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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2) 계림월성지구 석빙고(3)

https://youtu.be/mhcZ8MPIek0 겨울에 채취하여 가을까지 남아돌았다는 석빙고는 얼마나 효율적이었을까? 계명대학교의 공성훈 박사는 우선 석빙고의 실내 환경 분포를 측정하였다. 현존하는 석빙고는 여러 곳에 있지만 그 중 경주 석빙고의 예를 들었다. 경주시 인왕동 449-1에 위치하며 빙실의 규모가 35평 정도로 남한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석비에는 영조 14년(1738년)에 완성된 것을 3년 후에 옮겨 개축하였다고 적혀 있다. 길이 19미터, 너비 6미터, 높이 5.4미터의 규모로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고 계단이 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다섯 개의 기둥에 장대석이 걸쳐져 있고, 환기용 구멍 3개가 장대석을 걸친 곳에 있으며 바닥 한가운데가 경사지게 되어 있어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가..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1) 계림월성지구 석빙고(2)

https://youtu.be/mhcZ8MPIek0 빙고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나 대부분 30평이 넘었고 규모가 적은 경우에도 10평이 넘었다. 현존하는 빙고의 빙실은 폭은 대개 4~6미터, 길이는 폭의 2~4배 정도이다. 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은 가로 70∼80센티미터, 세로 1미터, 두께 60센티미터 정도로 두께는 최소한 12센티미터 이상이 되어야만 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다짐이나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게 하였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골격이 되는 아치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인데 골격에 의지하고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0) 계림월성지구 석빙고(1)

https://youtu.be/mhcZ8MPIek0 인류가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게 된 것은, 1876년 독일의 칼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사용하는 흡수식 냉장장치를 발명한 이후부터였다. 1913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가 미국에서 출시된 후부터 냉장고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얼음은 천연 얼음뿐이었다. 그러므로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하는 방법이 유일한데 기원전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짓고 여기에 얼음을 넣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높은 산에서 가져온 눈을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이나 흙, 퇴비 등으로 열을 차단한 저장소를 만들어 포도주를 차게 보관하기도 했다. 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9) 계림월성지구 월성

월성(사적 16호)은 근래 경주에서 각광받는 지역이다. 그것은 2014년부터 발굴 중인 월성에서 3〜10세기의 무려 10만 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큰 명문 있는 목간·기와·토기부터 배·방패·그릇·국자·빗 등 목제품, 토우, 금동 장식물, 철제물, 육지와 바다동물 뼈까지 망라한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대 발굴 조사로 불리는데 그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20년이 걸렸지만 월성은 신라 왕궁이라는 중요도를 보아 30년, 50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사, 나아가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월성은 101년에 쌓기시작하여 935년 통일신라가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신라 ..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8) : 계림월성지구 계림

첨성대의 과학성을 본 후 월성지구에 있는 계림으로 향한다. 글로만 보면 먼 곳에 있는 곳처럼 보이지만 지척지간이다. 계림은 나정과 더불어 신라인들이 매우 중요시하던 장소이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김알지는 신라 미추왕(262~284)과 내물왕(356~402)의 선조인데 『삼국사기』 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는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탈해 이사금때 시림(始林)에서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7)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3)

https://youtu.be/IBNGtg0q2c8 첨성대의 형태가 남다르므로 남다른 수학이 들어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첨성대의 수학을 보자. 첨성대의 기단의 대각선과 첨성대의 높이의 비는 약0.8 , 즉 4/5이며, 정자석 한 변과 1단 원의 지름의 비는 약0.6, 즉 3/5이다. 그리고 최상단의 원지름과 중앙부에 있는 창의 한 변 길이의 비는 약3이다. 1, 4/5, 3/5은 원주율과 피타고라스정리에서 나오는 3:4:5의 값이다. 이것은 첨성대가 그 시대 철저한 수학적 구조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라하면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들 원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구고현의 정리’라고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36)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2)

