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NO>
다소 정리하여 설명하면 장희빈 사건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지지자들이 두 왕비를 둘러싸고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우선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 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거세게 벌였다. 여기에서 숙종의 처신이 중요한 변수인데 놀랍게도 숙종이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고 숙종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장희빈을 재단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한마디로 숙종이 서인들의 권력에 의심을 가지면서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 세력을 우대했으나 권세를 잡은 남인들도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권력을 행사하자 이를 제거해야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숙종이 자신의 왕권 유지의 절대 명분을 만들어줄 희생양으로 왕비를 선택한 것이다.
여하튼 숙종은 1694년, 즉 기사환국 5년 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왕비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러면서 권력은 남인에서 온건 서인인 소론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한마디로 다시 서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장희빈 사건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사약을 받기 전에 그녀가 경종의 고환을 상하게 하며 이씨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는 내용이다. 더불어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겠다면서 패악을 부려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강제로 먹였다는 이야기도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는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 등의 죽음으로 장희빈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서인 계열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인식한다.
숙종의 위장 쇼는 남다르다.
장희빈이 죽자 그는 왕후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했고, 장례에 세자 부부 내외도 참가케 했다. 왕의 자식은 후궁 소생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자녀가 되므로 생모를 위하여 망곡, 즉 슬피 우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는데 세자는 숙종의 특명으로 자신의 생모를 위한 장례에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장례기간도 왕후의 예에 준하는 5개월, 세자의 상복도 3년 가까이 입도록 해주었다. 이를 볼 때 희빈 장씨는 사실상 왕후 급으로 대우받은 것이고, 경종 역시 사실상 적장자로서 친모의 상을 치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병주고 약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왕가의 공식적인 입장은 숙종의 제2계비는 인원왕후이고 경종은 숙종의 서장자로서 계승했다는 설명이지만 영조 시대 때 경종은 숙종의 적장자, 장희빈은 숙종의 제2계비로 기재한 자료들도 발견된다. 여하튼 장희빈의 사건은 매우 큰 파장을 초래하여 이후 후궁이 왕비로 책봉되는 일이 금지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 장희빈이 사라지자 후궁에서 왕비를 받아드리지 않고 인원왕후에게 새로 장가를 들었다.
왕릉에 대해 이야기한다.
명릉의 홍살문은 도시계획의 여파로 다소 불편한 곳에 위치하지만 이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자각까지의 참도는 조선왕릉 참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도와 어도로 되어 있는 참도 옆에 신하들이 걸어가는 ‘변로’가 조성되어 있다.
명릉은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 왕릉의 동원이강의 원칙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전면에서 보아 좌상우하의 상하 서열에 따라 좌측이 높은 자리이므로 합장릉ㆍ쌍릉ㆍ삼연릉 모두 좌측에 왕릉을 두고 있는데 서열이 맨 뒤인 인원왕후가 가장 높은 자리인 좌측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전에 숙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던 인원왕후가 숙종의 능에서 400보 떨어진 곳에 묏자리를 잡아놓았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영조 33년(1757) 71세로 사망하자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은 석물의 크기가 실물 크기와 비슷하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러 두 봉분을 연결했는데 앞에서 보아 좌측이 숙종, 우측이 인현왕후 민씨다.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위한 문자를 음각으로 새겨 넣었는데 풍화가 심하지 않아 문자를 알아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능역의 중앙에 세워진 장명등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태조 건원릉 이래 약 300년 동안 8각 장명등을 설치했는데, 이런 전통이 숙종에 의해서 4각으로 바뀐 것이다.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고 장릉(莊陵)을 제2대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도록 했는데, 이때 왕릉 역사상 처음으로 4각형 장명등이 설치되었고 자신의 능에도 4각 장명등을 세웠다. 이후에도 4각 장명등은 경종의 의릉, 영조의 원릉, 정성왕후의 홍릉, 헌종의 경릉 등에도 설치돼 그 전통이 계승됐다.
