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 158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I(Attila The Hun)

아틸라가 훈족임에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집단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행동을 지시하는 책임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특권이라고 설명된다. 즉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권위의 레벨을 정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다른 기술들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기초가 된다. 아틸라가 야만적인 유목민들을 이끌고 훈족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가 리더로서 직면했던 일보다 더 큰 리더십에의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부하 중에서 아틸라의 세계 정복과 훈족의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를 공유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들을 납득시키고..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Attila The Hun)

학자들은 고대 한민족의 원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추적했다.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하였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I(Attila The Hun)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

클레오파트라의 궁전과 무덤

youtu.be/pTUA3Kyell0 현재 세계 고대사를 후꾼 달구고 있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발견된 것은 물론 그녀의 무덤도 발견되었을지 모른다는 발표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스구스투스 황제의 단 한 마디,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다’라는 말로 3000여 년에 걸친 국가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로마의 한 속주로 편입된다. 로마로서는 이집트의 풍부한 농산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속국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직접 통치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서 세계사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역사의 주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사실 이집트가 로마에 합병된 이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기원후 약 300년부터 커다란 지진이 계속이집트를 강타했기..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 (IV)

https://www.youtube.com/watch?v=kzWFkPc_urw&t=1s 클레오파트라는 당대의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삶 자체보다는 로마로부터 조국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정자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로마정복자들을 오가면서 이집트를 살리려 노력하여 시저, 안토니우스의 벽은 넘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벽은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황제가 되는 길목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는 것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불행이었고 결국 그녀가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인류사를 보면 자살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어떤 연유로든 자살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독사의 독..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III)

youtu.be/d2ilVHFf90E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자 안토니우스의 자살에 이어 독사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게 된 근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연합했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곧바로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만난다. 로마의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후의 일로 그들이 만난 곳은 클레오파트라가 평소에 자신이 죽으면 묻히겠다고 건설한 영묘(靈廟)라고 적었다. 영묘 안에는 시저의 조상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시저의 부인이었고 아이도 낳았음을 강조하고 시저의 편지도 공개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 (II)

youtu.be/DKhAsVBi134 시저가 총애하던 부르투스에게 살해되자 로마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의 삼두체제(三頭體制)에 의해 통치된다. 원래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죽자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저가 살해된 지 2일 후에 공개된 유언장에 시저는 자신의 조카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제압할 힘이 부족하자 결국 화해하고 최대의 부호인 레피두스를 포섭하여 세 사람이 로마의 통치지역을 분할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프랑스 지역), 레피두스는 에스파냐,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사르데냐, 시칠리아를 관할하였다. 처음에는 안토니우스가 잘 나갔다.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언변력이 있었다. 부르투스가 시저를..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 (I)

youtu.be/KxaGZNIJuhY 동양을 대표하는 미인은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양귀비를 꼽는데 서양에서는 단연 클레오파트라 여왕(기원전 69년~기원전 30년)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7세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동양과 서양 사람의 얼굴이 다소 다르다고 하지만 그동안 전해져 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면 정말 미인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는 상당수 서양인 여성의 경우 자신이 과거에 클레오파트라였다고 말하고 남성은 나폴레옹이었다고 말한다고 한다. 정신병자까지 클레오파트라를 거론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갖고 있다는 뜻과 다름없다. 실제로 우리들은 현재 수없이 많은 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볼 수 있다. 보드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