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99) : 파라오의 저주(10)

Que sais 2021. 3. 20. 13:49

https://youtu.be/mC_N7fWrwQc

<파라오의 저주 전설 탄생>

정작 투탕카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호화로운 유물도 유물이지만,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위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이었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배경이다.

카터가 묘소 입구에서 돌을 주웠는데 이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고 알려진다.

 

나의 집을 향하여 쳐든 손은 말라서 비틀어질지어다. 나의 이름, 나의 주춧돌, 나의 모습, 나의 상()에 손을 대는 자들은 파멸의 운명에 떨어질 지어다

 

또 다른 상형문자로 된 점토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들을 모두 죽이리라.’

 

알려지기는 카터가 이것을 노트에 옮겨적고 점토판을 숨겼다고 한다. 인부들이 이를 알면 동요할 것을 우려해서라는 것이다.

여하튼 파라오의 저주를 만든 장본인은 사실상 카르나본 경이라고 볼 수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고 카르나본 경이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카르나본 경에게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파라오의 저주가 카르나본 경에게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투탕카문의 미라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르나본 경은 유명한 점술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점술가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점술가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이라고 한 마디 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충고를 듣지 않고 카르나본 경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이와 같은 일반적 사실에 근거하여 카르나본 경에게 만약 투탕카문 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르나본 경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카르나본 경은 투탕카문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려 19234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덤에 손 댄 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르나본 경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르나본 경의 테리어 개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카르나본경이 갑자기 사망하자 투탕카문 파라오의 저주가 세계 언론을 타기 시작했지만 사실 파라오의 저주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투탕카문 파라오와 연계된다.

카터가 테오도르 데이비스와 왕가의 계곡을 발굴할 때 존 린덴 스미스 박사가 참여했다. 그의 부인 코린너18세의 미국인인데 그들은 영국의 고고학자 호텐스, 미국인 위겔과 함께 힘을 합했다. 그런데 어느날 왕가의 계곡을 조사하면서 스미스와 위겔은 자연적으로 생긴 원형극장을 발견했다.

연극하는데 적격인 장소로 판단한 그들은 신비한 내용의 연극을 상연하면서 고고학계 인사들을 모두 초대하기로 했다. 그들은 아케나톤 파라오의 찬미자였는데 이 파라오의 일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상상적인 연극이 아니라 보다 사실성있는 연극을 원했다. 내용은 매우 파격적이다. 고대의 이집트 신들과 연계하여 영원한 떠돌이로 돌아다니고 있는 저주로부터 아케나톤 파라오의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아케나톤이 유일신을 신봉했다는 것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

알려지기는 아케나톤은 기원전 1363126일에 사망했으므로 그들은 1909126일에 자신들의 연극을 공연하겠다며 초청장을 고고학 관계자에게 돌렸다. 그리고 123일 리허설을 했다.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호루스 신 : 소원을 말해라. 무엇이든지 모두 이루어진다.

아케나톤 : 어머니 티이 왕비를 만나고 싶소.

마술의 의식을 통해 티이 왕비가 나타난다. 티이 왕비는 자기 아들이 저주받아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있다며 이토록 슬픈 일은 없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아케나톤은 호텐스 박사가 연출했는데 그는 지옥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만든 아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며 티이에게 아톤에 대한 찬가를 낭송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코린너 스미스가 찬가를 낭송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녀의 말을 삼켜버렸다. 바람이 더욱 거세져 모래와 자갈이 날라다녔는데 인부들이 겁을 먹고 신들의 응징이라며 소동을 피웠다. 리허설은 중지되고 연극에 출연하던 다른 연기자들은 모두 그들의 근거지로 대피했다. 그곳은 테베의 지배자였던 아멘호테프 파라오의 무덤 근처였다.

그날 코린느는 눈이 아프다고 호소했고 아케나톤 역의 호텐스는 위경련을 호소했다. 그 날밤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었다. 두 사람은 아몬 신전의 신상(神像) 앞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신이 소생하여 그들을 장대로 때렸다. 코린느는 눈, 호텐스는 배를 맞았다.

다음날 코린느는 카이로 병원으로 옮겼는데 안과의사는 트라코마의 일종인 이집트 안염이라며 이렇게 갑자기 발병하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호텐스도 곧이어 병원에 옮겨졌는데 즉시 위수술을 했다. 두 사람의 목숨은 건졌지만 연극은 중단되었고 이 사실이 파라오의 저주로 알려졌다. 이때는 1909년으로 카터가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을 발견한 1922년보다 13년 앞선 일로 당시에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카터와 카르나본 경이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견한 후 카터 및 카르나본 경과 관련된 사람들이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19239월 카르나본 경의 조카 오베리 허버트가 갑자기 죽었으며,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던 방사선 사진기사 더글라스 라이드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미국 철도계의 거물 조지 J. 굴드가 카르나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카이로에 왔다. 카터는 그를 무덤 속으로 안내했고 굴드는 투탕카문의 관을 만졌는데 이튿날 고열로 눕더니 그날 밤에 죽었다. 조엘 울이라는 영국의 실업가도 무덤을 견학하고 귀국하던 중 고열로 사망했다.

자신이 파라오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던 이집트 왕족인 알리 케멜 파르미 베이는 무덤을 본 후 자신의 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형제 한 명은 자살했다. 미국의 고고학자로 카터의 조수인 아더 메이스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카르나본과 같은 콘티넨탈 호텔에서 사망했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죠지 방디트 역시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사망했고, 카르나본 부인이 벌레에 물려서 1929년에 사망하는 등 투탕카몬 무덤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람들의 숫자가 20여명에 이르렀다.

 

투탕카문 관 조사하는 과학자

카터의 비서로 보물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도와준 리차드 베텔 목사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무덤을 보지는 않았지만 투탕카문의 유물을 몇 가지 보관하고 있었던 베텔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망한 후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침실에는 투탕카문 묘에서 출토한 설화석고 화병이 놓여져 있었으며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영구차에 8세의 아이가 치어 죽기도 했다. 투탕카문의 미라를 검사한 더글라스 데리 교수1925년에 죽었다. 또한 같이 미라를 검사한 알프레드 루카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카이로 박물관의 고대유물 부분의 책임자 가말 네레트 박사저주라는 말을 일축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보십시요. 나는 지금까지 인생 전부를 파라오 묘와 미라에 바쳤는데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네레트 박사는 그 말을 한 지 4주일 후에 폐허탈로 급사했다.

파라오의 저주는 그야말로 세계 각 언론을 강타했는데 필립 반덴버그는 투탕카문과 직접 관련되어 사망한 사람만 아니라 그 밖의 이집트 유적 발굴에 관련된 소위 일찍 사망한 고고학자 즉 파라오의 저주로 죽은 사람들의 명단도 파라오의 저주로 적시했다.

그는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 이상한 심신의 소모가 특징이었는데 카터도 우울증의 발작과 심신 소모에 시달렸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는 로제타석을 해득한 샹폴레옹은 물론 이집트학으로 유명한 벨조니, 독일의 병리학자 빌하르츠, 고고학자 게오르크 뮐러, 카터의 친구인 제인스 브레스테드 박사도 열거했다.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한 후 카터가 정신쇠약증상을 보인다고 한 사람은 브레스테드 박사였는데 그는 카터가 가끔 얼빠진 상태였다고 적었다. 물론 카터는 당대 나이로는 장수한 66살까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