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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2) 석굴암(12)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은 여러 번 반전에 반전을 일으키고 있는데 2017년 또 다시 전실 유무 문제로 학계를 들썩거리게 했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1891년 석굴암 중수 공사의 상량문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 연구」에서 ‘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그는 상량문을 볼 때 중수 공사 전에는 목조전실(木造前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목조전실의 유무는 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인데 다시금 목조건물이 없었다는 자료를 제시한 것이다. 최교수는 석굴암 목조 전실은 원래 없었음에도 1891년 중수 때 새로 덮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당시 중수 공..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1) 석굴암(11)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 전면에 목조건물의 설치가 최선은 아니어도 최악은 아니라는 설명은 전실이 존재하지 않은 즉 ‘개방구조’일 때의 피해를 생각해보라고 반문한다. 주실 벽면에 있는 감실(龕室)은 올빼미나 쥐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치기에 알맞은 구조인 것을 감안하면 신라시대에 적어도 전실의 지붕과 전면에 문은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때 주실 위부터 통째로 시멘트를 1미터 이상 발라놓은 상태에서 목조존실과 돔 등은 당시 학계의 연구 수준과 기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이전보다는 석굴 내부가 훨씬 안정적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팔부신중이 절곡형이냐 전개형이냐도 철저하게 반박한다. 한마디로 절곡형은 석굴암 본래의 건축적 구성 원리에 어긋나기..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0) 석굴암(10)

https://youtu.be/NTmgJK3JzX4 보수공사 때마다 첨단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습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석굴암의 훼손 상태가 날로 심화되고 있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학자들은 석굴암의 훼손은 보수할 당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석굴암은 당초에 건설되었던 석굴암과 구조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즉 석굴암의 본래 모습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게 된 필연의 결과라는 뜻이다. 석굴암은 원래 일반 건물과 같이 주벽은 직경 10센티미터 정도의 자갈들로 채워졌는데 그 두께는 1.2미터 또는 1.5미터 정도였다. 즉 이 자갈층이 바로 석굴암의 습도를 조절하는 자동제습장치였다는 것이다. 차고 더운 외부의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9) 석굴암(9)

https://youtu.be/NTmgJK3JzX4 김동현 박사는 곧바로 ‘내부 돔의 균열은 이미 1963년 석굴암 중수 당시에도 발견했으나 심각한 상태가 아니므로 지나쳤다’고 곧바로 반격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실시한 안전진단에서도 석굴암의 안전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부언했다. 이 설명은 문제의 균열이 외부돔 설치 이전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내부돔이 흙으로 덮여 있을 때 수분 침투와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모르타르층이 분리된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균열 지점의 양쪽 부위가 부등(不等)침하현상을 보이지 않으므로 내부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의 석굴암 보수 공사는 큰 틀에서 콘크리트 내·외부 돔의 누수부분과 목조전실을 설치했다는 설..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8) 석굴암(8)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의 본존불을 어느 돌로 사용했느냐에 대한 결론은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교수였던 이대성 교수는 석굴암의 석재는 바로 현장에서 채굴한 돌을 사용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당시의 작업 여건과 석재의 운반 등을 고려할 때 현장 이외의 장소에서 석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석굴암의 석재는 홍색장석화강암으로 석굴암 터에서 암석을 채취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석굴암의 화강석 재료는 화강석 자체만 볼 때 매우 거칠어 상질의 재료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재료가 다소 거칠다는 것은 석굴암이 현재의 토함산 자리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보여준다. 경상대학교의 좌용주 교수는 전암 대자율(whole-rock magnet..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7) 석굴암(7)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은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면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는 걸작이다. 김형자 교수는 석굴암이 10분의 1 비율로 건축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비율은 기원전 25년 헬레니즘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주창한 ‘균제비례(Symmetry)’와 유사하다. 그는 ‘건축미는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룰 때 얻어진다’고 강조했다. 균제비례는 인체에서 얻어진 것이며 인체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다. 석굴암 본전 불상도 이런 균제비례가 적용되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은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의 비율로 되어 있어 본존불상 자체를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6) 석굴암(6)

