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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2) 남산지구(동남산(2))

동남산의 서쪽을 답사한 후 되돌아 나와 통일전의 동쪽을 향하는데 중앙에 위치한 통일전을 들어가 본다.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로 무열왕, 문무왕의 영정은 김기창 화백, 김유신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세 사람의 사적비와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삼국통일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 17점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는데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내용들도 많으므로 시간을 쪼개어 볼 만하다. 통일전에서 몇 걸음 걸으면 화랑대교육원이 나오는데 이곳에 경주남산동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가 있다. 이 감실의 크기는 높이 2.5미터, 내부공간의 바닥 길이 1미터, 높이 1.4미터, 깊이 0.9미터다. 남향으로 다듬지 않은 장대석으로..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1) 남산지구(동남산(1))

서남산과 남남산을 주파하면 소위 매를 먼저 맞은 셈이므로 다음 길이 경쾌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동쪽을 의미하는 동남산은 통일전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지는데 먼저 좌측을 향한다. 동남산 좌측으로는 서출지(사적 제138호), 남산리삼층석탑(보물 제124호), 염불사터(사적 제311호), 국보 제312호인 칠불암마애불상군, 보물 제199호인 신선암마애보살상 등이 기다린다. 통일전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이 유명한 서출지(書出池)다. 서출지는 이름 그대로 글이 나온 연못이다. 소지왕 10년(488) 궁 밖으로 거동하니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했다. 왕이 그 말대로 따라가 이 연못에 이르자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봉투를 주었는데 그곳에는 ‘거문고 갑을 쏘시오’라고 써 있었다.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0) 남산지구(남남산II)

고위산에서 천룡사지를 향하는 길은 하산길이지만 다소 가팔라 주의가 필요한데 중도 곳곳에서 금오봉, 용장사지3층석탑, 연화대, 비석대, 이영재 등을 멀리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장관 중에 장관인데 유명한 전설이 깃든 분암(糞岩, 똥바위)도 보인다. 장마 때에는 바위 틈으로 물이 흘러 내리므로 뇨암(尿岩)이라고도 하는데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보자. ‘신라시대 각간에게 곱고 아름다운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눈독을 들었지만 그녀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며 몰래 집을 나서 열반골로 들어갔다. 그녀는 평평한 바위인 경의암에서 금빛으로 수놓은 비단옷을 벗고 잿빛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향기를 맡고 수많은 맹수들 형상을 한 큰 바위들이 길을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9) 남산지구(남남산I)

제2구역 남남산 지역은 남산 답사에서 가장 어려운 구역 중의 하나다. 답사지 자체는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남산 침식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백운대 마애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 등 4곳에 지나지 않지만 산행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다 남산 여타 지역처럼 답사할 곳이 밀집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있으므로 소요시간도 만만치 않다. 또한 오지 중 오지에 있으므로 한마디로 답사에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길을 잘못들 경우가 많아 정확하게 찾아가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수풀이 울창할 때 부정확한 지도를 갖고 이정표로 찾아가려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정확한 산행 정보를 갖고 답사에 도전하든가 그렇지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8) : 남산지구 서남산(VII)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에서 약 500미터 되는 지점에 또 하나의 선각예술품이 있는데 삼릉계곡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이다. 앞뒤의 바위에 윤곽을 파서 여섯 분의 불보살상을 새긴 것인데 최준식 박사는 이 육존불상이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최 박사가 이것을 그림이라고 한 이유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선을 따라 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뒤쪽 바위는 높이 4미터 폭 7미터 정도로 바위면 가운데 본존은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으로 높이는 2.4미터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2.6..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7) 남산지구 서남산(VI)

금오봉에서 통일전, 포석정, 칠불암, 삼릉골 또는 용장골로 되돌아갈 수 있는데 여기서는 삼릉골로 향하는 길을 잡는다. 금오봉에서 삼릉골까지의 길은 부드러운 능선길로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데 ‘기도를 하면 아기를 낳게 된다’고 알려지는 상선암이 나타난다. 상선암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인데 상선암 못 미쳐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이 나타난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가 남쪽 중턱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바둑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한국인들은 바둑을 두는 풍치도 다소 달랐다. 계곡이나 산중의 경치 좋은 암석 위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풍류를 즐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돌바둑판을 석국(石局)이라고 한다. 석국..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16) : 남산지구 서남산(V)

