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88) : 이집트를 다시 본다(4)

Que sais 2021. 3. 16. 20:58

https://youtu.be/Qx9Xdbcuth0

고왕국 시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왕국 시대에 비로소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의 주제는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이지만 복합건출물에는 파라오만 매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피라미드건축물은 파라오의 가족과 그의 가신들의 무덤으로 한마디로 파라오를 주위로 한 가족묘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절차에 의한 미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시신은 아마천으로 싸여졌고 때때로 회반죽으로 겉면을 칠하기도 했고 석관이나 나무 관에 안치되었다. 그림을 그린 미라 마스크도 등장했고 카노픽 단지에 장기도 보관했다. 또한 , 파이앙스로 된 도기, 홍옥수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부적들이 등장했다. 파이앙스는 이집트의 전형적인 조각품이라 볼 수 있는데 석영 분말을 재료로 만든 것이다.

상류층은 무덤 관 안에 글자를 새겼으며 죽은 사람의 조각상도 무덤 안의 벽감에 안치되어 이들 앞에서 의식에 사용한다.

일부 개인 무덤에서도 제실에 더해 무덤방도 등장하는데 고왕국 말이 되면 무덤방 장식의 주제는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 등이다. 그만큼 시신을 대처할 수 있는 봉헌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제6왕조가 되면 돌이 아닌 나무 조각상도 무덤방에 안치된다. 무덤 주인의 노동을 담당하는 샵티 인형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견된다.

일반 이집트인들의 무덤은 작은 피라미드거나 높이 1미터도 되지 않는 벌집 모양인데 부장품도 상류층에 비해 제한적이다. 여성의 무덤에는 때때로 음식을 담은 단지 외에 구리로 만든 거울도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래를 파서 만든 무덤에 묻혔는데 부장품이 빈약함은 물론이지만 이들의 숫자가 엄청 많은데 이들이 몇 개씩 저승으로 갖고 간다 해도 그 숫자가 엄청남은 물론이다. 이집트의 공동묘지가 파라오나 고위층의 무덤 만큼 도굴꾼의 시선을 끄는 이유다.

 

〇 제1중간기

 

제1중간기는 이집트의 중앙집권적 권력이 해체되고 이집트 곳곳으로 분산되어 매장이나 예술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관을 장식하는 양식은 물론 상형문자도 지역에 따라 달리 표현했다. 매장할 때 비석을 항상 넣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금으로 만든 부장품을 주로 넣었다.

일부 남성의 무덤에서는 도구와 무기가 발견되고 여성의 무덤에서는 장신구와 거울같은 화장도구는 물론 숫돌도 발견된다. 이는 내세에서 음식을 준비하려면 숫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라 마스크(중왕국)

중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의 부장품도 당대의 상황이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11왕조의 무덤들은 테베 서안 지역의 산을 깎아 만들거나 상이집트와 중이집트의 지역에서 네크로폴리스를 형성했다. 테베는 제11왕조의 본거지였으므로 파라오들이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12왕조가 되자 파라오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테베의 북쪽 리슈투(Lisht)의 선조 피라미드 인근에 마스터파로 매장되기를 원했다. 물론 일부 신하들은 계속 산을 깎아 만들었다.

무덤의 부장품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단순한 조각상은 물론 신발, , 맥주를 담은 단지 등을 단촐하게 매장한 것도 발견된다. 1 중간기에 등장한 나무 모형은 제12왕조 중반기까지 지속되었다. 나무 모형은 다양한데 배는 물론 음식, 작업장, 서기, 군인 등을 묘사했다. 12왕조가 되자 관은 점점 정교해졌다. 미라를 덮는 관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도 등장한다.

일반인들을 위한 카노픽도 이때에 등장한다. 가장 초기의 모델의 뚜껑사람 머리 모양인데 제12왕조에서는 호루스의 네 아들 모습을 딴 뚜껑으로 변한다. 사람, 개코원숭이, 자칼, 그리고 매의 모습이다. 이중 사람 모습의 카노픽은 18왕조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일반인용 카노픽은 속을 파지 않아 실제로 장기를 담을 수 없는 가짜가 대부분이다. 카노픽이 이집트에서 중요시 인식되는 것은 파라오의 무덤에서 시작된 관습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유포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13왕조가 되자 북쪽과 남쪽의 무덤 장식이 서로 달라진다. 이는 당시 정치적 권력이 분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북쪽의 경우 특징적이다. 이들은 시신을 사람 모양의 관에 넣었고 미라 마스크를 씌웠다. 정교하게 만든 장신구들이 배장되었고 수많은 항아리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사자에게 봉헌하는 음식을 의미한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생전에 사용하던 주술적인 물품을 부장했다. 하마 모양의 파이언스 조각상, 상아로 만든 마술 지팡이도 보인다. 이 당시 매장의 특징은 한 무덤에 여러 시신들을 매장하는 공동묘지 개념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제19왕조에서도 나타난다.

 

2중간기

2중간기의 특징은 비이집트인들이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점이다. 힉소스가 주류를 이루던 북쪽에서는 시신을 안치한 작은 진흙벽돌 무덤이 보이며 도자기 그릇이 부장되었고 남성의 경우 이 기본이다.

