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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유적지구(III)

단석산 신선사에서 하산하여 건천IC로 향하면 통일신라 이전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인 대소 50여기의 적석목곽분(32기 확인)들이 마을처럼 운집해 있는 사적 제43호 경주금척리고분군(慶州金尺里古墳群)을 만난다. 안내판에 의하면 박혁거세가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金尺)를 주었는데 왕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손에 그것이 쥐어져 있었다. 왕은 꿈에 신인이 가르쳐준 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자 다시 살아났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당나라 황제의 말이기는 하지만 왕은 이를 감추기 위해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금척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마..

경주역사유적지구(II)

경주 들어가기 : 형산강 좌측 유산(1) 천 년 고도 경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인데 이곳에서는 서울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는 경우를 기본으로 한다. 그럴 경우 경주IC가 아닌 건천IC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고속도로로 주행하면서 경주IC에서 내리지만 건천IC를 시발점으로 잡으면 형산강 좌측인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금척고분군(사적 제43호), 법흥왕릉(사적 제176호), 효현동삼층석탑(보물 제67호), 무열왕릉(사적 제20호), 서악리고분군(사적 제142호), 경주서악리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서악동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진덕왕릉(사적 제24호), 경주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 등 중요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경주 역사유적지구(I)

경주역사유적지구 들어가기 1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인 경주는 다소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 경주에 있는 불국사ㆍ석굴암이 1차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2000년 보다 큰 영역의 경주시 전체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유산 속의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경주 일원이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다른 유산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종묘나 창덕궁들은 단일 품목으로 등재되었지만 경주는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와 같은 예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우선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세계사 전체에서도 서양의 로마제국과..

세조의 문종 살해?(II)

youtu.be/ohkenXtOZHY 조정에서는 전순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전순의의 방면은 사건을 오히려 확대케 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년 4월 27일 본격적인 상소가 들어오는데 이때부터 과거와는 달리 의관 전순의에 대한 의학적 처방이 옳지 않았다는 전문적인 죄상이 낱낱이 밝혀진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순의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바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는 종기에는 금기하는 것인데, 전순의가 문종께서 종기가 난 초기에 사신의 접대와 관사(觀射) 등 모든 여러 가지 운동을 모두 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어서 구운 꿩고기를 바치기에 이르면서도 꺼리지 않았습니..

세조의 문종 살해?(I)

youtu.be/vOVOaeVhPW8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격변 중 하나는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다. 어린 나이에 단종이 즉위하자 삼촌인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왕권을 손에 넣었으며 이에 불복한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등 정치세력 간의 갈등은 큰 상처를 남겼다.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은 조선왕조의 황금시대를 연 세종의 맏아들로 세종 32년간의 재위기간 중 마지막 8년을 섭정했다. 그는 평소에 학문을 좋아하였고 집현전 학자들을 아끼는 등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세종이 그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결제하게 하였으나 신하들이 각종 질환을 이유로 반대했을 정도였다.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문종이 왕으로 등극했다. 조선왕조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하 : 프랑스 미디 운하

youtu.be/UiQAadvrrGI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생각은 로마 시대의 네로 황제도 구상했을 만큼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가 점령한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서 유럽 반도를 통과하지 않고 배를 타는 것이 물동량 수송에 유리하지만 반드시 지브롤터를 지나야하므로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해야 했다. 그런데 대서양과 인접해 있는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를 통해 뚜르즈(Toulouse), 나르본(Narbonne)을 관통하는 수로를 만들면 곧바로 대서양에서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기술과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실제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많은 운하 건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17세기의 루이 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 다리 : 스타리모스트

youtu.be/uh3XVhL-aY4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Old Bridge Area of the Old City of Mostar)>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의 다리라고 알려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Mostar)에 있는 스타리모스트(오래된 다리라는 뜻)처럼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는 남한의 절반 정도인 면적 51,129제곱킬로미터로 아드리아해 동쪽에 위치하는데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동쪽에 세르비아, 동남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접하고 있다. 특히 몬테네그로와 접하면서 남쪽 아드리아해안으로 21.2킬로미터의 좁은 해안선도 갖고 있다. 지중해, 발칸 유럽 그리고 중부유럽의 3가지 생태계..

황금보검이 알려주는 신라와 훈족

끄새-TV의 끄새에게 신라의 고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출토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금관과 황금보검(장식보검)을 든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국보도 아닌 황금보검(보물 635호)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금관보다 황금보검을 선정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어떤 이유로 황금보검을 제일 처음으로 꼽느냐고 다시금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을 신라에 조예가 깊은 요시미츠 츠네오의 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보로워에(현 카자흐스탄)의 귀금속 상감검의 장식은 얼핏 보면 신라의 황금보검 장식과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다르다. 그러나 제작 기법은 모두 공통적으로 복스 세팅법에 의한 귀금속 상감법이고 상감한 귀금속 주위에 금알갱이를 장식하는 누금세공 기법도 동일하다...

페루 나스카 문양과 후마나 평원(II)

youtu.be/GGyl1Ocx_sA 학자들의 결론은 대형 문양을 그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스카평원은 연중 안데스산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한류인 홈불트 해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습기를 거의 실어 오지 못하기 때문에 열대림이 무성하게 자라기 마련인 위도에 놓여있으면서도 지난 1만년 동안 거의 비가 오지 않았다. 매 2년마다 겨우 12.5밀리미터 정도의 비만 내릴 정도이다. 특히 나스카의 토양은 산화철을 함유한 암적갈색 모래, 작은 돌과 화산자갈이 불과 수십 센티미터 두께로 덮여있는데 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검은색을 띠고 밑에는 황토층이 있다. 지상그림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자갈 제거’와 ‘내부 보강’ 법이다. 첫번째는 고전차빈문명기(기원후 200~600년)의 초..

페루 나스카 문양과 후마나 평원(I)

신세계를 처음 탐험한 유럽인들은 그곳에 다른 문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계에는 독자적인 문명을 갖고 있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이것은 자신들만이 문명인이라고 생각했던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유럽인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던 아메리카의 수많은 고대 문명은 아직도 많은 것이 신비에 싸여 있다. 그 중에서도 페루의 남쪽에 있는 나스카의 사막 고원에 있는 기괴한 문양들만큼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스카 유적이 발견된 것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인의 연대기 작가인 시에사 데 레온은 나스카 부근사막에 이상한 부호들이 있다고 적었다. 1927년 페루의 유명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