https://youtu.be/IBNGtg0q2c8 첨성대의 효용도가 제기되자 강력하게 주장된 것 중 하나는 첨성대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 제단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장은 일견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지만 곧바로 반론에 부딪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일월제 즉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지냈고 별에 대한 제사인 영성제를 영조사 남쪽에서 지냈다고 했다. 말하자면 첨성대가 아닌 딴 곳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므로 당연히 첨성대는 제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태양빛에 의해 생기는 물체의 그림자 길이를 재서 태양의 고도를 알아내는 규표(圭表)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규표설은 조위(曺偉, 1454〜1503)의 칠언율시에 나온다. 그는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5)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1)

https://youtu.be/IBNGtg0q2c8 황룡사지구 인근에 있는 월성지구에는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월성(사적 제16호),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 시내에 밀집해 있으므로 어느 곳부터 방문해도 무방하지만 이곳에서는 앞에 설명된 순으로 답사에 임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5만원 지폐에 등장하고 세종대왕은 1만원 지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폐에는 한국의 간판스타 문화재들이 등장한다. 등장한 문화재는 여러 가지다. 국보 제1호인 남대문, 독립문, 파고다공원의 팔각정과 국보 제2호인 원각..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4) : 황룡사지구(4)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회가 자주 열렸고 자장이나 원광과 같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실제로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설명도 있다. 황룡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벽화 속의 노송이 실물과 꼭같이 그려져서 자주 새들이 앉으려다 미끄러졌으나 황룡사의 스님이 새로 색칠을 한 이후로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금동장륙상이라 불리는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쇼카 왕이 쇠와 금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뒤 최후로 배에 구리 57,000근, 황금 40,000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3) : 황룡사지구(3)

강우방 박사는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용문․운강석굴의 거대한 암석에 수백 수천의 부처들이 조각되어 있지만 석가모니의 실체인 불탑을 바위 즉 돌로 만든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석재라고 볼 수 있는 화강암같은 견고한 돌로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탑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다른 기술도 요청된다. 목탑은 나무와 기와로 이루어졌으므로 건축적인 기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단한 돌로 탑을 쌓기 위해서는 건축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다듬는 조각 기술도 합해져야 한다. 단단한 석재를 다루어야 하므로 상당한 석조 기술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기술이다. 신라 석탑은 8세기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에 이르러 독창적인 구조와 형태가 정립된다. 석탑들은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2) : 황룡사지구(2)

① 탑의 배치와 장엄(莊嚴) 사찰 안의 탑은 사찰의 여러 건물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때 탑과 건물이 어떤 관계로 배치되어 있는가를 ‘가람배치(伽藍配置)’라고 한다. 예를 들면 탑과 금당의 관계에 따라 1탑3금당․1탑1금당․쌍탑식 등으로 분류한다. 1탑3금당식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주로 고구려에서 그 형식을 찾아 볼 수 있다. 탑을 한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한 개, 동서에 한 개씩 금당이 있어 금당이 탑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고구려의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은 모두 이와 같은 1탑3금당식의 가람배치다. 1탑1금당식의 가람배치는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형태와 동서로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 두 가지가 있다. 백제시대의 탑은 남..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1) : 황룡사지구(1)

황복사터를 나서면 곧바로 경주 시내인 황룡사지구로 연결되지만 인근에 진평왕릉(재위 579∼632, 사적 제180호), 설총묘(경북기념물 제130호),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호), 효공왕릉((재위 897∼912, 사적 183호)이 있으므로 이들을 답사한 후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이들을 먼저 답사한 후 낭산을 답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므로 각자의 선택에 따르기 바란다.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사륜이라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동생인 사륜이 왕위를 이었는데 진지왕이다. 그런데 진지왕(재위 576〜579)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과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 당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0) : 낭산(2)