특히 이집트 곳곳에서 단순한 접시형 무덤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누비아 장병들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 당시 이집트인들의 무덤에서 나름대로 많은 부장품들이 매장된 경우도 있지만 당대의 정치상황을 볼 때 대부분 매우 빈약하다.

 

신왕국 시대

신왕국시대는 왕가의 계곡, 왕비의 계곡 등에 파라오,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층들이 매장되었다. 이들 무덤은 여러 개의 방을 만들었고 무덤 방 위에 진흙 벽돌로 만든 제실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제18왕조는 이집트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한 물품들을 무덤에 넣은 마지막 시기로 추정한다. 이 당시 발견되는 부장품은 옷은 물론 가구들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사자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다. 살아있을 때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는 사람 모습을 한 관, 미라 마스크, 사자의 서, 심장 스카라브, 부적, 샵티 등이다.

샵티는 이집트의 부장품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 내세용 인형이다.

샵티는 파라오를 비롯한 상류층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후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된 부장품이다. 18왕조 때 만들어진 샵티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데 이는 매우 값비싼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샵티를 사자의 조각상에 비견하는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대에 고가인 목재로 만들기도 했다. 샵티는 정교한 원목 상자에 넣었는데 이 상자 역시 당대의 희귀품이다. 이후 시대가 지나자 파이앙스로 만든 샵티가 일반 대중들에게도 전파되어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장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아무리 하층 계층이라도 자신이 급사할 경우 매장할 때 갖고 갈 샵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휴대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적어도 샵티는 함께 묻어달라는 뜻인데 이는 샵티가 내세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노역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람세스 시대 즉 19왕조부터는 일상적인 물품보다 내세용 특별 부장품들을 넣었다. 한마디로 대다수의 부장품은 사후세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샵티, 사자의 서, 심지어는 그릇까지도 모두 부장용으로 만들어졌다.

 

후기왕조 시대

후기 왕조는 처음으로 왕족이 아닌 상류층도 거대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던 시기다. 그러나 이 당시 대부분의 무덤은 사막을 수직으로 파서 만들었다. 다소 놀라운 것은 정교한 조각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들 부장품들은 신왕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파이앙스로 만든 샵티는 모든 계층이 사용했다. 카노픽 단지는 시신의 내장을 보관하지 않는 의례용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부장품으로 거의 대부분 포함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프톨레마이오스고대 이집트 방식과 헬레니즘 방식을 모두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세계 최대의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전통을 견지했지만 이집트 관습을 취하여 미라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석관을 사용했고 사자의 서와 부적은 기본이다. 그러나 샵티와 같은 인형은 말기에 사라진다.

 

로마 시대

기원전 30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함으로써 이집트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령으로 포함되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매장의 경우 프톨레마이오스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와 로마식이 공존한다.

이는 로마 통치하에서도 미라 제작이 계속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양식에 따라 나무 판에 안료를 밀납에 녹이는 납하법(蠟畵法)으로 미라 초상화를 그리는 방법이 유행했다. 미라의 발을 덮는 경우도 보이며 이집트 양식을 로마 양식으로 그린 수의로 시체를 완전히 감싸기도 했다.

 

<부적>

부적은 세계 어느 나라 건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런 정통적인 용도 즉 현생에 도움이 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이외에 사자를 위한 부장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시의 부적조각상으로 형태는 신의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심장이나 곤충, 기둥 모양을 띠기도 한다.

부적의 재료는 여러 가지로 부자들은 값비싼 이나 희귀한 돌을 사용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석영 분말을 재료로 행태를 만들어 구운 파이앙스로 만든 것을 구입했다. 이집트에서 사용된 부적은 상당수에 달하지만 중요한 것만 설명한다.

 

새 모양의 바(22왕조)

 

(ba)

바는 미라 가슴에 놓여 지는데 현세와 내세를 여행하는 바가 사자와 결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자의 서의 내용 중에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가 돌아오지 않아 문제가 된다는 두려움을 적고 있다. 즉 이 부적이 미라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는 값비싼 청금속 등으로 만들었는데 파이앙스나 유리 등 저렴한 재료들도 사용했다.

 

와제트(후기왕조)

스카라브(심장)

쇠똥구리 또는 풍뎅이 형태의 부적으로 미라의 심장 위치에 놓았다. 이 부적의 바닥면에는 지하세계에 들어가 오시리스 앞에서 재판받는 과정과 불리한 증언을 하지 말 것을 간청한다. 사후 재판에서 심장을 마아트의 깃털이나 여신상의 무게와 비교하여 똑 같으면 야르의 들판이라는 낙원으로 가지만 그보다 무거우면 아무트에게 먹히고 완전히 소멸된다. 이집트에서는 동물의 똥덩이를 굴리는 쇠똥구리를 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을 떠 올렸다고 추정한다.

 

와제트(Wadjet, )

부적 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와제트. 이 부적은 이집트인들이 달이라고 여겼던 호루스의 눈을 의미한다. 호루스의 눈은 아버지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에 의해 왼쪽 눈을 잃었는데 나중에 토트에 의해 치료되어 빛을 띠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호루스의 왼쪽 눈은 치유와 달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