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창덕궁(덤 창경궁) 답사

한국의 궁궐 : 창경궁(4)

Que sais 2021. 6. 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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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헌(迎春軒)

양화당 동쪽 너럭바위 너머에는 창경궁 내전 건물로 행랑으로 둘러싸인 영춘헌(迎春軒)과 영춘헌의 서행각인 집복헌(集福軒)이 있다. 건립 연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동궐도에 의하면 순조30(1830) 환경전, 경춘전과 함께 소실된 것을 순조 34(1834) 현재 낙선재 뒤편 언덕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영춘헌을 재건했다고 적었다. 재건하면서 과거와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집복헌(集福軒)

집복헌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거처. 동궐도에 의하면 이때의 모습은 영춘헌의 북서쪽에 위치했다. 중앙에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심 건물 뒤쪽으로 행각이 둘러싸인 폐쇄적인 마당을 갖춘 형태다. 그런데 순조 때의 화재로 소실된 영춘헌을 재건하면서 과거와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을 연결했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1735) 사도세자가 탄생했고, 정조 14(1790) 6월에는 순조가 이곳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또한 영춘헌에서는 정조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1800) 6월 사망하였다.

한때 창경원의 임시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영춘헌과 집복헌 2000년에 변형된 부분을 해체하여 복원했다.

 

 자경전 터와 풍기대(보물 제846)

영춘헌과 양화당 사이로 난 계단을 딛고 언덕에 오르면 북쪽으로 이 있다. 이곳이 정조가 즉위 이듬해인 1777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는 자경전(慈慶殿)이 있던 터다. 자경전의 첫 주인은 물론 헤경궁 홍씨였고,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물려받아 여기서 기거하다 사망했다. 자경전은 그후 100년 가까운 세월을 건재하다 고종 10(1873)의 화재로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 빈터에 1911일제박물관을 지었으며, 광복 후 장서각으로 쓰이다가 1992년에 녹지가 되었다.

 

풍기대 및 앙부일구

정조는 통명전 인근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건설했는데 이곳에는 경복궁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풍기대가 있다. 화강석을 다듬어 상 모양을 양각한 대를 아래에 놓고, 그 위에 면마다 당초무늬나 구름무늬를 아로새긴 팔각기둥을 세운 형태다. 높이는 2.28m 남짓이며, 팔각기둥 꼭대기 한가운데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다. 영조 8(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 풍기대는 보물 제846호다. 풍기대의 중간에 긴 장대를 꽂아 그 끝에 긴 천을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하던 기구인데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조 46(1770) 5월의 기록에는 측우기, 수표, 풍기가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측우기와 수표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궁궐 안과 서운관에 각기 풍기대가 세워져 오랫동안 바람도 관측했다고 기우기청등록(祈雨祈請謄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는 바람의 관측을 위해 나무에 풍기를 매어 사용했으나 당시에 창덕궁의 통제문, 경희궁의 서화문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바람을 관측하기 위한 깃대(風氣竹) 꽂았다는 것이다.

창경궁의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높이 228센티미터, 하부대석은 높이 91센티미터 넓이는 가로세로 모두 62센티미터이다. 상부 팔각기둥은 높이 135센티미터, 상부구멍 지름은 11센티미터 깊이는 33센티미터이다. 현재 풍기죽은 남아 있지 않으나 동궐도로 추정해보면 삼지창 맨 위에 꽂은 가늘고 긴 깃대를 풍기대의 구멍에 꽂았으며 깃대에는 가늘고 매우 긴 깃발을 달았다. 풍기대에 상풍간(相風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풍기대에 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예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풍기죽을 꽂아 놓았다.’

 

이 기록은 풍기대에 풍기죽을 꽂아 바람을 점쳤거나 측정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왕조농업기상학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창경궁에는 특이한 비석이 있다. 성종태실비.

궁궐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그 를 깨끗이 세척한 후 백자로 된 태항아리에 담아 지세가 좋은 곳에 태실을 조성하였다. 태실을 조성한 봉우리를 태봉이라 하며, 종종 유사한 지명이 눈에 띄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성종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에 있었다. 궁궐 안에 태실을 두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 5일제강점기 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대 왕의 태실을 통합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가장 상태가 좋은 성종 태실 하나만을 골라 석물 일체를 창경원 쪽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다른 왕들의 태실은 서삼릉(西三陵)의 태실 구역에 있다. 학자들은 성종의 주요업적으로 창경궁을 창건한 것을 꼽을 수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성종 태실을 이곳에 옮겨놓은 것도 그런 연관성 때문으로 추정한다.

