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01) : 파라오의 저주(12)

Que sais 2021. 3. 21. 00:25

https://youtu.be/JLVs1Akk65g

<투탕카문의 살해>

파라오의 저주가 세계에서 가장 흥미있는 미스터리로 부각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투탕카문의 일생이 다소 극적이기 때문이다.

투탕카문의 어린 시절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투탕카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키야는 아케나톤의 제2왕비로 1959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발견될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케나톤6명의 아이를 낳은 네페르티티가 있기 때문이다.

키야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아멘호테프 3세에게 시집왔던 미탄니 왕 투스라타의 딸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는 아케나톤의 제2왕비임에도 위대한 파라오의 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집트 태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투탕카문의 어머니 키야

여하튼 그녀는 투탕카문의 탄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갑자기 사라진다. 투탕카문을 출산할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왕궁내의 음모에 의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아버지인 아케나톤이 사망하자 네페르티티가 여자로서는 드물게 정권을 잡지만 곧바로 사망하며 투탕카문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투탕카문은 아케나톤과 네페르티티 사이의 딸인 이복누이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한다. 아케나톤이 사망할 때 앙크에스엔아멘은 아케나톤의 왕비였다. 투탕카문 왕묘에 매장되어 있던 2구의 태아 유해는 그들 사이에 생긴 아이로 추정한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학자들은 투탕카문의 시대는 매우 안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파라오가 되자마자 아버지가 견지한 아톤에서 다시 아몬으로 방향을 틀었으므로 이집트 각계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므로 10년 동안이라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카르나크와 룩소르에서도 많은 건축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훗날 파라오로 오른 호렘헤브가 이들을 모두 자신의 업적으로 돌렸지만 진상이 알려져 투탕카문의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료에서도 투탕카문의 치세 상황이 나타나는데 그가 여러 차례의 해외원정을 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투탕카문의 무덤 벽화에 사막에서 사자같은 맹수들을 사냥하는 모습누비아와 시리아의 적들을 화살로 공격하는 전쟁 장면이 그려져 있다. 훗날 호렘헤브의 무덤, 누비아 총독인 후이의 무덤을 통해 이러한 그림들이 실제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투탕카문이 파라오가 된 지 10년도 채 안되어 갑자기 사망하자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인 아이가 파라오가 되고 투탕카문의 왕비인 15세의 앙크에스엔아멘과 결혼한다. 그러나 아이4년이 채 못되어 사망하고 평민 출신인 장군이자 왕의 부관이었던 호렘헤브가 파라오가 된다.

호렘헤브도 집권한 지 몇 년이 안 된 1314년에 사망하고 람세스 1가 파라오가 되면서 제18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 사상 가장 찬란하였던 시기인 19왕조의 문을 연다.

20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 명의 파라오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라던가 정치적으로 극히 혼란한 시기를 제외하고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장기적으로 집권하였음을 감안할 때 이런 현상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그러므로 영국 리버풀대학 연구진이 1968투탕카문 미라의 X-선 촬영에서 두개골의 일부분이 함몰되었고 작은 단편이 발견됐는데 이는 그가 뒤통수를 강타당해 숨졌음을 시사한다고 발표하자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이후 거의 정설처럼 전해져 내려왔다.

 

<첨단과학의 도전>

카터가 세계를 놀라게 한 보물과 미라가 함께 부장된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견했지만 카터는 미라에 전혀 관심을 기우리지 않았다. 당대의 고고학자들에게 미라의 가치 즉 정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으로 그는 오로지 유물에만 눈독을 들였다.

투탕카문의 미라는 송진과 향유로 처리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으므로 그를 둘러싼 보물들이 간단하게 벗겨지지 않았다. 그러자 카터는 미라의 딱딱한 껍질을 녹이기 위해 미라를 태양에 노출시켰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행동인지 알지만 여하튼 그의 태양 노출은 실패했다. 그러자 카터는 뜨겁게 달군 칼로 딱딱하게 굳은 송진을 긁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그는 미라의 머리는 물론 팔다리를 자르고 심지어는 몸통을 둘로 가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의 문제는 곧바로 나타나 투탕카문의 부드러운 조직으로 된 부분은 순식간에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문의 미라는 이집트의 미라에 많은 정보를 주었다.

이집트인들은 시신의 뇌와 장기를 제거하고 특수 소금을 사용하여 건조했는데 문제는 심장이었다. 당대에 이집트인들은 뇌 대신 심장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서도 심장만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가슴을 가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 심장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각하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뇌를 굳이 보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뇌를 빼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즉 시신의 얼굴 행태를 그대로 살리면서 회색질의 뇌를 어떻게 꺼내느냐이다.

결론은 뇌를 코로부터 꺼냈다. 그런데 코로 간단하게 뇌를 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먼저 뇌를 녹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길고 가느다란 막대를 한쪽 콧구멍에 집어넣어 중간에 걸리는 물렁뼈를 부수고 두개골 안으로 찔러 넣은 후 뇌가 흐물흐물해지도록 휘저었다. 그리고 시신을 뒤집어 액체로 변한 뇌가 코로 흘러나오면 뜨겁게 끓인 송진을 부어 두개골 안을 코팅시켰다. 이렇게 한 미라가 정말 살아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당대에 인간의 정수는 심장에 있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에게는 당연한 처사였다.

