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용도의 환국>
조선조에서 내용은 어떻든 중전 폐출에 대한 민심이 나빠질수 밖에 없는데 숙종은 이를 숙종답게 처리했다. 인현왕후가 쫒겨난 지 5년 만인 1694년 숙종은 대대적인 정계개편에 돌입한 것이다. 숙종은 조선의 권력이 또 하나의 붕당에 의해 잠식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특유의 국면 전환카드를 준비한 것이다.
우선 자신이 본의 아니게 인현왕후를 쫓아내었다며 철저하게 오리발내밀었다.
한마디로 인현왕후를 몰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들을 퇴출시키고 그녀를 지키려다 화를 당한 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사전 정치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사랑을 표명했다.
한마디로 왕으로서 신망이 떨어진 것을 인현왕후를 받아들여 민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어느 정도 쇼맨쉽도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사랑으로 포장했다. 그는 손수 서찰을 써서 전처에게 보냈는데 현대로 보아도 연애편지와 다름없다. 1694년 4월 12일 『숙종실록』의 글이다.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당시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들은 숙종의 원맨쇼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은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에 대응하는 남인의 민암, 이의징 등은 복위운동을 전개하는 자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참에 화근인 민씨를 죽이고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이들이 화를 불러온 것은 숙종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송시열이 숙종의 뜻을 읽지 못하고 숙종을 공격하다가 소위 바가지 쓴 것과 다름없다.
숙종이 수소문해보니 인현왕후는 사가인 감고당에서 죄인처럼 살고있었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왕래를 철저하게 금하고 얼굴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고당을 일부러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한 길이 넘게 자랐다고 한다.
1694년 4월, 즉 기사환국 5년 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왕비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권력은 남인에서 온건 서인인 소론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한마디로 다시 서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숙종이 처음부터 인현왕후를 완벽하게 복위시키지는 않았다. 숙종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다분했다는 뜻이다. 여하튼 당시 집권세력인 소론은 왕자가 왕위를 이으면 어머니인 장희빈이 중요하다며 숙종의 결정에 반대했고 노론은 인현왕후의 완벽한 복위를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숙의였던 후궁 최씨가 왕자를 낳았다. 장희빈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고립무원인데 그녀에게는 세자가 있었다. 세자에 의지하여 기다리면 결국 자신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세자의 어머니임을 내세워 복위한 왕비 민씨를 전혀 대접하지 않았다.
궁녀들도 민씨를 지지하는 세력과 장씨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원수처럼 지냈는데 숙빈 최씨는 원래 인현왕후 측이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공교롭게도 종기로 고생하기 시작했고 왕자도 시름시름 앓았다. 조선시대에는 종기가 무서운 병인데 인현왕후는 종기로 거동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자 인현왕후도 죽기 전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은 뭔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오빠인 민진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 궁인 시영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아뢰어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엄밀하게 말하면 인현왕후가 자신의 죽음을 장희빈에게 전가하면서 오빠에게 이를 알려달라는 뜻과 다름없다. 한마디로 서인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어준 것은 인현왕후라 볼 수 있는데 1701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강타가 터진다.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것이라 믿고,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뒷쪽 별채에 신당을 차렸다. 이에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가 고변한 것이다. 숙종의 행동에 장희빈이 분통을 터트려, 처소 한 켠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형에 바늘을 꽂고 초상에 화살을 쏘는 저주의 굿판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역전된 사건>
장희빈의 신당 사건에 대해 보고를 들은 숙종은 숙종 27년(1701) 9월, 즉각적으로 취선당 궁녀들을 친국하겠다고 발표했다. 왕이 궁녀를 친국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역모와 관계된다하더라도 왕이 궁녀를 친국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그 처리를 내명부에 일임하거나 의금부에서 다루었다.
