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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

https://youtu.be/rK-tWlfcKGY 경주 들어가기 : 형산강 좌측 유산(1) 천 년 고도 경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인데 이곳에서는 서울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는 경우를 기본으로 한다. 그럴 경우 경주IC가 아닌 건천IC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고속도로로 주행하면서 경주IC에서 내리지만 건천IC를 시발점으로 잡으면 형산강 좌측인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금척고분군(사적 제43호), 법흥왕릉(사적 제176호), 효현동삼층석탑(보물 제67호), 무열왕릉(사적 제20호), 서악리고분군(사적 제142호), 경주서악리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서악동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진덕왕릉(사적 제24호), 경주나원리5층..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1)

https://youtu.be/9yMt9_iNp1k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인 경주는 다소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 경주에 있는 불국사ㆍ석굴암이 1차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2000년 보다 큰 영역의 경주시 전체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유산 속의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경주 일원이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다른 유산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종묘나 창덕궁들은 단일 품목으로 등재되었지만 경주는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와 같은 예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우선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세계사 전체..

조선 왕릉 답사 (89) : 제4구역 융건릉(5)

https://youtu.be/i98tRPFzH8U 융릉과 건릉의 전체면적은 84.2ha이며 수목현황은 침엽수 62%, 활엽수가 38%다. 건릉의 능역 입구에서 배수로와 참배로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는 상수리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건릉 진입부와 주변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의 참나무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관림을 갖고 있는 정조의 무덤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던 부탁대로 묻혔다. 그런데 1821년 효의왕후가 사망하자 정조 릉의 천장이 제기되었다. 정조의 릉이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김시..

조선 왕릉 답사 (88) : 제4구역 융건릉(4)

https://youtu.be/v6_n_pWSj1c ② 건릉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융릉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정조는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은 왕으로 기록된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神龍)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 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의..

조선 왕릉 답사 (87) : 제4구역 융건릉(3)

https://youtu.be/mqxDLasJ5AE 왕릉의 일반적인 진입 공간은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데 융릉의 연지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연지의 형태가 방지원도임에 반하여 융릉은 원형으로 조성되었다. 원형의 호안은 곡선 장대석으로 원형석축을 쌓아 놓았으며 연지의 지름은 약 186미터다. 융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죄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의 전후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각 4..

조선 왕릉 답사 (86) : 제4구역 융건릉(2)

https://youtu.be/q38ZM_kyuxY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이 나온다.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실제로 복원된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조선 왕릉 답사 (85) : 제4구역 융건릉(1)

https://youtu.be/gtfrCMbq8n0 조선왕릉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隆健陵)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세상에는 비극의 주인공도 많고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왕조의 비극과 권력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마의태자와 단종이 역사에 자주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다. 28세의 꿈같은 나이에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조선 왕릉 답사 (84) : 제4구역 장릉(3)

https://youtu.be/yzdzi_LAkwM 장릉의 능침은 다행히도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많다. 장릉 터를 풍수가들은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능역 내에는 홍살문, 정자각, 단종비각, 재실 등 여타 왕릉과 다름없다. 그러나 장릉은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돼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공간과 다른 형태다. 이것은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장릉의 상설은 정릉(貞..

조선 왕릉 답사 (83) : 제4구역 장릉(2)

https://youtu.be/y1vdbqHB3sc 단종의 복위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의 행보다. 그는 세조에게 끝까지 항거했는데 금성대군은 세종 8년(1426)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세조는 그의 친 형이다. 그런데 세종은 금성대군을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4년과 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을 정도다. 세종의 금성대군에 대한 총애는 극심하여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의 감독을 맡아보았다. 세종 31년(1449) 세종이 병석에 눕자 그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했을 정도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조선 왕릉 답사 (82) : 제4구역 장릉(1)

https://youtu.be/AJhDJ8tAXAA 영월의 장릉(莊陵, 사적 196호)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40km에 조영됐다. 그러나 조선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107여 만 평이나 된다. 단종이 이처럼 먼 곳에 묻힌 이유는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단종은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아버지 문종이 왕이 된지 2년 3개..

조선 왕릉 답사 (81) : 제4구역 영녕릉(7)

https://youtu.be/A9zJiqnnO0Q 효종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 능선에 있는 현재 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그런데 막상 효종의 시신을 관에 넣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효종의 어깨가 너무 넓어 시신을 넣기 위해 준비한 관이 맞지 않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한다. 효종의 재위 기간인 10년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다는 뜻이다. 효종이 북벌에 신경을 쓰기 위해 체력을 단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는데 이는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

조선 왕릉 답사(80) : 제4구역 영녕릉(6)

https://youtu.be/TAw3aaBuUCs 놀라운 것은 최석정이 9차 직교 라틴 방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 9차 라틴방진을 이루면서, 81개의 칸에는 (1, 1)부터 (9, 9)까지 81가지 경우가 중복되지 않고 한 번씩 제시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수략』에서는 ‘종횡개득구십수(縱橫皆得九十數) 총적팔백일십(總積八百一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종과 횡 모두 90을 얻어 더하면 810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각 칸의 첫 번째에 제시된 수들은 각각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1부터 9까지이므로 그 합이 45이고 두 번째 수들의 합 역시 45가 되므로 합하면 90이 되며, 그런 가로줄이나 세로줄이 9개 있으므로 810이 된다는 뜻이다. 최석정이 만든 9차 직교라틴방진은 중국의 수학책에 포함..