숙종의 능과 인현왕후 능침 사이 양측에 문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는데 다른 능의 문인석과 달리 키가 170센티미터 정도로 당시 사람의 실물 크기와 흡사하다. 실제로 조선 왕릉 중 석물 크기가 가장 작은데 이는 숙종의 명에 의해 간소한 능 조영제도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높은 관을 썼으며 키에 비해 과장돼 있다. 소매에는 깊고 강한 곡선, 등 뒤에는 가는 실선, 팔꿈치에는 짧은 두 개의 선을 주름으로 처리했다. 사각형의 관대에는 꽃잎 문양이 넣어져 있다. 무인석은 미소를 머금고 추켜진 입, 어깨까지 내려온 귀, 등으로 늘어진 투구, 이마에 그어진 투구의 파상선 등이 특징으로 18세기 양식을 볼 수 있다. 부장품의 수량도 줄이고 석물의 크기도 실물 크기로 하여 다소 작게 보이지만 조각 솜씨는 매우 사실적인 편이다.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22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가 66기다. 그런데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그리고 며느리인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그리고 대빈 장씨(장희빈)의 묘가 있어 숙종의 가족릉과 같다.
조선왕실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장희빈의 대빈묘(大嬪墓)는 서오릉의 경릉에서 홍릉으로 들어가는 좌측의 가장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묘(墓)’라는 호칭은 원래 대군이나 공주, 옹주, 왕의 생모가 아닌 후궁 등의 무덤에 붙는 호칭이며, 왕을 낳은 생모의 경우 그 무덤을 묘에서 원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희빈의 경우 왕의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폐비가 된 관계로 그 무덤은 ‘원(園)’이 아닌 ‘묘(墓)’로 칭한다.
봉분 주위를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명등과 문인석 한 쌍만 배치되어 있다. 보통 후궁들의 묘소 중 ‘원(園)’에는 문인석과 석마 등이 갖춰져 있으나, 이곳 대빈묘에는 석마도 없다. 희빈의 묘는 서오릉 경내에서도 매우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의 전체적인 꾸밈새, 작은 석물 등이 일반 사대부 집안 묘보다도 초라하여 희빈 장씨에 대한 후대 조선인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경릉을 지나 홍릉으로 넘어가는 길 좌측에 있으므로 다소 초라하게 보이지만 과거와 달리 장희빈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도 많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장희빈이 1701년 10월, 오빠인 장희재와 함께 사사된 후 처음에는 양주 인장리(仁章里) 즉 현재의 구리시 일대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묘자리가 불길하고 결점이 많다고 하여 숙종 44년(1718) 천장할 것을 명한다. 이후 경기도 내에서 길지를 찾아다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인 광주 진해촌(眞海村)으로 옮겼다. 다음해의 천장 때 세자(경종)와 세자빈 어씨(선의왕후)가 망곡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희빈의 묘가 천장될 때에 희빈의 첫 며느리인 단의빈 심씨 즉 단의왕후의 상중이었음에도 망곡례를 거행한 것은 세자가 상중에 생모의 묘를 옮기면서 생모의 복권을 시도하려 한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희빈은 경종 2년(1722),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사약을 받아 본래 묘호는 희빈장씨묘였으나, 경종2년(1722)에 신임사화로 노론을 정계에서 축출한 경종이 어머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여 묘호가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묘다. 그러므로 절기마다 제사를 받는다.
그런데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므로 서오릉의 숙종 곁으로 이전하여 현재처럼 숙종의 4왕비 모두 서오릉에 위치한다. 대빈묘 봉분에서 약 7m정도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로 묘역을 눌러야 희빈의 억센 기를 누를 수 있다.’며 가져다 놓은 바위라는 소문도 있다.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17]서오릉-명릉 (19대 숙종·인현·인원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10.01.21.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0.10.25
「숙종」, 김범, 네이버캐스트, 2012.02.27.
「[조선판 신데렐라’ 장희빈이 악녀로 몰린 진짜 이유」, 권경률, 염상균, 2018.11.17.
「[세계유산 조선왕릉 - 고양 서오릉의 명릉(高陽 西五陵의 明陵, 사적 제198호)]」, 문화유산여행, 문화유산채널
「희빈 장씨/생애」, 나무위키
「대빈묘」, 위키백과
『조선 최대의 과학 수사 X파일』, 이종호, 글로연, 2008
『우리도 몰랐던 한국사 비밀 32가지』, 이수광, 북오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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