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 184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1)

https://youtu.be/B1NU7C9Qxxo 한국과 중국, 일본을 모두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세 나라의 궁궐 중에서 어느 나라 건물들이 가장 아름다우냐고 질문하면 단연코 한국의 궁궐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한다. 기다랗게 늘어져 버선코 마냥 날아갈 듯 오른 추녀선이며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단청을 보면 한국인들의 심미안이 놀랍다고 칭찬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건축물이 다른 나라 목조 건축물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의 자연적인 풍토와 잘 어우러지는 형태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으뜸으로 든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굳이 자연적인 지형을 깎거나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나무나 돌도 자연을 그대로 이용했다. 건축물 재료조차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한국 건..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8) : 행궁 및 을묘원행(II)

youtu.be/y_i2GLuObE0 화성행궁이 완성되기 전부터 정조는 헌융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여러 차례 들렀으며 행궁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머물면서 친히 활을 쏘거나 노인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한 행사 중에 여러 가지 깊은 뜻을 갖고 벌인 행사가 혜빈궁 홍씨의 화갑(華甲)을 맞이한 1795년이다. 온 백성의 이목이 집중되는 회갑 행차는 화성민을 비롯한 조선 백성들을 선무하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보는 구세력인 노론 벽파를 제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작게는 비명에 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7) : 행궁 및 을묘원행(I)

youtu.be/P4UgBOTUzQk 정조가 착착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높힐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에게 절호의 순간이 찾아왔다. 1795년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을 맞는 해이고 화성 신도시 건설이 준공을 앞둔 시점이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1795년에 주갑(周甲),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르면서 국민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경종을 주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혜경궁 홍씨의 환갑연을 열었다. 외부적으로는 진찬례다. 진찬례란 왕실의 어른께 음식을 올린다는 뜻으로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의 환갑연을 차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화성에서 진찬례를 할 필요가 있..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6)

youtu.be/Yops3lCLefk ⑥ 봉돈(봉화대) 봉돈은 횃불을 올리는 봉화대로서 성곽 높이보다 높게 쌓았고, 성곽 밖으로 5.5미터나 돌출되어 있다. 봉돈에는 5개의 불구멍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일 저녁 동쪽의 석성산의 육봉(陸烽)과 연락했고 바다로는 홍천대의 해봉(海烽)과 사이에 간봉을 두고 연락했다. 나머지 불구멍은 비상 때에만 쓰였다. 그런데 화성의 봉돈은 봉화 시설의 기능만 가진 것은 아니다. 봉돈을 성벽에 붙여서 돌출되게 축조하였고 내부는 비워두고 3층으로 나누어 각 층에 대포와 총을 장착하고 발사할 수 있도록 했다. 대포 구멍과 총구멍이 각각 무려 18개나 되는 것을 볼 때 공격적인 방어 진지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까지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5)

youtu.be/fRVp3tOdPtQ 화성의 높이가 고작 4미터 정도로 여장을 합해도 5미터에 지나지 않아 외국의 일반적인 성들이 보통 10미터를 넘는 것을 볼 때 다소 작게 느껴지며 실제로 성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화성은 18세기의 군사 기술적 측면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문중양 박사는 설명했다. 그의 화성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전쟁 양상은 종래와 상당히 달라졌다. 즉 18세기 이후 대형 화포와 같은 화약 병기의 파괴력이 막강해지고 성능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용되던 ’불랑기‘에 이어 영조 때 들여온 서양식 화포인 ’홍이포‘의 등장 등이다. 그에 따라 전체 전투력에서 차지하는 화약 병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4)

youtu.be/xp5zw-Hgkws 화성의 건축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조는 실학자 다산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서울의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화성을 건설토록 한다.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기존의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다산의 계획안은 5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포루도설」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다. 「옹성도설」은 옹성, 「현안도설」은 현안, 「누조도설」은 적이 성문에 불을 붙였을 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문 위에 벽돌로 오성지(五星..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3)

youtu.be/m7V9L2nFCls 〈철저한 설계도면에 의한 다양한 건축〉 화성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자 조선 역사상 한양 건설 이후 가장 큰 도시의 건설을 명령한다. 성역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정조17년(1793) 1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킨 전후의 일이었지만 정조14년 6월에 수원화성에 견고한 성곽을 갖춘 대도시를 건설하는 구상은 부사직(副司直) 강유(姜遊)의 제안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현륭원 천봉 직후 강유는 수원에 축성설참(築城設塹)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원(水原)은 곧 총융청(摠戎廳)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진(鎭)이고 더구나 또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이니, 의당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새 읍을 옮겨 설치하였으나 성지(城池)의 방어설치가 없습니..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2)

youtu.be/vjBMAD4_CfM 정조가 이렇게 활발하게 내외적인 업적을 쌓아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였다. 그래서 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효성과 추모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1762년 영조(英祖) 38년 윤 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한때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 쟁취를 위해 대립하고 있던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부친의 미움을 사 28세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1)

youtu.be/z0ve2tQ32tQ 정조 22년(1798) 8월, 정조는 수원화성과 관련된 상소문을 받았다. 상소의 주인공은 임장원(任長源)이란 60세를 넘긴 언관으로 그는 정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었다. 임장원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효도를 다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나라를 동요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임장원은 정조의 능묘 조성과 신도시 개발을 분명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도세자가 생전에 수원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수원에 능묘를 만들고 신도시를 개발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유언비어 중에는 정조가 ‘중국의 진시황제처럼 성을 쌓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정조는 ‘소인(小人)과는 이루어진 성과를 함..

경주 역사 유적지구(V)

큰 틀에서 형산강 좌측에서 우측으로 건너면 천년 고도 경주의 일곽이 된다. 남산지구를 포함하여 5구역으로 나뉘어진 유네스코세계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본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인데 경주 소금강산(북악)을 지나칠 수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굴불사터에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이 있고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이 있는 백률사가 있다. 소금강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산세가 험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높이 28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소금강산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차돈이 순교하는데 그의 목이 잘라지자 머리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떨어진 곳이 북악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 자추사(刺楸寺)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