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 158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9)

youtu.be/iM5N_WfIqpk 아틀란티스가 워낙 매력적이므로 후보지들은 계속 등장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에 '도거랜드(Doggerland)'라고 불리는 바닷속의 높은 평지와 같은 지형이 있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신석기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는 육지로 이어져, 현재의 아일랜드부터 브리튼 섬과 프랑스,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가 거대한 반도의 형태로 있었는데 이를 도거랜드라 부른다. 학자들은 도거랜드가 대체로 기원전 18000년부터 5500년까지 존재했다고 인식하는데 실제로 이들 지역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어 과거에 이 지역에 존재한 문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곳이 바로 아틀란티스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이들 지역의 해수면이 높아져 완전히 수몰되었기 때문..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8)

youtu.be/lunqIeEkz5Y 고고학, 천문학, 지질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증거를 끌어낸 핸콕과 플렘-아스 부부의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들은 이집트인이 뛰어난 항해술을 통해 남극까지 항해했을 거라는 개연성까지 부여했다. 하지만 정통 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에 즉각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남극 문명이 남긴 유적의 건설 연대가 1만 2000년을 상회한다면 왜 그들의 후손이 세웠다는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적어도 이들을 연결하려면 이러한 공백기를 말끔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플렘-아스 부부는 아틀란티스인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데 나름대로 시간이 걸렸고,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된 문명이 발전할 수 있다고 설..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7)

youtu.be/I9ZB20N2DcQ 1만 5,000년 전 남극 대륙은 얼음으로 덮인 황무지가 아니라 초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초고대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토목과 천문학, 항해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이들은 지구 전역을 탐험하며 이집트, 아메리카, 유럽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약 1만 년 전 대재앙이 일어나 남극 대륙에 있던 위대한 문명은 지금처럼 두꺼운 얼음과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남극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고대문명이 멸망할 것을 예측해 사전에 각지로 분산되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선 지식을 보유했던 후예들이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6)

youtu.be/N02JdJgenFM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케이시의 예언이 매력적으로 다가간 이유는 그동안 많은 학자가 아틀란티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장했던 질문을 말끔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1만 2,000년 전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했다면 그들 문명의 잔재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거석문화를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는 현대인이 보기에 거석 문명이 낙후된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을 만들 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아틀란티스인이 석기시대로 퇴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리가 대두될 수도 있다. 첫째, 문명의 퇴행이 이루어졌다. 재난을 피해 신천지로 이동한 아틀란티스인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5)

youtu.be/3S0uTDS_rn4 베게너의 대륙이동설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사망선고가 내려질 즈음, 갑자기 구세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예언가인 에드거 케이시가 아틀란티스의 존재는 물론 위치까지 정확하게 예언했던 것이다. 1877년, 켄터키 주 홉킨스빌에서 태어나 1945년에 사망한 에드거 케이시는 플라톤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초능력으로 아틀란티스 대륙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43년간 8,000명 이상과 정신감응(투시)을 통해 대화한 내용을 1만 4,000개 이상의 문서화된 속기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리딩(Readings)’이라고 부르는데, 진술 중 많은 부분이 아틀란티스 대륙 및 아틀란티스인의 전생, 아틀란티스에서 사용된 첨단..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4)

youtu.be/YHwrp9wNEHQ 〈레무리아 대륙의 실존설을 없앤 판구조론〉 이전의 설명들은 대륙이 이동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딱딱하기 짝이 없는 지구의 대륙이 이동한다는 생각을 떠 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에서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배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학적 정설을 뒤집고 지각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방법을 최초로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인 사람이 베게너다. 그런데 그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비과학자로 거명될 만큼 당대에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베게너는 대륙이 지구의 둘레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지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모순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3)

youtu.be/gDdZuZLqzwQ 아틀란티스 대륙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가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원래 ‘사라진 대륙’이란 말은 아틀란티스 대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질학의 발전 과정에서 학문적인 연구로부터 나온 말이다. 17세기만 해도 사람들은 모든 물질은 생명력이 있어서 생동한다는 물활론(物活論)을 믿었다. 심지어 땅에서 나오는 돌멩이조차 생물처럼 스스로 자란다고 생각했고, 광산에서 금을 캐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광산을 폐쇄하고 금이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당시 학자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도처에서 발굴되는 화석이었다. 산 정상에서 조개나 물고기 화석이 나오는가 하면 인간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도 화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화석이 ‘생물의 ..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2)

youtu.be/HdFSdXWpcdw 슐리만의 트로이 발견과 에반스의 크레타 문명 발굴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미국의 정치인 이그나티스 도넬리(Ignatius Donnelly, 1831~1901년)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스물여덟 살에 미네소타 주의 부지사로 당선될 만큼 정치적 역량이 있던 도넬리는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의회에 소장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그는 '위대한 암호'라는 책에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저술한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세상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저서 '노아의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가 지..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1)

youtu.be/oUQVTCz256Y 사라진 문명이란 말은 지금껏 쌓아 놓은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단어를 놓고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인간들이 고도의 생산력을 배경으로 만든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들은 무의미하게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혜와 노력을 가해 살아가는 문명이라는 양식을 만들어 가는데 이는 인간만이 가진 특권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질병, 기후의 변화, 식량의 결핍 등으로 기존에 유지되던 생활 모두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적어도 문명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살아있던 대지는 남아있고 그들의 ..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8)

youtu.be/1m8YAIpEhFA 적벽대전을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전투가 전체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파급 효과는 광의와 협의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먼저 협의의 결과를 보면 적벽대전은 군사적인 결정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가 상대가 되지 않는 손·유의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형주를 떠나 중원의 ‘업’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권력기초는 적벽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조조의 군사력은 여전히 손권과 유비의 군사력을 월등히 앞섰다는 것은 그 후 조조가 다시 오나라를 침공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213년). 적벽대전은 단기적으로도 남북 간의 군사적 평형을 깨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광의적인 측면에서 적벽대전은 역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