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00) : 파라오의 저주(11)

Que sais 2021. 3. 20. 17:34

https://youtu.be/Oil6orrHw5s

<계속되는 파라오의 저주>

파라오의 저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66년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관리하던 아브라함은 유물의 전시회 문제로 카이로에서 정부 관리들과 회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1969, 투탕카문의 무덤 발굴대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담슨이 영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나는 한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없는 전설을 믿어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또한 그 사고 이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도 등뼈를 다쳤다. 그후 그는 지금까지 나는 우리 가정에 닥친 모든 불행이 파라오의 저주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1972년 투탕카문의 유물을 영국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송 작업을 지휘하던 가멜 메레즈파라오의 어리석은 전설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 후 그날 밤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물을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6명은 그후 5년 사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지금까지 약 30 여 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20052월에는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고대 이집트 투탕카문 무덤에서 도굴된 보석 때문에 가족들이 사망했다고 이집트 정부에 하소연했다. 이 여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뎅이 모양의 오래된 보석이 비극을 일으켰다고 호소했다. 이 보석은 한 선원이 도박판에서 획득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지고 가게 되었는데, 보석을 딸에게 건네주고 난 직후 선원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바닷가로 떠밀려 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딸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죽은 딸의 남편이 보석을 팔기 위해 매입자를 찾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여성은 결국 보석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며 문제의 풍뎅이 보석도 신성한 무덤을 파헤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있다고 판단하자 결국 이집트 정부에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엉뚱한 사건에 파라오의 저주가 오르내리기도 했다.

 

전실을 조사하는 카터, 카르나본경

19969카이로굴립박물관에서 20대 청년이 박물관 개장 직후 투탕카문의 순금제 보검을 양말 속에 감추어 나오다 현관에서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전날 관람객으로 가장해 박물관에 들어간 뒤 전시대 밑에 숨었다. 밤이 되자 드라이버로 투탕카문 보물 진열장 유리 뚜껑을 열었고 순금제 보검을 양말 속에 넣었다. 휴대하기 쉬운 작은 유물 20여 점은 나중에 찾아갈 생각으로 화장실에 숨겨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 박물관을 나서다가 붙잡힌 것이다. 그런데 그가 경찰에서 밝힌 말이 충격이었다.

 

박물관은 일단 폐장하고 나면 간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가정집을 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런데 이번 실패는 아마도 파라오의 저주때문인 것 같다.”

 

<파라오의 저주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

투탕카문 무덤 발굴에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이 떠들썩하게 되자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불가리니 교수는 방사선이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파라오의 저주란 사실 방사선에 의한 죽음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원자 방사선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묘지 바닥은 우라늄을 포함한 돌로 덮여 있거나 방사선을 내는 바위로 무덤 마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러한 돌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오늘날도 사람을 죽일 만큼 강력하다며 우라늄이 포함된 바위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무진장한 천연 자원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물론 파라오의 무덤 안에서 방사선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런 주장은 곧바로 폐기된다.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제시된 주장은 투탕카문 파라오와 함께 묻힌 과일이나 야채 등이 수십 세기를 두고 썩으면서 생긴 곰팡이 때문에 일부 건강이 좋지 않았던 관련자들이 감염되었다는 설이다.

캐롤린 스탕거 필립 박사에 따르면 파라오와 함께 묻힌 과일이나 야채들 속에 곰팡이가 3,000년 동안이나 생존해 있다가 무덤이 열리자 재빨리 발아하여 인체에 침입한 후 치명적인 질병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파올라 박사는 곰팡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밀폐된 고대의 무덤들 속에서도 돌 틈새로 스며드는 습기와 공기에 의하여 미세한 곰팡이가 발아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유독성 곰팡이가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에 들어간 적이 있거나, 무덤에서 나온 미라나 그 밖의 다른 물건들과 접촉한 사람을 죽게 만든 실질적인 요인이라는 것이 파올라 박사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무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부 학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독약에 전문가들이었다. 어떤 독은 먹지 않고 피부에 스며들기만 해도 치명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독이 묘지 안의 벽을 칠할 때 사용되었을 것이다. 묘지는 봉해지고 공기는 희박해졌다. 발굴자들이 묘지 안의 독성 물질에 감염됐고, 이 독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됐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전설도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보면 모두들 놀라게 된다. 한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된 것이다. 투탕카문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지만,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사람 1,500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 박사는 그 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이들의 죽음이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는 진상을 밝혀냈다.

