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중에서 남다른 격식을 갖고 있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 사적 207호)이다. 제26대 고종(1852〜1919) 및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홍릉(洪陵)과 제27대 순종(1874〜1926) 및 순명황후 민씨(1872〜1904), 순정황후 윤씨(1894〜1966)의 유릉(裕陵)이다. 이는 당대의 품격이 조선의 왕이 아니라 황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중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황제(皇帝)’가 있었는데 우선 고종과 순종이 황제였고 더불어 무려 8명이 황제다. 이들 8명은 추존된 황제로 생전에 왕위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영조의 첫번째 왕자), 장조(영조의 두 번째 왕자), 문조(순조의 왕자)를 각각 진종소황제, 장조의황제, 문조익황제로 추존했으며 정조, 순조, 헌종, 철종도 각각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 추존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과 순종의 세계(世系)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추존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총 8명의 황제가 있으므로, 이들이 묻힌 능을 왕릉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황릉(皇陵)’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김두규 박사는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이란 표현도 ‘조선 황릉과 왕릉’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고종과 순종은 보다 엄밀히 얘기하면 조선의 법통을 계승해 선포한 대한제국의 황제들이지 조선의 황제는 아니므로 ‘조선왕릉’이라면 고종과 순종을 제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곳에서는 이런 명분을 따지지 않으므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을 함께 다룬다.
① 홍릉(洪陵)
홍릉은 제26대 고종(1852〜1919) 및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릉이다. 고종은 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조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익종)를 고종의 양부로 하고 자신(신정왕후)을 모친으로 입적해 왕위를 이었다. 적통으로 왕위를 받았다는 서류처리에 완벽을 기한 것이다.
고종은 조대비에게 수렴청정,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조선시대 역사상 살아있는 왕의 생부(生父)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다. 그전에 있었던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은 모두 사후에 추증(追贈)된 대원군이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천거했다. 대원군이 8살의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란 민비를 왕비로 간택한 것은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의 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해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하자 그녀는 민씨 척족들을 활용하여 강력한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섰다.
고종의 재위 시에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가 악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했으며 아관파천 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고종은 1897년에는 주변의 국제관계의 영향으로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고종에게 씻어지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대한제국이 탄생하기 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민비가 살해된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적극적인 침략 공세를 편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민비 세력을 거세하려고 했다. 민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배후에 있는 개화 세력에 대항했다. 그러나 조선의 친러 경향이 강해지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민비와 척족,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인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참령(參領)으로 봉직하던 우범선(禹範善, 우장춘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미우라가 직접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비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鹿苑)에서 불태웠다. 한 나라의 국모가 외세에 의해 실로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우범선은 민비가 시해된 후 정국이 바뀌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된다.
민비가 살해되는 경위가 어떻든 민비의 사망은 고종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왕비조차 일인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무능한 고종이었기 때문에 결국 조선왕조가 일제에 멸망한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의 당사자이므로 일반적으로 고종이 매우 무능력했던 군주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의 학계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종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였다는 점이 알려진다.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
또 고종의 황제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 논설은 감격적인 희망을 장식했다.
‘광무 원년(1897)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 동안 청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으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사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이런 기록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고종은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찾아 볼 수 없지만 고종에 대한 평가는 그 빛과 어둠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가 멸망되는데 핵심 군주였기 때문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민비가 일제에 살해된 지 6개월 후 고종과 왕세자(순종)가 두 대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아관파천이다. 그리고 같은 날 고종은 온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죽었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민비를 폐서인으로 삼은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으니 취소하라는 뜻이다. 아관파천으로 만들어진 좁은 틈새로 고종은 본격적인 홀로 서기를 준비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개혁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심찬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고종 역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황제 위를 물려주고 꿈꾸던 근대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일제 강점기이므로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 장으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총독부가 ‘대훈위 이태왕 훙거(薨去)’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국장이 아닌 이왕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고종의 능이 남다른 것은 중국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 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릉이다. 그러므로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조선의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의 왕은 천원지방(天元地方, 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연못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곳의 원지원은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이고 가운데의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있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되었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는 황제릉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홍릉의 봉분 앞의 석물은 황제의 능묘이므로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았고 혼유석 1좌, 그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혼유석에 향로석이 함께 놓인 것이 특징이다. 반면 순종 유릉에는 향로석이 없다. 일반적으로 향로석은 정자각이나 침전을 따로 건립하지 않은 종실이나 사대부묘에서 볼 수 있는 의물인데 홍릉의 향로석은 석상의 중앙 앞에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내계의 양 가장자리에 1기씩 위치하는 망주석은 팔각의 형식을 가지며 높이는 각각 283cm, 284cm다. 각각 원주-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구성되었는데 대석에 주신을 끼워 결구한 형식이다. 주신에는 세호가 조식되어 있다. 동측 망주석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으며 머리 부분이 염의에 걸쳐져 있다. 서측 망주석 세호는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반대로 꼬리 부분이 열의에 걸쳐있다.
