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 158

중국의 자존심(15) : 만리장성(4)

youtu.be/dPIkkL2WiGU 학계에서는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목적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진나라가 북방 유목민의 공격으로부터 중국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리장성은 수비용이 아니라 공격용이라는 것으로 그동안 알려진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근래에 만리장성을 정밀 조사한 학자들은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북방에 건설된 성벽들이 농경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초원과 상당히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연나라의 성벽은 오늘날의 몽골 안쪽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성벽이 외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시설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성벽을 쌓으면 유목민을 그들의 영토에서 ..

중국의 자존심(14) : 만리장성(3)

youtu.be/ilC9meEVP9c 민중의 고통을 딛고 만리장성이 놀랍게도 빨리 세워지자 여러 가지 전설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황제의 능력이다. 한 예로 진시황에게 빨간 갈기에 밤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꼬리와 빛을 발하는 눈을 가진 흑마가 있었다. 그 말은 하루에 1,200리(48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으며 진시황이 그 말을 타고 중국 북방 국경선을 1.6킬로미터를 달릴 때 겨우 9〜10번밖에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리(里)는 과거의 길이 단위로 1리는 500미터다. 놀라운 것은 말이 밟고 달려간 자리마다 망루들이 차례로 솟아올랐으므로 단 하루 사이에 광대한 성벽이 세워졌다고 한다. 진시황이 사용한 놀라운 도구 이야기도 있다. 그가 사용한 삽은 세 번이면 1.6킬로..

중국의 자존심(13) : 만리장성(2)

youtu.be/zuZ6QIMUAjQ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그동안 중국인의 부단한 침입으로 피해를 보았던 북방 민족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각 제후국이 북방에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과거의 힘없는 세력이 아니라 중국의 제후국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원전 660년, 위나라가 저족의 침입으로 거의 멸망 단계까지 간 것도 이런 여파 때문이다. 중국과 접해 있던 저족(氐族)과 융족 즉 현재의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에 살던 이들은 계속해서 중국과 혈투를 벌였고, 이는 보다 북쪽에 있는 순수 유목민에게 더 큰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저족이나 융족과 달리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초원지대에 머물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

중국의 자존심(12) : 만리장성(1)

youtu.be/4LEnp5radWI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2007년 7월 7일, ‘신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된 만리장성은 총길이가 5,000~6,000킬로미터로 알려져 있다. 근래 중국이 만리장성을 전국시대를 포함하여 중국에서 건설된 장성을 모두 합하여 약 12,000킬로미터가 된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들 안에는 고구려가 건설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통적인 만리장성은 산동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북경과 대동을 거친 다음 남쪽으로 황하를 넘는 이 장성은 협서성과 오르도스의 경계를 따라 남서를 향해 달리다 다시 황하를 넘는다. 이어 그곳으로부터 실크로드의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자위관(嘉浴關)에서 종료된다. 그러므로 산..

중국의 자존심(11), 진시황제 저격 창해역사는 한국인(2)

youtu.be/IQKKyLrtKZk 진시황에 등장하는 암살자로 형가와 못지않게 유명한 사람이 장자방으로 보다 알려진 장량(張良, 기원전 250〜기원전 186)과 창해역사다. 장량은 통일진나라가 멸망하는 초ㆍ한의 쟁패 때부터 한고조 유방의 정치가 및 전략가로 활약했다. 본래 한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막료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공헌했고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여하튼 기원전 230년 진나라의 군사력에, 장량의 조국인 한나라가 멸망하는데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고관대작이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려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장량이 유력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유능한 자객을 찾으러 다녔다. 목적은 진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

중국의 자존심(10), 진시황제 저격 창해역사는 한국인(1)

youtu.be/YsmodNLD5Bk 진시황제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당대 최고의 지존으로 떠올랐지만 이를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와 창해역사의 암살사건이다. 이중 창해역사는 강원도에서 한국인으로 설명할 정도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이다. 형가를 먼저 설명한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제나라의 명문인 경씨(慶氏)이며, 위 사람들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귀국한 뒤 위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국정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협객으로서의 삶을 택하게..

중국의 자존심(9), 2세황제 호해

youtu.be/VO0m1JG4JzU 진시황제가 진제국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진제국은 공식적으로 3대 13년 만에 멸망한다. 학자들은 이렇게 급속도로 진나라가 멸망하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후계자 결정을 꼽는다. 바로 이세황제(기원전 229년〜기원전 207년)인 호해(胡亥) 즉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을 결정적인 패착으로 지적한다. 이세황제인 호해(胡亥)는 진시황제의 18번째 막내아들로 알려지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의 에 의하면 호해가 등극할 때의 나이가 12세였다고 하지만 에는 2대 황제 원년에 그의 나이가 21세라고 하고 있다. 의 내용에 따라서 역산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229년으로 추정한다. 호해는 통일 중국 즉 진(秦..

중국의 자존심(8), 진시황제(8)

youtu.be/uc8WTckTdpY 중국의 역사에서 진시황제처럼 비난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중국 역사상 가장 포악한 황제로 계속 폄하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았고 아방궁을 세웠다는 것은 애교로 치부하더라도 분서갱유로 학자들을 생매장한 폭군이라는 데는 그가 사망한지 2000년이 지났음에도 벗겨지지 않았다. 거대한 국가는 황제 한 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하들이 적시적소에 움직여야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학자들을 생매장하고 책을 불살랐다는 것은 군주가 아닌 지식인들에게는 가장 질이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진시황제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셌다. 그가 인민을 혹사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고통에 빠지게 한 ..

중국의 자존심(7), 진시황제(7) : 아방궁

youtu.be/4_TcvsSuqfQ 학자들이 가장 많이 설명하는 것은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제는 역사를 다룰 때 상식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한마디로 어떤 사건 또는 주장을 설명할 때 깐깐하게 여러 면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진시황제와 가장 직결되는 것이 아방궁(阿房宮)이다. 아방궁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진시황제가 건설했다는 궁으로 더욱 유명세가 높다. 함양과 위수 근처의 아방(阿房)촌에 유적이 남아있으며 궁전은 시황제 35년인 기원전 212년부터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방궁의 규모는 정말로 대단하여..

중국의 자존심(6), 진시황제(6)

youtu.be/WBEItruKGko 갱유는 분서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황제는 포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비춰 오늘을 경시하는 자는 마땅히 구족(九族)을 멸하겠다.’ 이는 덕을 갖추되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다는 뜻이지만, 본래 이 사건은 두 명의 방사가 함양성을 몰래 빠져나간 데서 비롯되었다.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우선 당시의 과학 수준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황제는 신선이나 불로불사의 존재를 믿었다. 이는 주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의학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황제 주변에는 불로장생의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수많은 도사가 들끓었다. 후생과 노생도 그런 도사였고 앞서 불로초를 구하러 떠났다고 말한 서복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방사인 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