사천왕사터 바로 옆에 망덕사터가 있다. 두 사찰 모두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지만 건축 배경은 전혀 다르다. 즉 사천왕사가 부처의 힘을 빌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려고 지은 것임에 반해 망덕사는 당 황제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공격에 나선 당군의 배들이 번번히 침몰되자 당 고종이 김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는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을 불러 “신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준은 고국을 떠난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하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9) : 낭산(1)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방형분부터 경주까지 계속 김씨 왕들의 왕릉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남산 서편 비탈이 박씨 왕들의 안식처인데 반해 이곳에서부터 반월성까지는 줄곧 김씨 왕들이 편안히 누워 있으니, 신라 당대에 각 성씨들이 지역을 달리해 거주하고 묘소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기본적으로 경주의 간판스타인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들어가는데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별도로 지정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한국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들이 그만큼 중요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경주역사유적지구’ 틀 안의 답사가 아닌 별도의 일정을 잡으므로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8) : 서역인의 고향 신라(2)

괘릉이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무인석의 얼굴과 신체가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이라는 점이다. 곱슬머리에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무인석은 당대에 신라가 서역인들과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조를 보아도 그렇다.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헌강왕이 현재 울산 부근인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이는 동해 용(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 때문..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7) : 서역인의 고향 신라(1)

문무대왕릉, 감은사를 거쳐 경주로 들어가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관문성(사적 48호), 원원사(遠願寺, 사적 제46호), 숭복사, 괘릉(사적 26호), 영지와 석불좌상(유형문화재 204호) 등이다. 이 답사로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남산지구를 주파한 후 영지, 괘릉, 숭복사, 원원사를 거쳐 대왕암, 감은사를 거치는 일정인데 이 중간에 불국사, 석굴암이 있으므로 이들을 먼저 방문하거나 별도의 일정을 잡아 답사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각자의 일정 편의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기 바란다. 왜구들은 박혁거세 때도 침입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으므로 신라는 이들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현재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문성으로 성덕왕 21년(722)에 쌓았다. 관문성은 신라의 왕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므로 신라..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6) 대본지구(3) : 문무대왕 수중릉

감은사를 지나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으로 향한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에서 바라본 대왕암은 4개의 큰 암초 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그 안쪽에 바닷물이 차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중앙에 거북등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물 속에 잠겨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있어 대왕암 안으로 항상 바닷물이 흘러든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쪽과 서쪽은 바닷물이 들어가고 빠지는 수로 역할을 한다. 1967년 7월 24일 신라 시대의 문무왕릉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인 동해에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대서 특필되었다. 토함산의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의 암석이 석관의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도 판이하게 다른데다가 동해..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5) 대본지구(2) : 감은사지 삼층석탑

기림사를 떠나 골굴사(骨窟寺)로 향한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전한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므로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해석도 있다. 골굴암은 한반도에서는 매우 희귀한 형태다. 한반도에는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굴암의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큰 바위 군데군데에 12개의 석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창건 당시 인도의 사원 양식과 비슷한 석굴사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제일 높은 곳의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4) 대본지구(1) : 기림사

명활성은 매우 큰 산성이므로 기본적으로 복원된 일부 일원을 맛 본 다음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에 있는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으로 향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본지구에 있는 대왕암을 비롯하여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은 유네스코세계유산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라의 간판 유산인데다 경주역사지구 자체가 이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므로 경주를 답사할 때 반드시 방문할 곳이다. 명활성에서 이들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포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명활성에서 나와 감포로 방향을 틀자마자 길목에 보물 제168호인 ‘천군동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다. 넓은 평지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1939년에 복원한 것인데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양식이며 규모와 수법이 같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충..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3) 명활성지구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라벌은 신라초기부터 외부 세력에 의해 많은 침공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침입으로부터 서라벌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산에 성곽을 쌓아 국방에 대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도성 전체를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지 않고 대신 동⋅서⋅남⋅북의 높은 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했다. 즉 동쪽에는 명활성, 서쪽에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에는 남산신성과 고허성, 북쪽에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경주 산성 중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남산지구에 포함된 남산신성을 제외하고 명활성(사적 47호) 하나 뿐이다. 원래 명활산성으로 불렸으나 2011년 명활성으로 변경되었다. 신라에 여러 곳의 산성이 있지만 명활성만 등재된 것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