 

8각7층석탑

 팔각칠층석탑 (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

창경궁 안 연못 옆에 보물 제1119팔각칠층석탑이 있다.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기단부(基壇部) 3단의 바닥돌 위로 높게 만든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으로 각 면마다 아름다운 문양들이 조각 되어 있다. 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두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 역시 연꽃무늬와 안상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 높직한 연꽃괴임돌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1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이다. 2층부터 낮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고 성종 원년(1470)에 이 탑을 세웠다.

 

 춘당지(春塘池)와 관덕정

창경궁 후원 영역에 있는 연못인 춘당지(春塘池)도 역사가 어울린 자리다. 표주박 모양으로 두 개의 못이 연결된 것인데, 위쪽에 있는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이고 아래 연못과 그 주변 일대는 왕이 친히 농사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農政)을 살피던 내농포(內農圃)가 있던 자리다. 궁궐의 후원 깊숙한 곳에 이처럼 논을 만들어 놓고 왕이 직접 농정을 살폈다는 것은 조선왕조가 국가경제의 근간농업 생산력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춘당지는 연산군이 서총대(瑞蔥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한 곳이기도 하다. 동궐도에 의하면 이 일대에 1개의 연못과 11개의 논이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07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물러나게 한 뒤, 순종이 즉위와 더불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된다.

 

춘당지

연못 속의 섬과 길이 5.94m,  2.56m다리 1984년에 조성된 것이다. 연못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해방 이후 '창경원' 시절에는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던 유원지였다. 춘당지의 동북쪽을 오르다보면 숲 속으로 자그마한 전각이 하나 보인다. 왕이 활을 쏘던 장소인 관덕정(觀德亭)이다. 인조 20(1642) 창건될 당시 이름은 취미정(翠微亭)으로 현종 5(1664)에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관덕이란 이름은 예기 활 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는 글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위 동북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성균관으로 통하는 집춘문(集春門)이 있다. 역대 왕이 문묘(文廟), 곧 성균관의 대성전을 참배할 때 드나들던 문이다.

 

⑱ 과학의 문

창경궁과 국립어린이과학관 사이에 놓여 있는 문으로 1973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건설되었으며 박대통령의 친필이 걸려있다.

 

 월근문(月覲問)

홍순민 박사는 창경궁을 관람하면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월근문을 찾아보라고 한다.

정조는 즉위한 후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란 존호를 추상했고 그 사당을 경모궁이라고 명명했으며 개건 공사를 마쳤다. 그런데 경모궁은 사당이라기보다는 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큰 건물이었다. 이 경모궁 자리가 바로 현재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다.

정조는 창경궁도 수리하면서 경모궁에 드나들기 쉽도록 월근문이라는 문을 별도로 만들었다. 그 월근문을 통해 정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모궁을 참배했다고 한다. 현재 월근문은 창경궁의 궁장 모퉁이, 서울과학관 옆에 남아있다.

 

<창경원으로의 변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에 대해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하며 궁내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하여 유원지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일제가 순종과 조선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창경궁을 훼손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설이 착수된 것은 1907년이며 준공은 1909이다. 엄밀히 말해 창경궁 내 동물원과 식물원은 한일합방 이전, 즉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이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던 1909년에 개장했다.

 

식물원

일본인 후쿠바가 설계했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을 담당하였다. 건축 당시에는 170여 평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목조 식물원이었으며, 각종 희귀식물을 전시하였다. 그러므로 1909 11 1일 개원식에는 순종이 주인 자격으로 내빈을 맞았다.

더불어 당시 창경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들은 이씨 왕가의 개인 자산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창경원은 순종과 그 가족만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후 일반에게 공개된 시민공원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창경궁은 처음부터 왕조의 부속궁궐로 건설된 것으로 한 번도 본궁이었던 적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창경원 개장조선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볼 근거도 없다는 설명도 된다.

여하튼 창경원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수십 년간 서울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심 공원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는 창경궁 복원 계획에 따라 일제의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철거하고 고증을 거쳐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궁 안에 있던 벚나무는 모두 뽑았으므로 유명한 창경궁의 벚꽃은 찾기 어렵다. 대신 잘 가꿔진 소나무가 자리 잡았다.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2004등록문화재 제83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1, 2단계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2019 1 1일부터 덕수궁과 함께 상시 야간개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

독특한 발명품, 창경궁 풍기대, 기술과미래 제24, 2009 11/12

창경궁, 위키백과

창경궁, 나무위키

한국의 미(14) : 궁실민가,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

우리 궁궐 이야기, 홍순민, 청년사, 2002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