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102) : 파라오의 저주(13)

Que sais 2021. 3. 21. 00:35

https://youtu.be/dtpEIEcvTec

<투탕카문의 진상>

2005년에 실시된 CT촬영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상당수의 의문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1968년 전에 실시되었던 X선 측정에 의해 투탕카문의 사망 원인은 세 가지로 압축되고 있었다.

 

사냥 등 마차를 타다가 낙상으로 인한 사고

전투 중의 부상

살해.

 

세 가지 중에서도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우린 것은 번째의 살해로 인한 사망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19살의 어린나이로 사망한 투탕카문의 사망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방대한 자료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특이점들을 발견했다.

우선 투탕카문의 두개골 아래쪽에 뼈가 없는 원형 구멍을 하나 아미드 박사가 발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흉기에 의해 가격 당했을 때도 나타나는 모습으로 투탕카문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큰 증거로 제시되었다. 두 번째는 투탕카문의 턱에서 외부로 사랑니가 옆으로 자라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투탕카문이 심한 치통으로 고생했으며 만약에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을 일으켰다면 사망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세 번째는 미라의 몸통 부분에서 흉골이 많이 사라졌는데 이를 액면대로 인정한다면 투탕카문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미라를 만들 때 머리에 삽입한 수지(송진) 속에서 조그마한 머리뼈 조각을 발견했다. 이것은 투탕카문이 외부의 타격을 받아 머리뼈가 부셔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10센티미터 정도의 검은선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골절상을 입었을 때도 생길 수 있는 흔적으로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다는 증거로 그동안 줄기차게 제시되었던 내용이다.

다섯 번째는 투탕카문의 오른쪽 발목이 심하게 부러진 골절을 발견했다. 이것은 투탕카문을 미라로 만들 때 이집트식의 부목을 대었다는 것으로도 확인되었다.

 

투탕카문의 사망에 대해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원인을 제시했지만 이들이 제시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사망원인인지를 가려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결국 이들 자료를 토대로 세 명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이 모였다. 그들의 정밀 조사에 의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랑니가 패혈증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투탕카문이 평소 치통으로 큰 고생을 했겠지만 감염에 의한 치명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투탕카문 미라를 CT로 촬영한 모습

두 번째 흉골이 없는 것도 남아있는 늑골이 날카롭게 잘려진 것으로 보아 미라를 만들 때의 흔적으로 인식되었다. 사라진 흉골은 미라를 만들 때 또는 하워드 카터가 미라에서 황금마스크를 비롯한 몸에 부착된 보석과 헝겊 등을 벗겨낼 때 손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부상에 의해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은 남겨두었다. 심장이 없다는 것도 이때 손상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투탕카문의 살해 가능성을 높여 주었던 수지 속의 뼈조각이다. 그동안 투탕카문이 살해되었다고 강력하게 제시된 이 증거를 법의학자들은 타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라를 만들 때 뚫은 송곳 자국으로 결론지었다. 이집트에서는 일반적으로 미라를 만들 때 코를 통하여 머리의 뇌를 빼내었지만 두개골 뒷부분에 구멍을 뚫고 뇌를 빼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신을 미라로 만들 당시 뼛조각이 있었다면 송진을 부을 때 두개골 왼쪽 벽에 달라붙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송진을 붓기 전에 생긴 거라면 이렇게 선명하게 뼛조각 형태로 들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10센티미터의 골절상 흔적도 타격에 의한 골절상이 아니라 투탕카문이 아직 젊었기 때문에 머리의 봉합선이 완전히 메꾸어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제는 다섯 번째의 우측 다리의 골절상이었는데 우측 다리의 골절상으로는 사망에 이를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금마스크

결국 투탕카문의 사망원인이 미궁에 빠질 순간에 아쉬리프 셀림 박사가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하기 위한 CT 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 왼쪽 다리 무릎뼈에서 심한 골절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현대인들도 심한 운동을 하다가 치명상인 골절상을 당할 때 나타나는 모습으로 골절에 의해 피부가 찢겨나갔을 정도였다. 또한 골절 속에 공 모양의 작은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골절에 의한 출혈로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현상은 살아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으로 뼈에 생긴 상처가 원인이라고 코스트너 박사는 밝혔다.

학자들은 투탕카문의 사망 원인으로 살해된 것은 아니며 특히 유전병으로 사망한 것도 아니라고 단호히 부정하면서 그의 사망 원인을 두 가지 시나리오로 결론 내렸다.

첫 번째는 흉골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리의 골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두 번째 다리의 골절상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우선 다리 골절로 동맥이 절단되었다면 사고가 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사망했을 것이지만 투탕카문의 CT 자료에 의하면 그는 15일 정도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것은 골절부위에서 부상으로 인한 감염에 의한 합병증 현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투탕카문이 다리 골절로 사망한 징후도 미라를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사망 부위에 부장품으로 부적 용도의 물품을 올려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사후에 미라가 완전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염원하기 위한 것인데 투탕카문의 미라에서 무릎 부분에 많은 부장품들이 발견된 것이다.