다른 장기는 왼쪽 옆구리를 절개해 꺼냈다. 한 손은 시신의 뱃 속에 넣어 장기를 꺼내고 다른 손에 든 칼로 장기를 하나씩 잘랐다. 그런데 투탕카문의 미라는 파라오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라보다 매끄럽지 않고 조잡한 솜씨였다.

한마디로 투탕카문 미라의 상태를 볼 때 상당한 문제점이 있지만 학자들은 보다 정확하게 밝히기를 원했다. 우선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투탕카문이 정말로 살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X선 촬영에 의해 투탕카문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리버풀대학에서 주장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두개골 조각들이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겼을 수도 있다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로 알려진 컴퓨터단층촬영기(CT)가 개발되자 학자들은 이집트 정부에 파라오의 저주를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투탕카문의 미라를 조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다. 컴퓨터단층촬영기는 평면적인 X선 사진과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1밀리미터 간격으로 촘촘히 촬영하여 컴퓨터로 3차원적인 영상을 재구성하므로, 머리의 부상 등 신체 각 부위의 손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이집트 정부도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가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문 묘의 석관에 보관되어 있던 미라를 3시간 동안 조사하도록 허가했다.

20053월 이집트의 자디 하와스 박사의 주관 하에 투탕카문 미라 CT촬영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인체에 들어 있는 물 성분 속의 수소를 이용하는 MRICT보다 더 정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투탕카문의 미라는 만들어질 때 이미 물기가 제거되고 건조한 상태에서 수천 년이나 지났으므로 MRI 검사가 여의치 않다. 더불어 미라처럼 골격과 말라붙은 근육조직만 있을 경우 틀어지거나 부러진 흔적을 알아내기엔 CT가 더 효용적이다. CT촬영이 무사히 끝나자 1,700여 장에 달하는 촬영데이터는 전 세계의 학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1968년 촬영 투탕카문의 두개골 사진

여하튼 초창기 X선 촬영에서 머리에 큰 상처로 보이는 자국이 발견되었으므로 CT촬영에서도 둔기에 의한 두개골 골절,  암살당했다는 설을 보완하려는 생각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정밀한 CT 촬영에 의하면 두개골 골절은 아예 발견되지 않았고, 두개골에 나있는 갈라진 금이 있었지만 이는 투탕카문이 아직 미성년자여서 두개골이 채 다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당초에 X선 촬영에 나온 자국 자체는 살해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CT촬영에 의한 분석은 계속 발표되었는데 다리에 심각한 골절이 있음이 확인되어 골절이 사망요인일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항생제가 없었던 당시에 이런 정도의 부상이라면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장은 아버지인 아케나톤이 유전적 기형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탕카문이 아버지의 선천적 유전병으로 인해 원래 몸이 허약하여 빠른 나이에 병사했다는 것이다 다리 골절도 이에 포함되었다. CT 촬영은 세 가지 부분으로 발표되었다.

무릎 바로 위쪽에서 심각한 골절 발견.

왼쪽 갈비뼈 여러 개가 부러졌으며 상당수가 사라짐.

심장이 없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집트인들은 미라에 심장만은 남겨두었다. 사후 세계에서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재서 생전의 죄를 심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파라오의 시신에서 심장이 제거됐을 정도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손상되어 미라제작자들이 알아보지 못했거나, 도저히 보존이 불가능한 수준이라 포기하고 심장을 넣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마디로 그의 부상이 매우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말라리아를 사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문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기생충인 열대 열원충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할 경우, 독특한 증상 때문에 독살당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진다.

 

투탕카문 미라 CT 촬영

미이라를 조사한 결과, 내반족이라는 병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장애인이었으며, 입천장이 갈라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구개열을 앓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이집트 왕조가 대대로 부녀간, 의붓남매간 근친혼을 기본으로 한 결과 열성 유전자가 계속 내려오면서 이런 현상이 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근친혼으로 인해 모든 부작용이 초래된다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여하튼 투탕가문의 갖고 있는 발의 장애가 선천적이 아니라 전투 중에 입은 상처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투탕카문이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무릎의 골절상 주위에 파상풍염증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정말로 최전방에서 전차를 타고 싸웠는지는 미정이다. 그러나 그의 10년 간 치세동안에 이집트가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모두 투탕카문이 전차를 타고 지휘했다고 설명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근래 학자들의 연구는 매우 놀랍다.

투탕카문이 다소 희귀한 질병혈구가 날카로운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는 겸상적혈구병으로 인해 만성통증 등에 시달렸으며, 두개골이 비정상적으로 가늘어지는 앤틀리-빅슬러 증후군이라는 희귀병도 앓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병치레가 유난히 잦았던 그가 결국 낙상하면서 다리가 골절된 후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다는 설명도 있다. 그동안 제기된 질병을 거의 모두 수용한 복합 질병으로 투탕카문의 사망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