 

이블린, 카터, 카르나본경

학자들은 파라오의 저주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보험회사에서 사용하는 통계방법을 적용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카터를 포함한 23명이 무덤 발굴에 직접 관여했다. 이들은 고고학자, 사진사, 현재 안내인들인데 이들은 이후 평균 24년을 더 생존했으며 평균 사망 나이는 무려 73세였다. 당대에 70살이 넘는다는 것은 매우 오래 장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카르나본 경과 함께 무덤에 들어갔던 딸 이블린은 이후 57년을 더 살았으며 파라오의 무덤을 최초로 개봉한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더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파라오의 저주가 존재한다면 제일 먼저 사망해야 할 사람이 바로 카터였다.

전염병 전문가인 마크 넬슨 박사2002년, 파라오의 저주의 존재 여부에 대한 또 다른 통계적 조사를 하였다. 그는 카터가 무덤의 발굴과 관련하여 기록한 이집트 내의 44명의 미국인과 유럽인의 명단 중 24명이 무덤에 들어갔거나 유물을 접촉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면에 20명은 무덤에 들어가거나 유물과 접촉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넬슨 박사는 이들 두 집단의 사망 나이를 조사했는데 이들 평균 수명에 아무런 차이없이 장수를 누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문의 관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사자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투탕카문은 오히려 자신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하여 영광스럽게 개봉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투탕카문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르나본 경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르나본 경이 발굴 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런던의 신문타임스사를 상대로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약속하고 돈을 지원받았다.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가 없던 일로, 엄청난 특종을 눈앞에 놓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서야 기사를 보도할 수 있게 된 전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하지 않으려면 독자적인 취재와 조사로 기사를 만들어야만 했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르나본 경이 일찍 죽게 되자,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투탕카문에 조금이라도 관계되었다는 사람이 사망하면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 투탕카문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몇 번째 희생따위의 제목으로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곧바로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수많은 영화가 제작되었고 소설도 수없이 나왔다. 소위 장사가 잘되는 상품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속성이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을 부채질한 셈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카터가 숨겼다는 상형문자로 된 점토판 기록에 파라오의 저주가 적혀있다는 말에 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카터가 무덤 부장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분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주를 적은 점토판은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다. 결론은 그런 점토판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기자가 조작해 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보수 처리중 투탕카문의 관

이러한 파라오 저주의 진상을 파헤치는 것도 사람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결론은 다소 허망하다. 파라오 저주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고사하고 간접적인 증거조차 제시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카르나본 경부터 문제가 있다. 그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 의해 모기에 물린 후 면도를 하다가 그 물린 자리가 덧났는데 부주의하게 내버려 둔 탓에 감염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카이로에서 일어났다는 폭풍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 시기에 카이로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연현상에 불과했다. 그의 애견은 소문대로 그와 같은 날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몇 주일 후 주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언론에서 만들어진 이 전설은 기담과 초자연현상 애호가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당시 인기 높은 작가로 셜록 홈즈를 창안한 아서 코난 도일도 이 전설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흥미에 흥미를 더한 파라오 저주란 말은 거의 집단적 히스테리 수준으로 발전했고 종식을 몰랐다. 그런데 인간의 오묘함은 파라오의 저주란 말의 진상이 알려졌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파라오의 저주가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우연과 미신에다 그리고 가필이 동원되면 거의 깨기 어려운 막강한 팀을 이루는데 파라오의 저주야 말로 그런 부분에서는 가장 알맞은 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