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 184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0) 계림월성지구 석빙고(1)

https://youtu.be/mhcZ8MPIek0 인류가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게 된 것은, 1876년 독일의 칼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사용하는 흡수식 냉장장치를 발명한 이후부터였다. 1913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가 미국에서 출시된 후부터 냉장고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얼음은 천연 얼음뿐이었다. 그러므로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하는 방법이 유일한데 기원전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짓고 여기에 얼음을 넣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높은 산에서 가져온 눈을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이나 흙, 퇴비 등으로 열을 차단한 저장소를 만들어 포도주를 차게 보관하기도 했다. 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9) 계림월성지구 월성

월성(사적 16호)은 근래 경주에서 각광받는 지역이다. 그것은 2014년부터 발굴 중인 월성에서 3〜10세기의 무려 10만 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큰 명문 있는 목간·기와·토기부터 배·방패·그릇·국자·빗 등 목제품, 토우, 금동 장식물, 철제물, 육지와 바다동물 뼈까지 망라한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대 발굴 조사로 불리는데 그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20년이 걸렸지만 월성은 신라 왕궁이라는 중요도를 보아 30년, 50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사, 나아가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월성은 101년에 쌓기시작하여 935년 통일신라가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신라 ..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8) : 계림월성지구 계림

첨성대의 과학성을 본 후 월성지구에 있는 계림으로 향한다. 글로만 보면 먼 곳에 있는 곳처럼 보이지만 지척지간이다. 계림은 나정과 더불어 신라인들이 매우 중요시하던 장소이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김알지는 신라 미추왕(262~284)과 내물왕(356~402)의 선조인데 『삼국사기』 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는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탈해 이사금때 시림(始林)에서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7)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3)

https://youtu.be/IBNGtg0q2c8 첨성대의 형태가 남다르므로 남다른 수학이 들어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첨성대의 수학을 보자. 첨성대의 기단의 대각선과 첨성대의 높이의 비는 약0.8 , 즉 4/5이며, 정자석 한 변과 1단 원의 지름의 비는 약0.6, 즉 3/5이다. 그리고 최상단의 원지름과 중앙부에 있는 창의 한 변 길이의 비는 약3이다. 1, 4/5, 3/5은 원주율과 피타고라스정리에서 나오는 3:4:5의 값이다. 이것은 첨성대가 그 시대 철저한 수학적 구조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라하면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들 원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구고현의 정리’라고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6)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2)

https://youtu.be/IBNGtg0q2c8 첨성대의 효용도가 제기되자 강력하게 주장된 것 중 하나는 첨성대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 제단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장은 일견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지만 곧바로 반론에 부딪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일월제 즉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지냈고 별에 대한 제사인 영성제를 영조사 남쪽에서 지냈다고 했다. 말하자면 첨성대가 아닌 딴 곳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므로 당연히 첨성대는 제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태양빛에 의해 생기는 물체의 그림자 길이를 재서 태양의 고도를 알아내는 규표(圭表)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규표설은 조위(曺偉, 1454〜1503)의 칠언율시에 나온다. 그는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5)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1)

https://youtu.be/IBNGtg0q2c8 황룡사지구 인근에 있는 월성지구에는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월성(사적 제16호),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 시내에 밀집해 있으므로 어느 곳부터 방문해도 무방하지만 이곳에서는 앞에 설명된 순으로 답사에 임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5만원 지폐에 등장하고 세종대왕은 1만원 지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폐에는 한국의 간판스타 문화재들이 등장한다. 등장한 문화재는 여러 가지다. 국보 제1호인 남대문, 독립문, 파고다공원의 팔각정과 국보 제2호인 원각..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4) : 황룡사지구(4)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회가 자주 열렸고 자장이나 원광과 같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실제로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설명도 있다. 황룡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벽화 속의 노송이 실물과 꼭같이 그려져서 자주 새들이 앉으려다 미끄러졌으나 황룡사의 스님이 새로 색칠을 한 이후로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금동장륙상이라 불리는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쇼카 왕이 쇠와 금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뒤 최후로 배에 구리 57,000근, 황금 40,000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3) : 황룡사지구(3)

강우방 박사는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용문․운강석굴의 거대한 암석에 수백 수천의 부처들이 조각되어 있지만 석가모니의 실체인 불탑을 바위 즉 돌로 만든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석재라고 볼 수 있는 화강암같은 견고한 돌로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탑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다른 기술도 요청된다. 목탑은 나무와 기와로 이루어졌으므로 건축적인 기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단한 돌로 탑을 쌓기 위해서는 건축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다듬는 조각 기술도 합해져야 한다. 단단한 석재를 다루어야 하므로 상당한 석조 기술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기술이다. 신라 석탑은 8세기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에 이르러 독창적인 구조와 형태가 정립된다. 석탑들은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2) : 황룡사지구(2)

① 탑의 배치와 장엄(莊嚴) 사찰 안의 탑은 사찰의 여러 건물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때 탑과 건물이 어떤 관계로 배치되어 있는가를 ‘가람배치(伽藍配置)’라고 한다. 예를 들면 탑과 금당의 관계에 따라 1탑3금당․1탑1금당․쌍탑식 등으로 분류한다. 1탑3금당식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주로 고구려에서 그 형식을 찾아 볼 수 있다. 탑을 한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한 개, 동서에 한 개씩 금당이 있어 금당이 탑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고구려의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은 모두 이와 같은 1탑3금당식의 가람배치다. 1탑1금당식의 가람배치는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형태와 동서로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 두 가지가 있다. 백제시대의 탑은 남..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1) : 황룡사지구(1)

황복사터를 나서면 곧바로 경주 시내인 황룡사지구로 연결되지만 인근에 진평왕릉(재위 579∼632, 사적 제180호), 설총묘(경북기념물 제130호),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호), 효공왕릉((재위 897∼912, 사적 183호)이 있으므로 이들을 답사한 후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이들을 먼저 답사한 후 낭산을 답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므로 각자의 선택에 따르기 바란다.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사륜이라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동생인 사륜이 왕위를 이었는데 진지왕이다. 그런데 진지왕(재위 576〜579)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과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 당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