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87) : 이집트를 다시 본다(3)

Que sais 2021. 3. 16. 20:05

https://youtu.be/9nbKzYE_zRA

고왕국시대 카토픽 단지(인간형+원숭이형))

 

<미라 제작의 변천>

미라는 이집트에서 350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정황이 시대에 따라 변하므로 미라 제작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는 이집트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초기왕조 시대

선사시대와 선왕조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주검을 사막에 그대로 매장했다. 그런데 이집트 사막의 특성상 주검이 자연스럽게 보존되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주검이 마스터파와 같은 벽돌로 만든 무덤에 묻히기 시작하자 모래와의 접촉을 통한 자연건조 과정이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주검을 보존하는 방법을 도출했다.

이 과정은 몇 백 년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미라는 무려 기원전 4400년이나 된다. 이에 의하면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현재부터 약 6500년 전으로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약 1000년 정도 내려 기원전 3500년 경으로 설명한다. 년대 차이에 너무 집착할 일은 아니다.

2왕조의 미라도 아부시르에서 발견되었는데 삼나무 진액 자국이 묻어 있는 아마천에 싸여 있었다. 이는 초창기부터 삼나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미라는 웅크린 자세. 이후 시대의 미라들이 곧게 선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차이가 있다.

 

고왕국 시대

1892메이둠에서 매우 놀라운 미라가 발견되었다. 미라의 주인공은 대피라미드의 주인공 쿠프의 동생라호테프(Rahotep)였다. 또한 1927년 쿠프의 어머니인 헤테페레스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그녀는 스네푸르 파라오의 부인이었지만 쿠프 대피라미드 옆에 묻혔다.

이곳에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장기가 담긴 카노픽 단지가 발견되었다. 헤테페레스의 장기인데 관은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지만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4왕조로 추정되는 미라들은 모두 왕족이었고 5왕조의 미라에 비로소 귀족들도 포함된다. 고왕국 시대에는 최상위 계층만 미라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중왕국 시대

중왕국이 되어서 미라 제작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당시 미라 제작의 성공도 즉 효율성이 매우 낮았다고 인식한다. 학자들이 이와 같이 추정하는 것은 미라 겉면에 삼나무 진액이 충분한 두께로 발라지지 않아 완전 탈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원료인 삼나무 확보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 삼나무는 레바논에서 가져왔는데 11왕조 때에는 파라오조차 삼나무 진액을 두껍게 바를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당연히 이 당시 미라 보존상태는 매우 나쁘다.

삼나무 진액 수급이 부족하자 보다 완벽한 탈수 방법을 찾았다. 바로 두개골에서 뇌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콧구멍으로 갈고리를 집어넣어 뇌를 부수어 꺼내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미라에서는 눈구멍이나 두개골의 아래쪽을 통해서 뇌를 꺼냈다.

그렇지만 이 방법으로 뇌를 완전히 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물질이 남아있는 경우도 보이며 머리뼈 안에 아마천을 뭉쳐서 넣은 것도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삼나무 진액에 적신 이 아마천박테리아, 곰팡이, 미생물, 기생충으로부터 시신을 보호해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마디로 미라의 보존 상태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신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에 비로소 미라가 크게 활성화 즉 대중화되었다. 왕족의 미라는 이 당시부터 옆구리를 절개하여 내장을 꺼냈다. 이 방식 덕분에 내장을 훨씬 꼼꼼하게 빼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시신에서 수분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삼나무 진액에 섞는 재료의 배합도 일취월장하여 미라의 피부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탈수가 완벽하게 되지 않으면 시신이 완전히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미라 제작자들은 풍채가 좋은 사람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아마천과 톱밥을 시신 안에 채워넣기도 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땅에 구덩이를 판 형태의 무덤에 묻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집트 기후의 특성상 무덤 속의 모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미라 보존상태가 왕족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 무덤에서도 상상키 어려운 귀중품이 발견되는 이유다.

 

3중간기

3중간기에는 아마천, 톱밥, , 모래, 기름 덩어리 등을 몸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 방법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작업도 만만치 않지만 부자들이 선호했다. 이는 생전 모습과 가장 유사한 미라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카노픽 단지에 내장을 보관하는 관습은 이 당시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내장나트론으로 방부처리하여 아마천으로 싼 뒤 가슴과 복부에 다시 넣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카노픽 단지 자체는 무덤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장기 보관용이 아니라 단순한 봉헌용이다.

사자의 시신을 가능한 한 생전과 비슷하게 만드는 방법이야말로 미라 제작이 발달하면서 이 당시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눈구멍에 인공눈을 넣었는데 대리석이나 석회석, 뼈 심지어는 아마천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미라 제작 마지막 단계에 천연 염료인 황토를 온몸에 발랐다. 남성의 몸에는 묽은색 황토, 여성의 경우 노란색 황토를 발랐다. 황토방부제 역할도 하지만 색은 종교적 의미도 갖는다. 붉은색 황토는 죽은 남자를 태양신 레와 결부시켰고 노란색 황토는 죽은 여성이 황금색 피부를 지닌 여신 하토르와 결부 시켰다. 물론 이런 조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었다.