투탕카문이 치명적인 다리 골절상을 입은 원인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는 투탕카문이 전차를 타고 모래 밭 위를 재빠르게 달리다가 구덩이 같은 곳에 걸려 낙상하여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투탕카문이 사냥을 즐겨하여 마차를 자주 몰았는데 투탕카문의 부장품으로 마차가 여러 대임으로도 증빙된다. 둘째는 전투 중에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투탕카문은 어린 나이이지만 그가 통치한 10년 동안에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누비아와 히타이트와 여러 번 전투를 했는데 이 사실은 그의 이름으로 된 여러 부조의 전투 장면으로도 증빙된다.

학자들은 투탕카문이 어떤 전투에 참가했을 때 백병전 등에 휘말려 적이 휘두르는 무기에 다리를 강타 당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당시의 사막 전투에서 히타이트는 철로 만든 전투용 도끼를 사용했는데 적군의 도끼에 다리를 강타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투탕카문이 어떤 연유로든 마차를 몰다가 부상당했다는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투탕카문이 어려서부터 매우 병약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부장품 중 지팡이가 무려 수백 개나 발견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투탕카문이 지팡이와 함께 살았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투탕카문의 아이들이 장성했다면 한쪽 어깨의 기형, 척추 이분증 및 척추 측만증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대 이집트 파라오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전적 장애에 시달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투탕카문의 사망이 왼쪽 허벅지 골절로 인한 감염으로 추정하지만 적어도 전차 사고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다. 투탕카문이 선천적으로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차 경주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인데 그렇다고 투탕카문이 전차를 전혀 탈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 <고대유물보존위원회>자히 하와스 박사는 투탕카문의 사인은 다리골절로 인한 2차 감염이라고 그동안의 과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마디로 골절상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투탕카문이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달리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며 그동안 정설처럼 굳어진 투탕카문이 머리를 맞아 숨졌다거나 살해됐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연구진은 외상을 동반한 복합골절을 제대로 치료받지 않아 세균이 침입해 전신으로 퍼졌을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도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복합골절 환자가 세균에 감염돼 사망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여하튼 CT 촬영에 의한 결론은 투탕카문은 살해된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다리의 골절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부상당한지 15일 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적어도 투탕카문에 대한 사망 미스터리는 현대과학에 의해 진상이 거의 밝혀진 것이다.

투탕카문의 미라를 조사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이집트 고대유물보존위원회는 투탕카문의 사망 당시 나이는 종전에 알려진 18세가 아니라 19였으며 그의 키는 168센티미터, 사망 당시 영양 상태는 매우 좋았다고 발표했다.

 

<카르나본 경의 사망원인도 과학이 도전>

파라오의 저주는 투탕카문의 무덤을 공개한 장본인인 카르나본 경의 석연치 않은 사망부터 촉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투탕카문의 사망원인이 과연 파라오의 저주 때문인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학자들은 카르나본경의 사망원인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도전했다. 이들이 파라오의 저주를 풀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투탕카문 미라의 DNA분석이었다. 이것은 카르나본 경이 투탕카문의 미라에 있는 곰팡이 때문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근거한다.

 

발굴현장의 카르나본경과 카터

사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세포핵 속의 DNA가 상당수 분해된다. 하지만 미라처럼 수분을 제거하고 약품 처리가 된 경우 대부분 DNA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김용석 박사‘DNA가 중간 중간 깨어져 있다 할지라도 미라처럼 채취할 DNA 시료가 많을 경우 손상된 부위를 증폭시켜 카피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충분히 검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근래 봇물처럼 이집트 미라에 대한 연구가 쏟아지는 것은 미라의 DNA를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나본 경DNA로 먼저 추정해볼 수 있는 사인은 그 시대의 사망원인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던 감염성 질환이다. 학자들은 투탕카문이 당시에 유행하던 전염병에 의해 사망했다면, 박테리아 또는 바이러스 등 곰팡이류가 투탕카문의 조직세포 속에 극소량이나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잘 알려진 페스트균의 특정 DNA를 수만 배 증폭하는 시약을 투입했을 때 투탕카문의 DNA가 증폭되면 사망 당시 페스트에 감염되었다고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문의 무덤 벽을 처음으로 뚫었을 때 뜨거운 공기가 자신을 감쌌다고 말했다. 이것은 투탕카문의 관이 3000년 동안 밀폐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시 카터와 함께 무덤 벽을 열었을 때 함께 있었던 카르나본 경이 무덤 안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를 곰팡이에 감염되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미라에서 인체에 유독한 진균독을 갖는 곰팡이들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곰팡이류가 면역체계가 약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들 곰팡이균에 의한 카르나본 경의 사망 진위여부는 투탕카문의 무덤처럼 몇 천 년 동안 완벽하게 밀봉된 미라의 관을 발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적어도 투탕카문의 미라와 유사한 조건의 미라와 비교해야만 카르나본경이 곰팡이류에 감염되어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