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장세계>
석가정토, 아미타정토를 이어 연화장세계로 들어간다.
『삼국요사』 <사복불언(蛇福不言)> 편에 사복이 원효스님(617~686)과 함께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내용이 있다. 이 때 사복은 다음과 같이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게송을 읊는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사라(娑羅)나무 숲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그와 같은 사람이 또한 있어 연화장 세계로 돌아가려 하네’
게송을 마치고 풀줄기를 뽑아 올리니 땅 밑에서는 칠보 난간으로 장엄된 누각을 중심으로 밝고 청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사복은 어머니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원효스님이 지혜의 숲이라고 했던 바로 그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상당한 역사가 있다.
불국사의 창업자 김대성은 불교를 표훈스님으로부터 배웠다. 표훈이 가르쳤던 불교는 그의 스승 의상의 화엄사상이었다. 그 화엄을 의상은 중국 장안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당나라 지엄 스님으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기록에는 사복이 어머니를 업고 연화장 세계에 들어갔듯이 지엄 스님도 입적 후 연화장 세계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엄 스님은 입적에 즈음해 제자들에게 극락정토에서 잠시 노닐다가 연화장 세계로 가겠다고 했다. 극락정토에서 연화장 세계로 나아가는 이러한 사상은 지엄 스님의 제자 의상과 손제자 표훈에게도 이어졌고 이어서 김대성에게도 전해졌음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밝고 청정한 이상적인 불국토를 재현한 불국사에서 연화장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내용이다.
불국사가 불국을 표명하지만 일반인들이 함부로 불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국 중에서 연화장 세계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근접한 곳인데 현재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이 위치한다. 그런데 당대 신라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된 것은 관음 신앙이다. 아미타 신앙과 더불어 가장 민중과 가까웠던 신앙이 관음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관음전의 기단은 비로전과 함께 신라 경덕왕 이전인 삼국시대의 것으로 전해오며 1969년 발굴 당시 주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조선시대만 해도 이 건물 주변에 동서행랑, 해안문, 낙가교, 광명대 등 여러 건물이 일곽을 이루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음전은 원래 992년 경명왕비가 낙지공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관음전이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 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洛伽橋)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 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비로전(毘盧殿)은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모신 법당이다.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탄 것을 1660년에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세계의 본존불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한다.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제26호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데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준다. 불상의 높이는 177센티미터인데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비로전 좌측에 불국사 뒤 쪽의 3개 불전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나한전이 있다.
나한이란 부처의 제자들 중 소승의 계위인 아라한(阿羅漢)에 오른 성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즉 나한전은 부처 생존시 수행하던 16분의 제자를 모신 곳으로 16나한전 또는 16응진전(十六應眞殿)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석가, 양쪽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있다. 나한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전면에 법화전지의 주춧돌들이 보인다. 1593년 왜구의 침략으로 타 버린 뒤 1647년에 나한상을 조성하고 전각을 세웠으며, 1760년 중창 불사 때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1973년에 중수하였다.
나한전 주위로 아름다운 소탑지(小塔誌)가 형성되어 있다. 소탑지는 작지만 주위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다 많은 참배객들이 자연적으로 하나 둘씩 돌탑을 쌓아서 소망을 기원하면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는 옛적부터 돌로 작은 탑을 만들어 자신의 소원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는데 연유는 『법화경』의 다음과 같은 글이다.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모래탑을 쌓더라도 한량없는 복락을 받아 부처가 된다.’
<화엄불국의 정수 불국사>
이상의 설명으로 불국사를 왜 불국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국토들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민중적인 신앙인 관음 신앙까지 배려해서 설계했기 때문이다.
불국사의 건축 양식을 보면 그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출현했던 탑 중심형의 사찰에서, 탑의 비중이 약화되고 금당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룡사처럼 평지에 세운 탑 중심형 사찰은 탑을 기준으로 삼아 사찰의 전체 영역을 조직화하지만 불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탑과 금당이 병립되어 있다. 이런 탑-금당 병립형 사찰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탑으로부터 금당으로 신앙의 중심성이 전이되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권지연은 해석했다. 탑-금당 병립형의 출현이야말로 바깥에서 들어온 사찰 배치 형식을 신라의 형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최준식 박사의 설명이다.
불국사박물관도 빠트릴 곳이 아니다.
불국사박물관은 천왕문 우측 언덕 3,500평 부지에 지상1층·지하1층 규모로 건설된 곳이다. 이곳에는 석가탑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국보 제126호 사리장엄구와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기와류와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인 학산 남석환 선생님이 평생 수집해 기증한 유물 200여 점 중 동방의 종교, 불교와 서방의 고전 미술이 결합된 간다라 불상관이 위치하여 실크로드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1966년 불국사를 떠났다가 다시 불국사로 돌아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함께 등록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절묘한 설계를 바탕으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조형적 언어로 표현한 최상의 종교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의 최치원은 불국사는 ‘화엄불국’에 깊은 뜻이 있다면서 「화엄불국사아미타불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동해 동산에 아름다운 절이 있으니
화엄 불국이라 이름하였다.
왕이 종이 되어 친히 세우니
절 이름 네 마디에 깊은 뜻이 있다.
화엄을 주시하며 연화장을 우러르고
불국에 달리는 마음 안양으로 이어지면
마산의 독한 기운을 가라 앉히니
마침내 고해의 거친 파도를 잠잠케 한다.’
근래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 가격 그 중에서도 국보급의 가격은 얼마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칙적으로 국보급은 판매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므로 가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작품에 대한 보험가가 산정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최고의 보험가는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으로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문화교류전 출품 때 적용되었던 5,000만 달러다. 그 다음은 199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 특별전에 출품되었던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으로 300억 원짜리 보험에 가입했다. 제작시대나 모양이 비슷한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모두 한국 최고의 불상으로 꼽힌다.
한편 건축물의 경우 문화적 가치와 복구비를 기준으로 삼아 보험가를 산정하는데 2008년 기준 불국사와 석굴암은 209억 원이며, 경복궁 152억, 창덕궁 91억, 덕수궁 62억이다. 국보1호인 숭례문은 9,500만원이며 흥인지문은 약 8,700만원이다. 보험은 불국사-석굴암의 모든 건물 1,560평, 그리고 불상 및 탱화에 대해 화재보험 계약인데 불국사와 석굴암 측이 지불하는 보험료는 1999년을 기준으로 3년간 1억 2천만 원으로 알려진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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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만들어진 742년, 탑 속에 넣은 듯」, 유석재, 조선일보, 201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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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lguksa.or.kr/bbs/content.php?co_id=palace#
https://news.joins.com/article/303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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