남산신성을 답사에 포함하든 아니든 포석정을 지나 남산지구 문화유산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용장마을에서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대장정 등산로를 도전한다. 남산의 계곡이 40여 개소이며 등산로는 60여 곳이나 된다고 알려지는데 용장마을부터 등산로를 잡은 이유는 김시습 유적지를 비롯하여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보물 187호),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 186호)은 물론 남산의 절경 등을 맛 볼 수 있으며 이어서 금오산에 오르면 원하는 다음 답사지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만진 선생은 용장마을로 올라가면 두 가지 잇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이 용장골에 놓았다는 설잠교를 건널 수 있다. 설잠(雪岑)은 말년..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5) : 남산지구 서남산(IV)

포석정과 지마왕릉 사이로 산행도로가 있는데 이곳에서 ‘경주 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拜里潤乙谷磨崖佛坐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과 남산신성을 답사할 수 있다. 이들은 창림사지3층석탑에서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이곳에서는 포석정과 지마왕릉 중간의 산행도로를 취한다. 산행도로는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오히려 산행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불평도 잠시 좌측으로 조그마한 못이 나온다. 특징적이지 않은 조그마한 못인데 굳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질문하지만 이곳이 바로 포석정에 물을 공급했던 안골샘못다. 못 자체는 크지 않지만 포석정과 연계하면 신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곳이므로 조용한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곳에서 계속 다소 지루한 길을..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4) : 남산지구 서남산(III)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우유의 살균법으로 설명하자면, 우유 속에 있는 유해균이 온도 A에서 시간 T분 동안 노출되면 전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원형 용기 전 표면을 통해 온도 A+α 이상의 열기를 골고루 주었을 때 어느 지점에 있는 우유가 가장 늦게 온도 A에 이르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지점에 있는 우유의 온도가 T0분 만에 온도 A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면 T+T0분 동안 열기를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한 유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 열기가 투입된 직후의 유체 흐름으로 정상 상태의 회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용기 안의 유체는 자연 대류 현상을 일으켜 와 같은 흐름으로 변형된다. 즉, 우측 하단부에 주 흐름과는 반대되는 작은 흐름이 나타나고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3) : 남산지구 서남산(II)

배리삼릉은 경애왕릉에서 북쪽을 응시하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년), 52대 신덕왕(912∼917), 53대 경명왕(917∼924)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박씨다. 또한 삼릉과 포석정 사이의 6대 지마왕, 장창골에 있는 일성왕도 박씨다. 시조인 박혁거세도 이곳 나정에서 출생했다. 선도산 일대가 김춘추 일가의 산소였듯이 남산 서쪽 일원은 박씨들의 터전으로 볼 수 있다. 삼릉에 묻힌 아달라왕은 154년부터 184년까지 30년을 재위했는데 안내판은 아달라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달라왕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12) : 남산지구 서남산(I)

천관사를 지나 남산 남서쪽 비탈에서 만나는 첫 답사지는 박혁거세가 알로 태어난 곳인 나정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한 지절원년(기원전 69)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11) : 남산지구(들어가기II)

한 달을 걸려 답사한다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은 남산 답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유네스코세계유산은 모두 답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남산을 3구역으로 나누어 도전한다. 제1구역 ‘서남산(1)’과 ‘서남산(2)’, 제2구역 ‘남남산’, 마지막으로 제3구역으로 ‘동남산(1)’과 ‘동남산(2)’ 지역이다. 제1구역 서남산(1)은 남산의 서쪽으로 평상복으로도 충분히 답사할 수 있는 곳이다. 반면에 ‘서남산(2)’는 서남산의 중앙 부분으로 단단한 차림을 하고 산악 등정에 도전해야 한다. 이곳을 주파한 다음 여세를 몰아 제2구역 남남산에 도전하는데 이 일정도 단순하지 않다. 세계유산만 따지면 몇몇 곳에 지나지 않지만 산재해 있는데다 답사지를 찾는 것도 수월하지 않아 단단한 준비..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10) : 남산지구(들어가기I)