그러자 승지 서종헌과 윤지인, 부응교 이징귀 등이 갑술년 초에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의 죽음을 용서한 것은 오로지 동궁을 위한 것임을 지적했다. 특히 장희빈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자를 낳은 장희빈을 이렇게 대우한다는 것은 동궁에 대한 염려를 간과한 것이니 왕이 직접 친국하겠다는 명을 거두어달라고 했다.
신하들이 숙종의 친국을 거두어달라고 했지만 숙종이 친국을 하겠다 한 것은 그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으로 양보할 사항은 아니다. 여하튼 다음날 궁녀에 대한 친국이 시작되었다. 친국 대상은 궁녀는 물론 무당, 무당의 아들과 딸들도 포함되었다. 이날의 친국은 인현왕후가 사망한 날로부터 40여 일 뒤의 일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장희빈이 인현왕후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 무당을 동원하여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소원대로 인현왕후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친국으로 이를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숙종의 취선당 궁인들에 대한 가혹한 국문이 시작되었는데 장씨 휘하 나인들은 장희빈의 말처럼 세자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장희빈이 기도하는 용도로 활용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숙종이 원하는 것은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숙종은 장희빈의 꼬투리를 잡는 것이므로 자신의 목적하는 대답이 나오기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극심한 고문에 일부 나인들이 결국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했다.
다소 요상한 법도이지만 인현왕후도 아프고 세자도 아프다면 웃어른인 인현왕후가 우선이므로 희빈 장씨가 아픈 세자를 위해 사사로이 궁 밖으로 나가 절에서 불공을 드리거나 치성을 드리더라도 허물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자라 하여도 왕비인 인현왕후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왕비 직속 내명부의 후궁으로 왕비에서 격하되었으므로 희빈 장씨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결국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당시 집권 세력인 소론은 왕세자의 어머니라며 장희빈의 처형을 반대했다. 특히 장희빈이 왕의 후궁으로 격하되었지만 궁궐에서 죽을 수 없으니 사약을 받더라도 사가로 나가서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관원이 사약을 들고 사가로 가야 하지만 이 역시 법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진행 과정은 어떠하든 장희빈은 결론적으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이것을 ‘무고의 옥’이라 부른다.
사건은 장희빈 혼자 사사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숙종은 관련된 궁녀와 무당들을 모두 죽였다. 궁녀들은 군기시 앞뜰에서 참수되었다. 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궁녀들이 죽은 사건이며 궁녀들이 붕당의 여파로 희생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희빈이 아들인 경종의 고환을 상하게 하며 이씨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거나,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겠다면서 패악을 부려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강제로 먹였다는 야사가 있지만 이는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 등의 죽음으로 장희빈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서인 계열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인식한다.
여하튼 숙종은 친국을 통해 장희빈의 죄가 모두 밝혀졌다며 총알같이 사약을 명했다. 명분은 간단하다.
‘첩의 본분을 망각하고 왕비에게 방자했다.’
이것이 숙종이 장희빈에게 갖다 붙인 죄목인데 장희빈도 숙종의 왕비 즉 본부인이었으므로 이를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사회에서건 한 번 왕비는 영원히 왕비다. 그런데 숙종이 전 왕비를 자신의 첩이라 부르면서 현 왕비에게 첩이 본분을 망각했다고 비방한 것은 사실 장희빈을 내칠 명분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장희빈이 악녀로 천하의 악당으로 몰린 이유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지만 그녀가 조선조에서 그동안 전례가 없는 ‘신데렐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신분 서열이 명백했던 조선왕조에서 놀랍게도 사족이 아닌 중인 신분임에도 왕비에 오른 것이다. 이런 ‘신데렐라 왕비’의 출현은 조선의 이율배반적인 사회질서를 원천적으로 뒤흔드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숙종을 포함한 지배층 남성이 임의로 본부인과 첩을 갈라 중인이 왕비가 되었다는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원래 중인이므로 본성이 나빴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숙종이 생각하는 환국의 희생양으로 왕비가 되었던 장희빈을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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