장명등은 사각형식에 전체높이는 278cm정도다. 매우 깔끔한 선처리로 마치 기계로 조각한 듯한 감을 느낄 정도로 선이 날카롭게 조형되었다. 개석에 비해 체석의 폭이 작아져 앞 시기 사각 장명등에 비해 날씬한 비례를 지닌다.
홍릉은 우리나라 최초의 황제릉으로 왕릉에 당연히 설치되는 정자각도 변형되어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이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침전은 그동안 조선 왕조의 5칸 정자각 제도를 차용하되 배위청을 그 내부로 들인 건물로 침전 전면에는 넓은 월대를 설치했다. 침전의 천장부는 층을 달리하여 반자를 설치했고 2고주 9량가다. 지붕은 4면 모두 겹처마를 설치한 팔작지붕으로 포작은 출목이 있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의 내림마루에 양상도회했으며 용마루 좌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사면 내림마루에 용두를 설치하고 잡상을 각 5개씩 설치했다. 침전의 단청은 외부를 모로단청, 내부를 금모로단청으로 하였다.
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눠져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돼 있던 기존 왕릉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돼 있다.
참도 좌우로 석물이 도열하듯 서 있는데 침전 가까이에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서로 세워져있다. 현재 명 효릉에는 석각 16쌍, 명13릉에는 20쌍이 남아있는데 고종은 석수 7쌍과 석인 2쌍으로 숫자를 줄여 대한제국에 맞는 황제릉으로 건설했다.
여하튼 홍릉의 특이한 석물 배치 순서는 기존의 왕릉과 크게 달라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색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각기 좌우 1쌍인데 석마만은 2쌍으로 다른 상들에 비해 키가 작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왕릉과는 다소 다르다. 문인석은 건릉(乾陵), 수릉(綏陵)처럼 키가 크고(대석제외 2,984mm) 머리에 금관을 썼는데 너무 매끈하여 오히려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무인석은 갑주를 갖추고 검을 수직으로 세운 도상으로 문인석보다 월등하게 크고 높다(대석 제외 3,050mm). 얼굴은 다소 평면적인데 콧등선이 날카롭고 콧날개가 펑퍼짐하다. 그러나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와 ‘八'자형의 콧수염은 다소 인위적이라 무석인의 위엄을 표현하지 못했다.
홍릉에도 예감과 산신석 모두 있다. 홍릉의 예감은 일반적인 능제에 따라 침전의 우측 뒤편에 자리한다. 왕릉의 예감이 장대석을 다듬어 방형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통돌의 가운데를 90mm정도 파내어 만들었다. 예감 크기는 1,050 x 910mm에 지면위로 노출된 부분의 높이는 360mm다. 예감의 남쪽 석재에는 중앙에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예감은 덮개를 고정하기 위해 북측면석에 2개, 남측면석에 1개의 구멍을 내는데 예릉의 예감에는 남측면석의 구멍만 확인된다. 산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상석인 산신석은 침전 뒤편 예감과 대칭되는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모양은 장방형으로 크기는 1,420 x 1,040mm, 지면 위로 노출된 높이는 470mm다. 산신석의 모서리는 사선으로 갈아 마무리했다.
고종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이유야 어떻든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사망했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는 설이 나돌아 국장일인 3월1일을 기해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온 나라를 울렸던 백성들의 함성은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인 동시에 비명에 떠난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한다. 고종의 능을 이곳에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던 민비의 능도 함께 모셔와 1919년 3월 4일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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