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89

조선 왕릉 답사 (79) : 제4구역 영녕릉(5)

https://youtu.be/pKG6O7dSQG8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13년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하여 글을 썼다. 하나는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급여를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쓴 ‘일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겪은 조선의 풍물에 대한 것이다. 이 글들을 엮어 출간한 책이 『하멜표류기』다. 이방인이 눈으로 본 단상이지만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로 의의가 깊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함께 효종과 현종이 표착 서양인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인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왕이 버린 선고에 복종하지 않고 트집을 잡으면 사형이다. 우리가 조선에 있을 때 이와 유사..

조선 왕릉 답사 (78) : 제4구역 영녕릉(4)

https://youtu.be/CncIcB8S14A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효종의 북벌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효종이 이를 모를리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

조선 왕릉 답사 (77) : 제4구역 영녕릉(3)

https://youtu.be/ist6_gKZJl8 ②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 정씨의 쌍릉인 영릉(寧陵)이 있다. 그러므로 두 능을 합하여 영녕릉(英寧陵)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릉만 알려져 있는데 덤으로 또 한 릉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2살에 한 살 위인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려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볼모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금주..

조선 왕릉 답사 (76) : 제4구역 영녕릉(2)

https://youtu.be/hNO9Q1NkM9I 세종대왕릉이 영릉에 오게 되는 과정 즉 천장(遷葬)에는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태종은 원래 서울시의 주요 문화재로 지정된 헌릉(강남구 내곡동 소재)에 묻혔다.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 사후(세종 2년)에 능기(陵基)를 잡아놓은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인 태종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 장자인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삼자인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에 대한 보은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세종은 헌릉 서쪽(수평거리 190미터)에 자신의 수릉을 재위 시 미리 잡았다. 그러나 수릉 택지 1년 후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하여 장사를 지낼 때 수릉 자리가 풍수지리상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한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세종의 고집..

조선 왕릉 답사 (75) : 제4구역 영녕릉(1)

https://youtu.be/ZokxfzA-S6I 제1구역부터 제3구역을 답사하면 제4구역인 영녕릉(英寧陵, 사적 195호), 장릉, 융건릉이 남는다. 이들을 4구역으로 분리한 것은 영녕릉과 융건릉은 서울에서 떨어져 있으며 특히 단종의 장릉은 영월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연계하여 답사하면 북한에 있는 2개의 왕릉을 제외한 40개의 왕릉을 모두 답사하는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제일 먼저 영녕릉을 향한다. 영녕릉은 조선의 4대 왕인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인 영릉(寧陵)이 좌우로 자리한 곳이다. 우연히도 두 능의 한글 이름이 같아 흔히 ‘영릉’으로 함께 불리므로 세종대왕의 능으로만 알려져 있고 효종의 능은 가려지곤 한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

조선 왕릉 답사 (74) : 제3구역 정릉

https://youtu.be/Zci21yI7UdM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 사적 208호)은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 1899년)의 능으로 능역은 90,621평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고향의 부인)⋅경처(景妻, 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이성계가 원나라 동녕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끼자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씨와 정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었다. 태조(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

조선 왕릉 답사 (73) : 제3구역 선정릉(4)

https://youtu.be/x7G_49Q43i0 중종 시대에 중요한 변혁은 국방 문제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 등 남부 지방은 끊임없이 왜군에게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빈번히 침략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라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월이었다. 여하튼 중종이 1544년 11월 창경궁에서 사망했는데 왕위에 있던 기간은 무려 39년이다. 조선왕조에서 재위기간이 길지만 사망할 당시 나이는 57세다. 여하튼 중종이 사망하자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있는 서삼릉(西三陵)의 희릉(禧陵)과 동원이강을 이루고 정자각은 왕과 왕비의 능 사이로 옮겨 설치했..

조선 왕릉 답사 (72) : 제3구역 선정릉(3)

https://youtu.be/2ufB4Rg0O28 ② 정릉(靖陵) 제11대 중종(1488〜1544)의 능인 정릉은 선릉에서는 다소 다리품을 팔아야할 정도로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선릉과는 달리 사람들의 방문이 많지 않아 고요한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능역의 경계를 벗어나면 강남 중심부답게 주위가 매우 번화하여 묘한 대비를 이룬다. 중종은 조선왕조의 치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왕으로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주인공 중의 한 명 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유명한 중종이 정릉에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종은 그야말로 격변기의 왕이다. 성종 19년(1488)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13세인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

조선 왕릉 답사 (71) : 제3구역 선정릉(2)

https://youtu.be/Ia6io2Sz0tQ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는데 첫 수난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일어났다. 왜군이 선정릉을 파헤치고 왕의 관인 재궁(梓宮)을 불태운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폭거에 왜군과 조선인이 결탁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는 유성룡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는 글이 있다.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공모하여 발굴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운기가 왜군과 결탁하여 왕릉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

조선 왕릉 답사 (70) : 제3구역 선정릉(1)

https://youtu.be/CRWwZxLTyAw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을 외국인과 함께 방문하면 그야말로 놀라는데 이유는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데다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이라고 알려진 강남구 삼성동에서 무려 72,778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이 숲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데 사실 서울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비싼 곳에 위치했음에도 선정릉에 대한 내역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선릉에 제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종의 아들 중종의 묘도 함께 있으므로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지하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