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 152

피라미드(84) : 약탈문화재 - 한국 (3)

https://youtu.be/_OO1XDqx1y0 유네스코는 1970년 11월 14일 프랑스 파리의 제1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이 조약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반환과 관련된 조항은 제11조에서 불법적으로 약탈한 문화재에 관한 부분이다. ‘외국 군대에 의한 일국의 점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강제적인 문화재의 반출과 소유권의 양도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 규정을 적용하면 동경대가 보관하고 있는 실록은 명백히 불법으로 약탈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는 조선왕조가 오대산 사고의 관리책임자로 월정사 주지를 임명했다는 사실과 1970년 11월 제16차 총회에서 채택된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반출 및 ..

피라미드(83) : 약탈 문화재 - 한국 (2)

https://youtu.be/dnO-IUiV46g 실록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은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흔히 실록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4대사고 체제’를 든다.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지방 곳곳에 서고를 만들어 각각 보관함으로써 화재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 실록의 제작과 보관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시대의 실록의 제작과 관리는 단순한 서책 제작과 보관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고 발표했다. 사고는 서책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한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고 습기와 화재, 도난 방지를 위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피라미드(82) : 약탈 문화재 - 한국 (1)

https://youtu.be/mCn-Q7tfsWI 과거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현실 속에 다시 나타난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무단 정복, 강제 합병 등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중에 일어났던 수많은 폐해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피식민국의 상황 변화에 따라 적나라하게 표출되는데 그리스 예술에 대한 현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영국 및 프랑스 등이 그리스 문화재를 가져가서 연구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유물이 그 생산국에 남아 있었다면 무지와 무관심속에서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라면서 보다 우수한 연구와 보관 능력을 가진 나라에 잘 보존돼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피식민국들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약탈국들이 이와 같이 ..

피라미드(81)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6)

https://youtu.be/PVwroc3OBeA 나폴레옹의 원정 이후 유럽에서 이집트에 대한 열풍이 일자 이집트 유적에 대한 파괴와 해외 반출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는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정부에도 큰 관련이 있다. 그것은 알리가 온갖 편의를 동원하여 도굴꾼들, 즉 모험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나폴레옹과 전투한 경력도 갖고 있는 터키인으로 1805년에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집트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많은 유럽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기술자들은 모하메드 통치 초기부터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유적을 파손하고 반출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각국의 영사 등 이집트 주재 외교관들이 더욱 앞장섰다. 그들은 외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모..

피라미드(80)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5)

https://youtu.be/1z6q-A5Xs0w 파라오의 무덤을 훼손할 정도의 도굴 행위가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잘 조직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덤을 지키는 관리들로부터 무덤의 비밀을 전해받기도 했다. 한 파피루스에 의하면 도굴꾼의 주범으로 테베 시장을 용의자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 재판 기록에는 아멘호텝 3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의 무덤들도 모두 약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앞에서 람세스 2세 등의 미라가 이리저리 옮겨진 내용도 있다. 특히 람세스 3세의 미라는 도굴꾼들에게 훼손당한 뒤 세 번이나 다시 매장되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이장할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재위 17년, 두 번째 계절 셋째 달 6일, 오시리스 신이신 우세르마레-세..

피라미드(79)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4)

https://youtu.be/IXcT7huqgGA 제18왕조 즉 신왕국 시대부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관행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식의 묘를 지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로 특징되는 묘를 짓기 시작했다. 테베의 맞은편에 자리한 나일 강 서안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왕의 넋을 위로하는 신전을 짓는 동시에 테베 산 바위를 뚫어 각자의 무덤을 축조하는 것이다. 즉 망자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신전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고 무덤은 좀 더 관리가 편리한 피라미드의 기능을 하는 테베 산 밑에 축조하는 것이다. 바로 왕과 왕비의 계곡이다. 이들 계곡은 왕래가 잦은 큰길에서 다소 떨어진 은밀한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초창기에는 비교적 경비하기가 쉬웠다. 왕가의 계곡에 처..

피라미드(78)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3)

https://youtu.be/NuQXXX6svu8 장례식도 도굴꾼들에게는 도굴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데 좋은 기회를 준다. 파라오나 왕비의 무덤들은 경비병이나 신관들이 지켜주므로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의 경우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 시신은 훼손되고 장신구 등이 탈취되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학자들은 많은 미라들이 매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둑들의 손을 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 미라를 매장하는 데 동원되는 인부들은 매장자를 위한 부장품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매장할 때부터 도굴하기 쉽도록 조치할 수 있었다. 또한 도굴꾼들간의 예의 즉 기본 협조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도굴한 무덤에 다른 도굴꾼들이 들어..

피라미드(77)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2)

https://youtu.be/BGCht6ivBQg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파라오의 노력은 초창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왕가의 계곡이 묻혀있던 무덤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권력자가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권층으로서는 자신들의 무덤에 갖고 갈 유물로 과거의 파라오 무덤에 묻혀 있는 물건들을 확보한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태어난 환경과 지위에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이승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만 충실히 하면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 사회에서 어째서 도굴이 끊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한정된 자원 아래서 일반 사람들이 보다 ..

피라미드(76) : 도굴 역사가 이집트 역사(1)

youtu.be/OHw58Ygtuf8 이집트에서 도굴은 이집트식 장례문화와 함께 생겨난 이집트의 역사일 정도로 매우 오래되었다. 내세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믿음이 미라를 만들고 많은 재화를 무덤에 투자하도록 했는데, 도굴꾼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먹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해야 했고 또 식량이 부족하거나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여유분을 비축했다. 재산이나 지위를 상속받는 사람들은 보다 유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힘썼다. 좀 더 나은 음식과 술, 주택과 옷 등이라 볼 수 있지만 그들을 항상 감싸고 있는 것은 보다 좋은 장례용품을 모아두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도굴은 무덤이 만들어질 때부터..

피라미드(75) : 스핑크스(4)

youtu.be/6U-xKMoehQY 1995년 11월부터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한 네페르타리 왕비무덤이 이집트 정부와 미국의 게티 재단에 의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한편 네페르타리 왕비의 시아버지 즉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의 무덤도 19세기에 발견되었을 무렵에는 네페르타리 왕비의 벽화와 같은 정도로 비교적 좋은 보존 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무지한 관광객들이 만지기도 하고 또 유적 안에서 내뿜는 수증기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복원 작업을 포기하였다고 알려진다. 유명한 투탕카문 파라오 무덤의 경우도 총 면적이 90제곱미터에 지나지 않는데도 하루 방문객이 최소한 3,000명쯤 되어 이들이 하루에 내뿜는 수증기가 25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