https://youtu.be/NTmgJK3JzX4 신라 불교의 정수라 볼 수 있는 석굴암은 고려 건국 이후 그 존재감이 약해졌지만 지역에서 전혀 잊혀진 것은 아니다. 석굴암이 갖고 있는 위상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등의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석굴암의 존재가 나름대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중일기』에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적혔는데 이는 석굴암이 당시에도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석굴암이 조선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5) 석굴암(5)

https://youtu.be/NTmgJK3JzX4 ⑥ 대범천(大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본존불을 둘러싼 4주에는 본존불 바로 뒤의 십일면관음보살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7구씩 입상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입구에 있는 첫 상은 본존불을 향하여 오른편의 것이 하늘의 왕인 대범천과 제석천이다. 이 두 천은 『법화경』을 비롯한 모든 대승경전에서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신화적 존재인 불제자들이지만 이들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에서 그리 흔한 존상은 아니다. 대범천은 욕계(欲界)를 벗어난 색계(色界) 제일의 단계에 위치하면서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이며, 제석천은 사왕천 다음의 높이에 위치하는 33천의 천왕이다. 대범천의 조상은 그와 한 쌍을 이루는 제석천과 똑같은 양식의 두광, 즉 연주(連珠)로 엮어진 도란형(倒卵形,..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4) 석굴암(4)

https://youtu.be/NTmgJK3JzX4 성낙주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단호하다. 석굴암 전면에 지붕이 있는 전각이 있었으므로 아침 햇살이 직접 본존불을 비추는 광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이런 내용이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며 이런 이야기가 태어나게 된 전말을 제시했다. 한국의 문화유산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즉 유종열이 총독부의 보수공사가 1915년에 끝난 후 1년이 지나 1916년 석굴암을 방문하면서 감명받은 후 1919년 「석불사 조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16년 9월 1일 오전 6시 반, 화창한 태양빛이 바다를 건너 굴원(窟院)의 불타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섰다. 그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의..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3) 석굴암(3)

https://youtu.be/NTmgJK3JzX4 ① 팔부신중(八部神衆) 전실에 들어서서 좌우 양벽에 각각 4구의 상이 있는데, 그것을 팔부신중 혹은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 부른다. 이들은 가상 동물로 원래는 인도의 힘 있는 신들이었지만 석가의 교화를 받아 불교를 수호하는 신들이 되었다. 현재의 조상에 나타난 각 상이 천룡팔부의 어느 상을 나타내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현재 석굴암에 배열된 팔부신중의 순서가 일반적으로 각 경전에서 열거되는 것과 같은 순서는 아니라는데 동조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부처를 향해 우측으로 첫 번째부터 가루라(迦樓羅), 건달바(乾闥婆), 천(天), 마후라가(摩喉羅伽)이며,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으로 입구에서부터 아수라(阿修羅)·긴나라(緊那羅)·야차(夜叉)·용(龍)..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2) 석굴암(2)

https://youtu.be/NTmgJK3JzX4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석굴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호로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에 세웠다고 한다. 한편 최완수 박사는 원성왕이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인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주목했다. 그는 원성왕이 과거 왕들과의 단절을 표방하기 위해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는 것을 피하고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 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1) 석굴암(1)

https://youtu.be/NTmgJK3JzX4 유네스코는 광범위한 경주 영역을 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했지만 경주에 있는 한국의 유네스코세계유산의 간판은 석굴암과 불국사라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재되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에 석굴암과 불국사가 있으므로 석굴암과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두 번 지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틀에서 설명하는 이유다. 그런데 석굴암이 불국사와 함께 국내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한국 사람들도 다소 어리둥절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석굴암이 한국의 간판이 되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상당히 근거있는 것..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0), 경주국립박물관 실내외전시관(2)

백률사에서 이전된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도 국립경주박물관의 간판스타나 마찬가지다. 높이 약 179센티미터의 입상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금동비로좌나불좌상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3대 금동불 중 가장 큰 불상으로 1930년 백률사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 '백률사에 대비상(大悲像)이 모셔져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금동불이 기록의 대비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는 신체에 견주어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원형이다. 긴 눈썹, 가는 눈, 오목한 코, 잡은 입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불상이다. 아랫배가 나오고 상체가 뒤로 젖혀지면서 우람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깨가 다소 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9), 경주국립박물관 실내외전시관(1)

