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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71) : 제3구역 선정릉(2)

https://youtu.be/Ia6io2Sz0tQ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는데 첫 수난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일어났다. 왜군이 선정릉을 파헤치고 왕의 관인 재궁(梓宮)을 불태운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폭거에 왜군과 조선인이 결탁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는 유성룡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는 글이 있다.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공모하여 발굴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운기가 왜군과 결탁하여 왕릉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

조선 왕릉 답사 (70) : 제3구역 선정릉(1)

https://youtu.be/CRWwZxLTyAw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을 외국인과 함께 방문하면 그야말로 놀라는데 이유는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데다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이라고 알려진 강남구 삼성동에서 무려 72,778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이 숲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데 사실 서울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비싼 곳에 위치했음에도 선정릉에 대한 내역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선릉에 제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종의 아들 중종의 묘도 함께 있으므로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지하철 역..

조선 왕릉 답사 (69) : 제3구역 헌인릉(11)

https://youtu.be/9CLaHkX2uso 홍경래 난은 조선 초유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후에도 계속 사회혼란이 일어나 1813년 제주도와 1815년 용인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계속하여 민란과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급기야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서 전염병이 크게 번져 무려 10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내에서 우환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백성을 살피려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순조이지만 순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왕이라는 설명이다. 순조26년(1826) 봄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조선 왕릉 답사 (68) : 제3구역 헌인릉(10)

https://youtu.be/r_qTvhIiYlg 처음 시작은 매우 좋았다. 홍경래난은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사건 중 현대사와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의 글 등을 참조하여 설명한다. 12월 18일 홍경래에 의해 다복동에 모인 500여 명의 반군들은 격문을 낭독하고 거병식을 마친 뒤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다. 홍경래가 이끌고 홍총각(洪總角)이 선봉장이 된 남진군은 가산 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살해하고 무기를 수습했다. 이들은 다음날 꼬박 하루를 행진해 가산의 동남쪽 박천군(博川郡)에 도착하여 기병 40여 명, 보병 500명을 이끌고 공격했다. 인근 서운사(棲雲寺)에 숨어 있던 군수 임성고(任聖皐)는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남진군은 원래 박천을 점령한 뒤 영변부(寧邊府)를 공..

조선 왕릉 답사 (67) : 제3구역 헌인릉(9)

https://youtu.be/BPJkALL33RE ② 인릉(仁陵) 인릉은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 김씨의 합장묘로 태종의 묘와 조성시기가 40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인조는 1800년 정월 왕세자에 책동되었는데 6월에 정조가 승하하자 졸지에 11살의 어린 나이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순조는 조선왕으로서는 유달리 행복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신시(申時)에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니, 수빈박씨(綏嬪朴氏)가 낳았다. 이날 새벽에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있어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

조선 왕릉 답사 (66) : 제3구역 헌인릉(8)

https://youtu.be/bd9ZEZ32qUk 양녕대군은 1404년에 왕세자가 된 후 14년 간이나 세자로 있다가 1418년 폐세자가 되었다. 세자 양녕과 충녕의 일화 즉 태종이 세자인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준 이유 중 하나가 양녕이 글공부를 싫어하여 결국 왕위를 충녕에게 빼앗겼다는 야사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매우 와전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자가 된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로 왕이 되는 직행로임에도 이를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양녕이 천치가 아닌 한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것도 무려 14년이나 세자로 생활한 후다. 일단 세자가 되면 세자의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대체 세자 생활이 어떻기 때문에 왕..

조선 왕릉 답사 (65) : 제3구역 헌인릉(7)

https://youtu.be/C3jNLGC-npQ 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지정된 주거지에서 탈출해 사냥하기, 국상 때 술 마시고 놀기, 남의 첩과 간통하기 등 과거의 행보를 지속했다. 여하튼 충녕이 왕위에 오른 후 양녕에 대한 문제는 계속 불거졌다. 심지어 양녕이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을 점령하려한다는 유언비어조차 나돌았는데 그것은 양녕이 충녕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세종 치세에 양녕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세종은 양녕을 극형에 처하기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느라 병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끝까지 양녕을 두둔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사망했을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

조선 왕릉 답사 (64) : 제3구역 헌인릉(6)

https://youtu.be/-8HeJAhk89g 양녕의 실수는 조선 건국이 남다른데다 세계정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녕은 조선이 무력으로 탄생했으므로 무력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되려는 자신이 무를 닦는 것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태종은 이미 조선을 건국했으므로 조선을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와 자신이 무력으로 조선을 창건했지만 무력을 앞세운다면 자신들에게 대들을 세력은 결국 무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무를 바탕으로 형제들을 살해하고 엄밀하게 말하면 태조 이성계와 형인 정종을 겁박하여 왕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양녕이 바로 할아버지와 자신을 똑 닮아 무를 우선했다. 그런데 태종이 방심..

조선 왕릉 답사 (63) : 제3구역 헌인릉(5)

https://youtu.be/TBLnuus2RLg 태종이 궁극적으로 양녕을 폐세자하는 빌미로 삼은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태종 10년(1410)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만난 봉직련이라는 기생과 염문을 일으키더니 그의 행동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몰래 궁궐 담벼락을 넘어 여자를 찾아가기도 했고 여자를 궁궐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더욱이 태종을 놀라게 한 것은 초궁장이라는 기생과도 관계했는데 그녀는 태종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의 여자였다. 이 사건은 양녕이 초궁장이 상왕의 여자라는 것을 몰랐다고 발뺌하여 초궁장이 쫓겨나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또한 세자의 매형인 이백강과 관계있는 칠점생과도 놀아났다. 태종은 세자의 측근들을 벌주거나 상대 여자들을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

조선 왕릉 답사 (62) : 제3구역 헌인릉(4)

https://youtu.be/758HPohGYZY 태종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남다른 국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박헌모 박사는 조선 왕조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주저 없이 태종을 꼽았다. 태종의 방식은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인데 이는 ‘먼저 나서 사태를 제압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면서 태종이 쓴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탁월한 정보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귀재였다. 이 방식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朱元璋)을 만났을 때부터 발휘되었다. 『태조실록』 태조3년 11월에 이방원이 중국에 가서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나고 돌아왔음을 전한다. 이방원은 태조 3년 6월 즉 주원장을 만나기 5개월 전 명나라의 수도 난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