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 184

한국의 궁궐 : 창경궁(3)

https://youtu.be/PEN-kpXJQIw ⑤ 문정전(文政殿) 명정전을 돌아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잠시 난감해한다. 이유는 명정전을 등진 남향한 문정전과 그 옆 경사진 터에 동향한 숭문당의 전각이 작은 공간에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명정전 왼쪽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물은 문정전이다. 왕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창경궁의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정전과 나란히 동향을 할 경우 한 궁궐에 정전이 둘이 되어 옛 제도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사각기둥을 사용해 정전과 격을 달리하였다. 1484년, 성종이 창경궁을 크게 확장할 때 건립되었는데 ..

한국의 궁궐 : 창경궁(2)

https://youtu.be/dihyVt1ANHs ① 홍화문(弘化門, 보물 384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담장 좌우에 십자각을 두었으며,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탄 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계 우진각 지붕이다. 홍화문의 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이층의 루(樓)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영조 25년(1749) 임금이 세자와 함께 홍화문의 루에 올라가 빈민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보물 제384호인 이 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이 남향인 것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홍화문은 성종 15년(1484)에..

한국의 궁궐 : 창경궁(1)

https://youtu.be/qCFeUotvdYg 창경궁은 서울의 동쪽 응봉 자락에 위치하면서, 인접한 창덕궁(昌德宮)과 함께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현존하는 국내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1419년에 지었고,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인 수강궁(壽康宮) 터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다. 성종13년(1482) 창덕궁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수강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성종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처소로 삼으려는 뜻이다. 이는 성종 10년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자신이 수강궁으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8)

https://youtu.be/Rn-tVonB3PY ⑪ 궐내각사 대부분의 관청은 궁궐 바깥에 있는 것이 기본이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부른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궐내각사는 담장과 담장이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7)

https://youtu.be/2ZvmAtr1U8U ⑨ 경훈각 대조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면 내부의 벽면을 타일로 마감한 이상야릇한 건물과 마주친다. 궁궐의 건물 양식과는 다른 이 건물은 1917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중건할 때 서양식으로 개조하여 수라간(水刺間), 즉 주방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대조전 뒤, 서북쪽으로 돌아나가면 경훈각(景薰閣)이다. 세조 때 건물의 명칭을 바꾸면서 당시에는 아래층을 광세전(曠世殿), 위층을 징광루(澄光樓)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고, 순조 33년(1833)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다. 경훈각은 선조가 명나라에서 받은 곤룡포와 비슷한 관복인 망의(妄衣)를 보관하던 ..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6)

https://youtu.be/Mse8XVDoiTM ⑦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5칸의 55칸 건물인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과 선정전의 동편에 놓여 있으며 북쪽으로 대조전이 있다. 창덕궁 안에 있는 침전(沈澱)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왕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의 편전은 본래 선정전이었으며 희정당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왕이 대대로 집무를 하는 통에 편전으로 바뀐 것이다. 순조 30년 5월에는 후에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경복궁 희정당의 명칭을 살펴보면 『궁궐지』에 순조가 지은 '희정당명(熙政堂名)'을 소개하면서 ‘군주가 밝고 강하면 정사가 잘 다스려..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5)

https://youtu.be/O7JkGIKR46E ⑥ 선정전(宣政殿 : 보물 제814호)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에서 매우 큰 중요도를 갖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선정전은 외전(外殿)에 속하는 편전(便殿)으로 편전이란 왕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던 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과 같이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점에서 특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의하면 성종 2년(1417) 가을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성종 8년(1477) 3월에 왕비가 첫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 선정전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문신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명종 8년(15..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4)

https://youtu.be/aT-TuD-qyLs 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인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전이 보이며 정전 앞 마당을 좌우로 동서 행각(行閣)을 감싸고 있다.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조(朝)’로,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조정(朝廷)이다. 당연히 품계석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인정문 쪽에서 9품이라 쓴 글씨부터 인정문 쪽으로 정1품, 종1품까지 써 있다. 왕이 참석하는 조회 때 문관과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정렬하던 곳이다. 동쪽이 문관, 서쪽에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마주 본다. 물론 조정에서 조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회나 과거 시험 등도 이곳에서 치렀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운 건물로, 태종..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3)

https://youtu.be/G2nCFbM2ouA ②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에서 궁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으로 축대를 쌓아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했다. 황기영 박사는 조선왕궁에는 북쪽인 현무(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개울을 금천(禁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 다리가 놓이는 것이 기본으로 이런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錦川橋)라고 한다. 태종 11년(1..

유네스코 세계유산 : 창덕궁(2)

https://youtu.be/hDKc-gq6628 선조가 정궁인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먼저 재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제기된 길지설(吉地說)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난 경복궁은 불길한 곳이라는 인식이 종종 제기되었고 특히 세종 조에는 경복궁에 대한 신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표출되기도 했다. 둘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은 창덕궁 일대를 복구하는 것이 민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중건은 워낙 큰 역사이므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한다. 그동안의 조선왕조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창덕궁은 계속 수난을 당하는데 인조반정(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