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70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0) : 낭산(2)

사천왕사터 바로 옆에 망덕사터가 있다. 두 사찰 모두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지만 건축 배경은 전혀 다르다. 즉 사천왕사가 부처의 힘을 빌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려고 지은 것임에 반해 망덕사는 당 황제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공격에 나선 당군의 배들이 번번히 침몰되자 당 고종이 김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는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을 불러 “신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준은 고국을 떠난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하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9) : 낭산(1)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방형분부터 경주까지 계속 김씨 왕들의 왕릉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남산 서편 비탈이 박씨 왕들의 안식처인데 반해 이곳에서부터 반월성까지는 줄곧 김씨 왕들이 편안히 누워 있으니, 신라 당대에 각 성씨들이 지역을 달리해 거주하고 묘소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기본적으로 경주의 간판스타인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들어가는데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별도로 지정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한국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들이 그만큼 중요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경주역사유적지구’ 틀 안의 답사가 아닌 별도의 일정을 잡으므로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8) : 서역인의 고향 신라(2)

괘릉이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무인석의 얼굴과 신체가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이라는 점이다. 곱슬머리에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무인석은 당대에 신라가 서역인들과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조를 보아도 그렇다.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헌강왕이 현재 울산 부근인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이는 동해 용(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 때문..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7) : 서역인의 고향 신라(1)

문무대왕릉, 감은사를 거쳐 경주로 들어가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관문성(사적 48호), 원원사(遠願寺, 사적 제46호), 숭복사, 괘릉(사적 26호), 영지와 석불좌상(유형문화재 204호) 등이다. 이 답사로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남산지구를 주파한 후 영지, 괘릉, 숭복사, 원원사를 거쳐 대왕암, 감은사를 거치는 일정인데 이 중간에 불국사, 석굴암이 있으므로 이들을 먼저 방문하거나 별도의 일정을 잡아 답사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각자의 일정 편의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기 바란다. 왜구들은 박혁거세 때도 침입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으므로 신라는 이들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현재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문성으로 성덕왕 21년(722)에 쌓았다. 관문성은 신라의 왕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므로 신라..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6) 대본지구(3) : 문무대왕 수중릉

감은사를 지나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으로 향한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에서 바라본 대왕암은 4개의 큰 암초 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그 안쪽에 바닷물이 차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중앙에 거북등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물 속에 잠겨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있어 대왕암 안으로 항상 바닷물이 흘러든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쪽과 서쪽은 바닷물이 들어가고 빠지는 수로 역할을 한다. 1967년 7월 24일 신라 시대의 문무왕릉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인 동해에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대서 특필되었다. 토함산의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의 암석이 석관의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도 판이하게 다른데다가 동해..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5) 대본지구(2) : 감은사지 삼층석탑

기림사를 떠나 골굴사(骨窟寺)로 향한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전한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므로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해석도 있다. 골굴암은 한반도에서는 매우 희귀한 형태다. 한반도에는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굴암의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큰 바위 군데군데에 12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창건 당시 인도의 사원 양식과 비슷한 석굴사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제일 높은 곳의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4) 대본지구(1) : 기림사

명활성은 매우 큰 산성이므로 기본적으로 복원된 일부 일원을 맛 본 다음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에 있는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으로 향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본지구에 있는 대왕암을 비롯하여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은 유네스코세계유산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라의 간판 유산인데다 경주역사지구 자체가 이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므로 경주를 답사할 때 반드시 방문할 곳이다. 명활성에서 이들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포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명활성에서 나와 감포로 방향을 틀자마자 길목에 보물 제168호인 ‘천군동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다. 넓은 평지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1939년에 복원한 것인데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양식이며 규모와 수법이 같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충..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3) 명활성지구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라벌은 신라초기부터 외부 세력에 의해 많은 침공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침입으로부터 서라벌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산에 성곽을 쌓아 국방에 대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도성 전체를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지 않고 대신 동⋅서⋅남⋅북의 높은 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했다. 즉 동쪽에는 명활성, 서쪽에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에는 남산신성과 고허성, 북쪽에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경주 산성 중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남산지구에 포함된 남산신성을 제외하고 명활성(사적 47호) 하나 뿐이다. 원래 명활산성으로 불렸으나 2011년 명활성으로 변경되었다. 신라에 여러 곳의 산성이 있지만 명활성만 등재된 것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산성..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2) 남산지구(동남산(2))

동남산의 서쪽을 답사한 후 되돌아 나와 통일전의 동쪽을 향하는데 중앙에 위치한 통일전을 들어가 본다.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로 무열왕, 문무왕의 영정은 김기창 화백, 김유신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세 사람의 사적비와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삼국통일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 17점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는데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내용들도 많으므로 시간을 쪼개어 볼 만하다. 통일전에서 몇 걸음 걸으면 화랑대교육원이 나오는데 이곳에 경주남산동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가 있다. 이 감실의 크기는 높이 2.5미터, 내부공간의 바닥 길이 1미터, 높이 1.4미터, 깊이 0.9미터다. 남향으로 다듬지 않은 장대석으로..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1) 남산지구(동남산(1))

서남산과 남남산을 주파하면 소위 매를 먼저 맞은 셈이므로 다음 길이 경쾌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동쪽을 의미하는 동남산은 통일전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지는데 먼저 좌측을 향한다. 동남산 좌측으로는 서출지(사적 제138호), 남산리삼층석탑(보물 제124호), 염불사터(사적 제311호), 국보 제312호인 칠불암마애불상군, 보물 제199호인 신선암마애보살상 등이 기다린다. 통일전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이 유명한 서출지(書出池)다. 서출지는 이름 그대로 글이 나온 연못이다. 소지왕 10년(488) 궁 밖으로 거동하니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했다. 왕이 그 말대로 따라가 이 연못에 이르자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봉투를 주었는데 그곳에는 ‘거문고 갑을 쏘시오’라고 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