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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2) 석굴암(2)

https://youtu.be/NTmgJK3JzX4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석굴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호로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에 세웠다고 한다. 한편 최완수 박사는 원성왕이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인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주목했다. 그는 원성왕이 과거 왕들과의 단절을 표방하기 위해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는 것을 피하고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 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1) 석굴암(1)

https://youtu.be/NTmgJK3JzX4 유네스코는 광범위한 경주 영역을 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했지만 경주에 있는 한국의 유네스코세계유산의 간판은 석굴암과 불국사라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재되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에 석굴암과 불국사가 있으므로 석굴암과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두 번 지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틀에서 설명하는 이유다. 그런데 석굴암이 불국사와 함께 국내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한국 사람들도 다소 어리둥절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석굴암이 한국의 간판이 되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상당히 근거있는 것..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0), 경주국립박물관 실내외전시관(2)

백률사에서 이전된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도 국립경주박물관의 간판스타나 마찬가지다. 높이 약 179센티미터의 입상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금동비로좌나불좌상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3대 금동불 중 가장 큰 불상으로 1930년 백률사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 '백률사에 대비상(大悲像)이 모셔져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금동불이 기록의 대비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는 신체에 견주어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원형이다. 긴 눈썹, 가는 눈, 오목한 코, 잡은 입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불상이다. 아랫배가 나오고 상체가 뒤로 젖혀지면서 우람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깨가 다소 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9), 경주국립박물관 실내외전시관(1)

에밀레종을 좌우로 야외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신라 석탑의 규범이나 마찬가지인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높이 9미터의 고선사지삼층석탑은 화강암 석재로 건조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올려놓은 일반형 석탑이다. 원래 경주시 고선사지에 있었으나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규모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과 비슷하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층기단은 굽처럼 올려진 기대와 면석이 같은 석재로서 12개석으로 짜여졌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3주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12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8),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5)

https://youtu.be/MJOXlXyC2SE 이병호 교수는 또한 후리퀀시 스펙트럼 어낼리시스(Frequency spectrum analysis)를 이용해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하여 종소리를 비교 평가하였다. 음질 평가치를 정의하여 그 수치를 계산하는 것인데 한국의 유명한 종을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다음과 같았다. 1) 에밀레종 : 86.6 2) 상원사종 : 71.5 3) 보신각종 : 58.2 4) 중국 영락대종(46톤) : 40점 각 종의 음질평가치에 의하면, 에밀레종이 제일 좋은 종소리를 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에밀레종 소리는 명실공히 세계 제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7),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4)

https://youtu.be/MJOXlXyC2SE 에밀레종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으로 판명되기에는 우선 한국종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종소리는 크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지만 이외에도 󰡐울림󰡑이 있어야 한다. 종소리의 울림이란 종을 한 번만 쳐도 󰡐웅, 웅, 웅󰡑하고 종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계속 되풀이해서 울리는 현상을 말하며 물리학에서는 ‘맥놀이(beats)’라 부른다. 종소리의 울림, 즉 천상의 울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특별한 소리를 내는 ‘맥놀이’는 진동수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음파가 동시에 발생될 때 생기는 일종의 간섭 현상이다. 맥놀이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난다. 근래 경주 박물관에서 저주파 스피커에 통과시킨 성덕 대왕 신종의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6),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3)

https://youtu.be/MJOXlXyC2SE 에밀레종의 역사적인 발자취도 자못 극적이다. 이 종은 서기 771년에 완성된 후 봉덕사에 봉납되었으나 봉덕사 전체가 수해로 유실된다. 그러나 무거운 종만은 떠내려가지 않은 채 땅속에 묻혀서 약 70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될 때는 많은 불교 범종을 녹여서 무기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그후 조선 시대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졌으나 종각이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종각이 소실되자 또 다시 노천에 버려져 있던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조 5년(1460) 영묘사(靈妙寺)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5),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2)

https://youtu.be/MJOXlXyC2SE 이 문제는 2017년 계림월성지구 월성지구 반월성의 발굴 중 서쪽 성벽 기초부분 속에서 1600여 년 전 살았던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되어 새로운 각도의 검토를 제기했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들 유골이 문헌으로 전해오던 ‘인주 설화’의 증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주란 인간 기둥을 의미하는데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묻거나 기둥으로 세우면 건물 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두 인골 모두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튼튼한 성벽을 쌓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특히 인골들 발치 쪽에서 5세기 전후 만들어진 토기 4점이 나와 성벽 축조 시기 등도 확인됐는데 이는 당대의 인신공양이..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4),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1)

https://youtu.be/MJOXlXyC2SE 경주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마무리는 경주 시내에 있는 경주국립박물관 방문이다. 경주국립박물관의 시원은 여타 박물관과는 매우 다르다. 경주가 신라 천년의 고도였던 까닭에 문화재 보호에 일찍 눈을 뜬 경주지역 유지들이 1910년 ‘신라회’를 만들었고 이 모임은 1913년 ‘고적보존회’로 발전하여 1915년 경주 객사에 진열관을 만들었다. 이것이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이다. 이후 소장품들이 점점 증가했는데 해방 뒤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자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이 되었고 1975년 현재의 자리에 이전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답사하면서 경주국립박물관을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에밀레 종, 황금보검을 비롯하여 수많..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3) 계림월성지구 동궁과 월지

월성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사적 제18호인 안압지(雁鴨池)가 있는데 임해전(臨海殿)으로도 불렸다.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신라 왕실의 별궁인 동궁 안에 세워진 전궁(殿宮)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인데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 월지궁이었다고 알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