 

미라 가면(로마 시대)

후기왕조부터 비잔틴 시대

이 당시 카노픽 단지가 다시 등장하며 장기들을 아마천으로 싸서 다리 사이에 넣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많은 그리스인들도 미라가 되었다. 새로운 방부제 처리 방식이 등장했는데 아마천을 붉은 삼나무 진액 등에 적셔 시신 안에 넣었다. 장기나 뇌를 아예 제거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끈끈한 삼나무 진액 덕분에 시체를 먹어치우는 풍뎅이나 구더기 등이 배 속에 갇힌 채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집트인들이 신에게 봉헌물로 바치는 동물미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인식한다. , 고양이, 악어, 따오기, 매 같은 동물들은 모두 방부처리되어 신에게 봉헌물로 바쳐졌다.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던 시기에도 미라는 계속 만들어졌는데 이 당시 삼나무 진액을 매우 두껍게 발라 방수 및 방부효과를 높였다. 부자들은 미라에 정교하게 색을 입힌 아마천 수의를 입히기도 했지만 보관 상태가 좋은 미라는 많지 않다.

비잔틴 시대기독교인들도 미라 제작을 이어갔다. 장기를 몸에서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트론을 사용해 시신을 탈수시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또한 아마천으로 시신을 싸는 대신 수를 놓은 옷, 신발, 아마천을 시신에 입혔다. 미라 제작은 기원 642년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진출하면서 중단되었다.

 

<부장품의 변화>

이집트에서 도굴이 성행한 것은 이집트인들의 변하지 않는 정신세계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후에도 현생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죽은 후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지참한다는 뜻인데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지참물을 갖고 갔다. 이들이 매력적인 도굴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3500여년 이상 미라 등을 만들었고 부장품들을 묻었지만 이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들이 중요한 것은 부장품이 이집트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집트의 무덤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므로 이집트 역사에서 매장의 관습은 새로운 유형의 부장품이 도입되면서 시간이 흘러 전통이 되고 결국에는 오래된 관습으로 치부되어 폐기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시대별 부장품들을 찾아간다.

 

선사 시대

이집트 최초의 농부는 오늘날 카이로 인근의 오마리(Omari)와 마디(Madi)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땅을 파서 만든 단순한 무덤에 시신과 항아리 하나를 함께 묻었다. 물론 이 당시부터 미라를 만든 것은 아니다.

당시에 글도 없었으므로 사후세계에 대해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부장품도 항아리가 전부라 볼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이들 항아리가 적어도 사자를 위해 음식을 담아두는 용기로 추정한다.

 

 

화장용 팔레트(선왕조)

선왕조 시대

학자들은 이집트의 장례 풍습선왕조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기원전 4000년 전에도 선사 시대와 마찬가지로 항아리 하나를 매장했다. 그후 선왕조 시대 말부터 땅을 네모로 판 무덤에 다소 많은 부장품을 시신과 함께 묻었다. 그러나 이당시의 변화는 나카다 제2 즉 기원전 3650년부터 기원전 3300경에 제사 의식을 치뤘다는 증거들이 발견된다.

당시의 시신은 보통 웅크린 태아 자세로 얼굴은 태양이 뜨는 동쪽 , 죽은 자들의 땅이라고 생각되는 서쪽을 향했다. 이 당시 항아리를 보면 장례 행렬을 그렸는데 의식용으로 춤을 추는 장면도 보인다. 어떤 무덤은 부장품의 양과 질이 월등히 뛰어난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 계층이 분화되기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성별에 대한 차이도 보이는데 남성 무덤에는 무기류가 발견되고 여성의 무덤에는 화장용 팔레트가 보인다. 이들이 추후 이집트인들을 지배하는 매장 관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왕조 시대

1왕조 무렵에 모래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단순한 무덤 대신 그 위에 추가로 구조물을 세운 무덤들이 발견된다. 이는 차별화된 계급이 등장했다는 것으로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스터파.

부장품도 확대되어 무기, 화장용 팔레트. 그릇과 가구, 장신구, 놀이도구들이 포함된다. 특히 대형 묘일 경우 부장품의 숫자가 수천 점에 이른다. 이때 비로소 부장용 전용의 관이 등장한다. 이것은 부장품들이 현세에서 사용하던 것을 의미하는데 이 당시 이미 이집트인들이 내세에도 현세에서 사용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로 인식한다.

현세와 내세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은 무덤의 배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전에 파라오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파라오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무덤 앞에 글을 새기는 비석도 이 당시에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