조선 왕릉 답사 (79) : 제4구역 영녕릉(5)

https://youtu.be/pKG6O7dSQG8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13년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하여 글을 썼다. 하나는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급여를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쓴 ‘일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겪은 조선의 풍물에 대한 것이다. 이 글들을 엮어 출간한 책이 『하멜표류기』다. 이방인이 눈으로 본 단상이지만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로 의의가 깊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함께 효종과 현종이 표착 서양인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인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왕이 버린 선고에 복종하지 않고 트집을 잡으면 사형이다. 우리가 조선에 있을 때 이와 유사..

조선 왕릉 답사 (78) : 제4구역 영녕릉(4)

https://youtu.be/CncIcB8S14A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효종의 북벌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효종이 이를 모를리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

조선 왕릉 답사 (77) : 제4구역 영녕릉(3)

https://youtu.be/ist6_gKZJl8 ②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 정씨의 쌍릉인 영릉(寧陵)이 있다. 그러므로 두 능을 합하여 영녕릉(英寧陵)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릉만 알려져 있는데 덤으로 또 한 릉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2살에 한 살 위인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려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볼모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금주..

조선 왕릉 답사 (76) : 제4구역 영녕릉(2)

https://youtu.be/hNO9Q1NkM9I 세종대왕릉이 영릉에 오게 되는 과정 즉 천장(遷葬)에는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태종은 원래 서울시의 주요 문화재로 지정된 헌릉(강남구 내곡동 소재)에 묻혔다.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 사후(세종 2년)에 능기(陵基)를 잡아놓은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인 태종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 장자인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삼자인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에 대한 보은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세종은 헌릉 서쪽(수평거리 190미터)에 자신의 수릉을 재위 시 미리 잡았다. 그러나 수릉 택지 1년 후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하여 장사를 지낼 때 수릉 자리가 풍수지리상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한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세종의 고집..

조선 왕릉 답사 (75) : 제4구역 영녕릉(1)

https://youtu.be/ZokxfzA-S6I 제1구역부터 제3구역을 답사하면 제4구역인 영녕릉(英寧陵, 사적 195호), 장릉, 융건릉이 남는다. 이들을 4구역으로 분리한 것은 영녕릉과 융건릉은 서울에서 떨어져 있으며 특히 단종의 장릉은 영월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연계하여 답사하면 북한에 있는 2개의 왕릉을 제외한 40개의 왕릉을 모두 답사하는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제일 먼저 영녕릉을 향한다. 영녕릉은 조선의 4대 왕인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인 영릉(寧陵)이 좌우로 자리한 곳이다. 우연히도 두 능의 한글 이름이 같아 흔히 ‘영릉’으로 함께 불리므로 세종대왕의 능으로만 알려져 있고 효종의 능은 가려지곤 한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

조선 왕릉 답사 (74) : 제3구역 정릉

https://youtu.be/Zci21yI7UdM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 사적 208호)은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 1899년)의 능으로 능역은 90,621평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고향의 부인)⋅경처(景妻, 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이성계가 원나라 동녕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끼자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씨와 정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었다. 태조(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

조선 왕릉 답사 (73) : 제3구역 선정릉(4)

https://youtu.be/x7G_49Q43i0 중종 시대에 중요한 변혁은 국방 문제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 등 남부 지방은 끊임없이 왜군에게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빈번히 침략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라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월이었다. 여하튼 중종이 1544년 11월 창경궁에서 사망했는데 왕위에 있던 기간은 무려 39년이다. 조선왕조에서 재위기간이 길지만 사망할 당시 나이는 57세다. 여하튼 중종이 사망하자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있는 서삼릉(西三陵)의 희릉(禧陵)과 동원이강을 이루고 정자각은 왕과 왕비의 능 사이로 옮겨 설치했..

조선 왕릉 답사 (72) : 제3구역 선정릉(3)

https://youtu.be/2ufB4Rg0O28 ② 정릉(靖陵) 제11대 중종(1488〜1544)의 능인 정릉은 선릉에서는 다소 다리품을 팔아야할 정도로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선릉과는 달리 사람들의 방문이 많지 않아 고요한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능역의 경계를 벗어나면 강남 중심부답게 주위가 매우 번화하여 묘한 대비를 이룬다. 중종은 조선왕조의 치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왕으로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주인공 중의 한 명 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유명한 중종이 정릉에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종은 그야말로 격변기의 왕이다. 성종 19년(1488)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13세인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