에밀레종을 좌우로 야외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신라 석탑의 규범이나 마찬가지인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높이 9미터의 고선사지삼층석탑은 화강암 석재로 건조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올려놓은 일반형 석탑이다. 원래 경주시 고선사지에 있었으나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규모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과 비슷하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층기단은 굽처럼 올려진 기대와 면석이 같은 석재로서 12개석으로 짜여졌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3주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12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8),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5)

https://youtu.be/MJOXlXyC2SE 이병호 교수는 또한 후리퀀시 스펙트럼 어낼리시스(Frequency spectrum analysis)를 이용해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하여 종소리를 비교 평가하였다. 음질 평가치를 정의하여 그 수치를 계산하는 것인데 한국의 유명한 종을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다음과 같았다. 1) 에밀레종 : 86.6 2) 상원사종 : 71.5 3) 보신각종 : 58.2 4) 중국 영락대종(46톤) : 40점 각 종의 음질평가치에 의하면, 에밀레종이 제일 좋은 종소리를 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에밀레종 소리는 명실공히 세계 제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7),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4)

https://youtu.be/MJOXlXyC2SE 에밀레종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으로 판명되기에는 우선 한국종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종소리는 크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지만 이외에도 󰡐울림󰡑이 있어야 한다. 종소리의 울림이란 종을 한 번만 쳐도 󰡐웅, 웅, 웅󰡑하고 종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계속 되풀이해서 울리는 현상을 말하며 물리학에서는 ‘맥놀이(beats)’라 부른다. 종소리의 울림, 즉 천상의 울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특별한 소리를 내는 ‘맥놀이’는 진동수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음파가 동시에 발생될 때 생기는 일종의 간섭 현상이다. 맥놀이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난다. 근래 경주 박물관에서 저주파 스피커에 통과시킨 성덕 대왕 신종의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6),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3)

https://youtu.be/MJOXlXyC2SE 에밀레종의 역사적인 발자취도 자못 극적이다. 이 종은 서기 771년에 완성된 후 봉덕사에 봉납되었으나 봉덕사 전체가 수해로 유실된다. 그러나 무거운 종만은 떠내려가지 않은 채 땅속에 묻혀서 약 70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될 때는 많은 불교 범종을 녹여서 무기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그후 조선 시대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졌으나 종각이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종각이 소실되자 또 다시 노천에 버려져 있던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조 5년(1460) 영묘사(靈妙寺)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5),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2)

https://youtu.be/MJOXlXyC2SE 이 문제는 2017년 계림월성지구 월성지구 반월성의 발굴 중 서쪽 성벽 기초부분 속에서 1600여 년 전 살았던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되어 새로운 각도의 검토를 제기했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들 유골이 문헌으로 전해오던 ‘인주 설화’의 증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주란 인간 기둥을 의미하는데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묻거나 기둥으로 세우면 건물 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두 인골 모두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튼튼한 성벽을 쌓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특히 인골들 발치 쪽에서 5세기 전후 만들어진 토기 4점이 나와 성벽 축조 시기 등도 확인됐는데 이는 당대의 인신공양이..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4), 경주국립박물관 에밀레종(1)

https://youtu.be/MJOXlXyC2SE 경주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마무리는 경주 시내에 있는 경주국립박물관 방문이다. 경주국립박물관의 시원은 여타 박물관과는 매우 다르다. 경주가 신라 천년의 고도였던 까닭에 문화재 보호에 일찍 눈을 뜬 경주지역 유지들이 1910년 ‘신라회’를 만들었고 이 모임은 1913년 ‘고적보존회’로 발전하여 1915년 경주 객사에 진열관을 만들었다. 이것이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이다. 이후 소장품들이 점점 증가했는데 해방 뒤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자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이 되었고 1975년 현재의 자리에 이전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답사하면서 경주국립박물관을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에밀레 종, 황금보검을 비롯하여 수많..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43) 계림월성지구 동궁과 월지

월성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사적 제18호인 안압지(雁鴨池)가 있는데 임해전(臨海殿)으로도 불렸다.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신라 왕실의 별궁인 동궁 안에 세워진 전궁(殿宮)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인데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 월지궁이었다고 알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