 틀어막아 차단하였다.

대회랑은 길이 47.85미터, 폭은 기저 부분에서 2.09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높이는 8.5미터나 된다. 이 회랑을 거쳐 허리를 구부려야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의 끝에 입구를 폐쇄하기 위한 용도의 공간이 있다. 이것은 상향 통로를 경사지게 하여 화강석 석재가 미끌어져 내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대회랑을 따라가면 세 번 째 방인 파라오의 현실(玄室)에 도달하는데, 현재는 뚜껑이 없이 비어 있는 석관만 남아 있다. 쿠프의 현실은 지상 42미터 높이에 만들어져 있다. 현실의 입구는 좁은 통로이므로 쉽게 막아버릴 수 있다. 현실 자체는 폭 5미터, 길이 10.5미터, 높이 6미터인데, 천장은 총 중량이 400톤에 이르며 9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보다 특이한 것은 천체창이 있다는 것이다.

 

대피라미드 현실내 석관

1638년 영국의 수학자 존 그리브가 길이의 척도가 대피라미드에 숨겨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대피라미드 안을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쥐들이 살고 있었다. 낯선 인간들이 대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자 박쥐들이 공격해 총을 쏘면서 박쥐를 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혈액이 몸 안에서 순환한다는 것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박쥐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근거로 피라미드 어딘가에 외부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피라미드 현실에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20센티미터, 22센티미터, 길이 약 60미터의 환기 구멍이 있는데, 이는 피라미드 안으로 공기가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라가 환생할 때 숨을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환기구멍을 만든 것이다.

미국의 천문학자 트림블은 남쪽의 환기 구멍이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오리온자리 세 별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을 근거로 환기 구멍이라기보다는 천체창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완성된 천체창은 쿠프의 대피라미드에만 있다. 왕비의 방이라고 알려진 곳에도 천체창이 있으나 미완성이며 케프렌의 피라미드도 천체창을 계획하기는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대피라미드의 경우 4개 면 모두 각 표면의 중간이 약 90센티미터 정도 안으로 꺾여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데이비드슨 박사는 이러한 설계는 물이 흘러내릴 때 모일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이 피라미드 속으로 스며들거나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면 붕괴되기 쉬우므로 물이 쉽게 흘러 나갈 수 있도록 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피라미드의 건축에 많은 사람들이 찬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