경주역사유적지구의 꽃이라고 볼 수 있는 대릉원지구를 답사했다면 다음 일정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다. 흔히들 ‘매를 먼저 맞을래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맞을래’ 또는 ‘좋은 소식을 먼저 들을래, 나쁜 소식을 먼저 들을래’라고 말하는데 경주 역사지구를 답사할 때 이런 말이 적격이다. 남산을 답사하려면 남다른 고생이 필요한 곳도 있으므로 이를 먼저 답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소 쉬운 일정부터 시작하느냐를 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5구역으로 나뉘었지만 경주가 평탄한 대지위에 건설되었으므로 접근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 반면에 남산지구는 포석정과 같은 과학 유산과 왕릉 같은 불교와 연관이 없는 문화재도 있지만 야외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온 산이 불교 문화재로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9) : 대릉원지구(4) 천마도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흔히 말하는 대박이 터졌다. 찬란한 신라금관을 포함하여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그 장식은 물론 목에 걸었던 경식(頸飾), 천마도 등 무려 11,526점에 달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간판스타가 천마도다. 천마도의 크기는 가로 75센티미터, 세로 56센티미터, 두께 0.6센티미터로 용도는 ‘말다래’다. 장니(障泥)라고도 불리는 말다래는 말안장에서 늘어뜨려 진흙이 사람에게 튀는 것을 막는 장식이다. 말 안장의 좌우에 매달던 것이므로 처음 발굴될 때는 2장이 겹쳐 있었다. 한 장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같은 그림으로 된 나머지 한 장은 무사하여 이것이 국보 207호다. 천마도는 신라뿐 아니라 삼국시대 전체를 통틀어 벽화를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8) : 대릉원지구(3) 금관

금관은 고고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의 직경이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 18.4센티미터, 황남대총 금관 17센티미터, 금령총 금관 16.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센티미터, 복천동 금관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센티미터로 둘레는 53.4센티미터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금관의 크기가 작은 이유로 금관을 어린아이일 때 사용하고 장성해서는 다른 관을 사용했다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신라의 금관처럼 정교하고 호화로운 금관을 어린아이용 소위 장난감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다른 이유로는 금관을 사용하던 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7) : 대릉원지구(2) 적석목곽분II

대릉원지구의 간판스타라면 사적 제40호인 경주황남리고분군 속칭 대릉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대릉원에는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야간에도 개장하여 어느 곳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적 제175호인 미추왕릉은 여러 모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다르다. 우선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되었다는 점이고 또 무덤 둘레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묘역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세워져 있으며, 무덤 앞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숭혜전도 건립되어 있다. 미추왕이 그토록 사후에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그가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씨 최초의 신라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에 있는 이서국이 금성 즉 경주를 공격해왔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 : 대릉원지구(1) 적석목곽분I

탈해왕릉에서 경주로 직진하면 곧바로 유네스코세계유산인 대릉원지구를 비롯하여 역사의 도시 경주에 도달한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경주역사지구는 5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큰 틀에서 모두 인근이므로 일정을 어떻게 잡든 큰 차이가 없다. 각자의 편의에 따라 답사에 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곳에서는 대릉원지구를 먼저 방문한 후 다음 일정으로 넘어간다. 천년 고도 신라를 외국인과 함께 답사해보면 한마디로 놀랍다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경주 시내 곳곳에 동산만한 무덤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경주 중앙에 있어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있다며 더욱 신기하게 생각한다. 생자와 사자가 함께 있는 도시는 많이 있지만 경주와 같이 평지에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한국의 경우만 ..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5)

https://youtu.be/uzNbVDxtYXE 큰 틀에서 형산강 좌측에서 우측으로 건너면 천년 고도 경주의 일곽이 된다. 남산지구를 포함하여 5구역으로 나뉘어진 유네스코세계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본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경주 소금강산(북악)을 지나칠 수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굴불사터에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이 있고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이 있는 백률사가 있다. 소금강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산세가 험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높이 28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소금강산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차돈이 순교하는데 그의 목이 잘라지자 머리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떨어진 곳이 북악으..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4)

https://youtu.be/GNPsDy83B_w 경주 형산강 좌측 유산(3) 서악리삼층석탑의 좌측으로 선도산의 주능선 말단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 25대 진지왕(576∼579), 46대 문성왕(839∼857), 47대 헌안왕(857∼861)의 무덤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36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재위 기간은 길지만 일곱 살에 즉위를 한 탓에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에 지나지 않았다.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쌓았다고 알려지는 등 한국의 왕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법흥왕이 불교 공인 이래 처음 창건 공사에 들어갔던 흥륜사를 완공했고 일반인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더구나 진흥왕의 신라군은..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3)

https://youtu.be/9cVivYLJF4E 단석산 신선사에서 하산하여 건천IC로 향하면 통일신라 이전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인 대소 50여기의 적석목곽분(32기 확인)들이 마을처럼 운집해 있는 사적 제43호 경주금척리고분군(慶州金尺里古墳群)을 만난다. 안내판에 의하면 박혁거세가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金尺)를 주었는데 왕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손에 그것이 쥐어져 있었다. 왕은 꿈에 신인이 가르쳐준 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자 다시 살아났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당나라 황제의 말이기는 하지만 왕은 이를 감추기 위해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