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반격>
숙종의 반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689년 1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겠다고 밝힌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아들이 태어난 지 단 4개월 후다. 원자는 상속권, 즉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다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서인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서인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앞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다음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숙종실록』에 서인들이 바로 이 일을 언급했다.
‘왕자가 지금 강보에 계시는데, 갑자기 명호를 정한다면, 어찌 너무나 크게 서두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선묘조(宣廟朝)에 의인왕후께서 저사(儲嗣)가 없으시어 광해가 어질다고 하여서 아들을 삼았으나, 명호에 이르러서는 임진년에 비로소 정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남인조차 숙종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며 신중해야한다고 충고한다. 사실 당시 숙종은 30대, 인현왕후는 20대 초반이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인현왕후는 궁에 들어온 지 7년이나 되었음에도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여하튼 타협안으로 왕자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나이이므로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했지만 숙종은 이미 결정된 일이라며 못을 박았다.
그러자 곧바로 숙종의 뜻에 딱 알맞는 상소가 올라왔다. 1689년 1월 14일, 유생 유위한이 올린 상소로, 명나라의 정통제는 낳은 지 4일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고, 정덕제는 낳은 지 7개월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음을 보면 결코 서두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숙종은 상소문을 읽고 기뻐하여 상소가 들어온 다음날 원자의 정호를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을 희빈(정1품)으로 삼았다.
그러자 당시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상소를 올렸다. 송나라 철종은 10살에, 번왕의 지위에 있다가 철종의 아버지인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말에 숙종은 명나라 황제도 4일 만에 정호한 일도 있는데, 송시열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했다. 더구나 원자 정호를 하기 전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이미 정호가 정해졌음에도 이에 시비를 건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그야말로 극단의 처분을 한다. 송시열에게 귀향을 명하고 귀양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약을 내려서 죽이며 당시 서인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김수항도 진도에 위리안치 됐다 사사된다.
이후 서인들의 자리는 반대파인 남인들로 채웠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세력이 장옥정을 디딤돌로 삼아 마침내 조정을 장악한 것이다.
그런데 숙종으로 보아 기사환국의 본심은 신하들의 숙청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숙종은 새로 조각된 신하들 앞에서 느닷없이 중전의 투기를 거론했다. 장희빈이 궁에 되돌아와 후궁이 되었을 때 인현왕후가 돌아가신 부왕과 대비를 들먹이면서 헐뜯었다는 것이다. 『숙종실록』에 숙종이 이야기한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있다.
‘중전이 꿈에 선인 현종과 선후인 현열대비를 만났다면서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궁에 두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부터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거짓으로 꾸며 왕을 놀라게 하는가? 두 분이 숙원은 아들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럼 원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숙종은 민가에서도 거짓말로 시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왕가라면 어떻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또한 인현왕후의 인성이 여후(呂后)와 같다고 비난을 한다. 이 역시 『숙종실록』에 나타난다.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 후에 불령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하셔도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폐출에는 서인은 물론 남인도 반대했다. 심지어 남인에 속하는 권대운은 부인들은 원래 편협한 성품들이라 투기하지 않는 여자가 드물다. 살면서 잘 해보면 좋아질 것이라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이 완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견지하자 일부 신하들은 정 쫓아내고 싶으면 별궁에 두고 스스로 반성할 시간을 주자고 했다. 그러나 숙종의 생각은 전혀 변화됨이 없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쫓겨난 자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상소문 중 몇 대목을 트집 잡고 저의가 뭐냐며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숙종은 압슬 즉 사기조각 위에 무릎 꿇리고 허벅지를 무거운 돌로 누르는 고문은 물론 불에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낙형도 모자라 또박또박 말대꾸한다며 몽둥이로 입을 두둘기게 했다. 고문당한 이들이 오래 못살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숙종은 앞으로 중전 폐출에 반대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신하들도 더 이상 왕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1689년 5월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고 곧이어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숙종의 전지가 내려졌다. 역관을 부모로 둔 궁녀 출신 신데렐라 왕비의 탄생이었다.
이 당시 숙종은 박태보, 오두인 같은 반대파를 압슬, 낙형 등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죽였다. 종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모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고, 여동생 명안공주는 시아버지가 휘말린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원한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장희빈이다.
그런데 숙종에게 미인은 장희빈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숙종은 1693년 ‘미녀 왕비’를 제쳐두고 궁에서 일하는 무수리 최씨 여인을 가까이 했다. 무수리는 궁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아 나인의 하녀 즉 궁비(宮婢)들이었다. 최씨는 물 긷는 무수리였는데 물 긷는 무수리가 왕의 눈에 드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숙종의 눈에 무수리 최씨가 발탁되었고 놀랍게도 그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후일의 영조다.
숙빈 최씨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이는 영조의 어머니인데 출신이 무수리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의 출생이 매우 모호하다. 전남 담양군 월산면에 소재하는 용흥사에 숙빈 최씨의 이름은 복순으로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린 가족과 함께 피해왔다고 적혀있다. 부모는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녀가 산신령의 인도를 받아 나주목사를 우연히 만났고 나주목사의 부인이 소개하여 인현왕후의 여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현왕후의 여종으로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를 적은 다음과 같은 야사도 있다. 인현왕후는 한양의 감고당 현재의 덕성여고 자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발령받았다. 그는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영광으로 가다가 거산리에 있는 대각교에서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걸인 한 명을 발견했다. 숙빈 최씨로 그녀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방황하다가 대각교까지 왔는데 심성이 고운 인현왕후가 숙빈 최씨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함께 데려가자고 말했다. 민유중이 왜 그녀를 데려가느냐고 묻자 그냥 두면 굶어죽을 것이라고 말하여 데려갔고 인현왕후의 여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소 고약한 전설도 있다. 태인 지역 일대에서 채록된 이야기다.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김춘택이 한양으로 올라온 후 간음을 하다가 임신을 하자 대궐로 들여보내 숙종의 총애를 받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사실이라면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므로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다. 이인좌가 이 소문을 경종의 독살설과 함께 거병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런 루머는 모두 소론의 과격파들이 유포한 것으로 추정한다.
숙빈 최씨는 한양의 여경방에 살았는데 영조는 왕이 되자 숙빈 최씨의 생가를 자주 방문했고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왕이 추모동에 거둥하여 비각을 살피고 여경방의 사제(私弟)를 두루 들렀다. 동(洞)은 곧 인현왕후가 탄강(誕降)한 옛터이고 방(坊)은 곧 숙빈 최씨가 강생한 옛집이다.’
인현왕후는 추모동, 숙빈 최씨는 여경방에서 태어났는데 두 곳 모두 경복궁 이웃이다. 그러므로 숙빈 최씨가 걸인일 때 인현왕후를 만난 것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인현왕후가 16살 때 조선에 천연두가 휩쓸어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국모의 자리가 비었다. 숙종이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이는데 이때 선택된 여인이 인현왕후로 그녀는 여종 최씨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숙빈 최씨는 사실상 장희빈 몰락의 가장 큰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왕에게 몰래 고하였다.’
한마디로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사망 요인을 장희빈의 굿으로 포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사건은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 암투가 결국 두 여인 모두 옳지 못함 삶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이 사이에 숙빈 최씨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한 숙빈 최씨는 이런 비난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는 아들인 영조가 왕이 되자 그녀가 무수리였다는 것이 오히려 크게 부각되어 동정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이수광은 이런 면을 볼 때 조선의 한 세대를 풍미한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씨 중에서 숙빈 최씨가 최후의 승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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